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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수레가 부서지는 사고는 역모죄로 비화했다. 수레 제작을 주도한 장영실은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렸다. 모든 정황은 그가 누명을 쓴 것이 분명했지만, 그에 앙심을 품고 있던 사대부들의 탄핵여론은 세종은 강하게 압박했다. 세종과 그를 따르는 일부 사대부들이 장영실의 구명을 위해 고심했지만, 장영실은 스스로 죄를 자복하고 죽음을 택했다.


누구보다 장영실의 진심을 잘 아는 세종은 장영실을 버릴 수 없었다. 장영실은 백성들을 삶을 이롭게 하려는 세종의 정치 철학을 상징하는 어쩌면 그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문자를 반포하고 격물 진흥 정책을 지속하기 위해 사대부 세력들의 반발을 누그러뜨려야 했다. 


이런 세종에 사대부 세력은 장영실이 업적을 담은 역사기록까지 삭제할 것을 요구하며 정치적으로 더 강하게 세종을 압박했다. 세종은 장영실에게 장형을 내리고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결정을 했다. 그를 떠나보내는 것은 괴로웠지만, 그의 목숨을 지키고 문자반포 및 격물 진흥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세종은 장영실의 목숨을 거두고 역사기록을 삭제할 것을 요구하는 사대부 세력들의 주장을 뿌리쳤다. 





결국, 장영실은 자신의 뜻을 펼쳤던 한양을 떠나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장영실은 죽음의 문턱에 이른 순간까지도 새로운 발견을 위해 고심했지만, 장형을 당한 이후 깊은 혼수상태에 빠졌고 깨어난 후 깊은 무기력증에 빠졌다. 목숨을 건지긴했지만, 격물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정도로 열정적인 장영실의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를 아끼는 세종과 이천 등의 지인들이 그가 본래의 장영실도 돌아오길 고대했지만, 장영실은 좀처럼 예전과 같은 총명함과 열정을 되찾지 못했다. 그가 은거에 들어간 이후 세월은 계속 흘렀다. 그 사이 그와 함께 조선의 격물 진흥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세종, 이천 등이 세상을 떠났다. 그사이 조선왕조는 격변기를 거쳐 세종 사후 문종과 단종을 거쳐 세조시대로 바뀌어 있었다. 


장영실은 그런 역사의 거대한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그만의 세상 속에 갇힌 채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새 왕이 된 세조가 그를 찾아 그를 도와줄 것을 간청했지만, 그는 변함이 없었다. 그의 험난했던 삶의 여정을 알고 있었던 세조는 더는 그를 재촉하지 않고 도성으로 돌아갔다. 세조가 떠나자장영실은 거짓말 처럼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긴 세월이 지나 백발노인이 되어서야 장영실은 과거 격물에 미쳐 모든 것을 바친 사람으로 돌아왔다. 


이후 장영실은 그의 삶이 다할 때까지 격물 연구를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마지막 순간도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천문 연구를 위한 여정 중이었다. 장영실은 일식이 정확히 예보된 것을 기뻐하며 아무도 없는 들판에서 눈을 감았다. 그렇게 그는 하늘의 별이 됐다. 


이렇게 장영실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노비 출신으로 높은 벼슬에 올랐다는 것 자체만으로 유교적 질서가 공고한 조선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 유교적 사상으로는 천시될 수밖에 없었던 격물, 오늘날의 과학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며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는건 그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했다. 이는 그의 능력을 눈여겨보고 그를 등용한 태종과 그의 능력을 꽃피울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한 세종이 있어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15세기장영실과 세종의 일궈낸 과학적 업적은 전 세계를 통틀어 당 시대 최고 수준이었다. 


하지만, 유교질서가 공고해진 시대에 장영실의 존재는 집권층에게는 너무나 큰 위협이었다. 능력만 있으면 신분과 관계없이 등용되고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있음을 보여준 장영실은 신분제를 흔드는 인물이기도 했다. 집권 세력인 사대부들로서는 장영실은 꼭 제거해야 할 존재였다. 드라마에도 언급됐지만, 역사적으로 장영실이 세종의 수레가 부서지는 사고에 역모죄의 누명을 쓰게 된 것도 이후 야인이 된 것이 누군가의 음모에 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하는 이유다. 


실제 장영실은 그 사건 이후 역사 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세종시대 과학 발전의 한 축을 담당했던 그였지만, 장영실이 이후 행적과 언제 사망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분명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현실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갖춘 이들이 기성 사회의 나쁜 관습과 관행에 반할 때 능력이 사장되고 경원 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한 것과 비교되며 씁쓸함을 가져다 준다. 


그의 말년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지만, 장영실이 남긴 많은 발명품은 우리 과학사에 기록되어 있고 그의 이름 역시 우리 마음속에 남아있다. 어쩌면 장영실은 자신을 버렸기에 영원히 빛나는 별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드라마는 물론이고 역사적으로도 장영실이 그 능력을 끝까지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은 큰 아쉬움이다. 현재의 삶에서는 장영실과 같은 인물이 사회의 불합리한 악습에 막혀 좌절하는 일이 없는 세상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사진, 글 : 심종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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