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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를 배우면서 많이 들었던 단어 중 하나가 당파싸움이다. 분명 긍정적인 단어는 아니다. 대립과 분열을 강조하는 듯 한 단어의 조합은 부정적인 면이 강하다. 이는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식민 사관의 영향이 강하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파를 갈라 싸우기를 좋아하고 단결하지 못한다는 식의 논리가 그것이다.


실제 우리 역사에 있어 당파싸움, 지금은 붕당정치로 칭해지는 정치권의 대립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오늘날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붕당정치에 무조건적인 비판을 하는 것은 과한 부분이 있다. 어쩌면 우리는 붕당정치의 일부분만을 보고 그것을 평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선진 정치와 거리가 먼 당파 간 이익에 따라 이합집산을 이루고 수준 낮은 대립과 반목을 거듭하는 우리 정치의 행태가 오버랩 되면서 조선시대 붕당정치에 대한 부정적 시선이 더해지는지도 모른다.

붕당정치는 조선 중기 본격화됐다. 조선 초지 정치의 주도 세력은 조선 건국에 큰 역할을 한 공신들과 태종 이방원과 권력 쟁취를 함께 한 측근들이 중심이 된 훈구세력 들이었다. 이들은 소수였지만, 대를 이어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관직은 독점되었고 왕권에 버금가는 힘을 가지기도 했다.






조선 왕들은 훈구세력을 견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위해 이들과 맞설 정치세력이 필요했고 지방을 기반으로 한 사림세력들이 중앙 정계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다. 성종 때 이후 왕들 역시 사람 세력을 적극 기용했다. 하지만 사람 세력들이 중앙 정치무대에서 자리를 잡기는 쉽지 않았다. 기득권을 가진 훈구세력은 그들을 끊임없이 견제했다. 그 과정에서 수차례 사화가 발생했고 수많은 사람 세력들이 숙청당했다.

그럼에도 사람 세력을 꾸준히 그 세력을 넓혔고 선조 때에 이르러 정치의 중심 세력으로 자리했다. 하지만 사람 세력은 공공의 적이었던 훈구세력을 몰아낸 이후 이해관계에 따라 분열됐다. 한정된 관직에 늘어난 양반의 수는 권력을 향한 대결을 불가피하게 했다. 애초 성리학 사상적 차이로 갈라져 있던 사람 세력이 정치적 대립관계가 더해졌다. 이는 붕당정치의 시작을 불러왔다.


선조 때 조정의 중요 관직을 놓고 시작된 대립에서 시작해 동. 서 양당으로 갈라진 정치 세력을 지금의 여당과 야당과 같은 관계를 유지하며 붕당정치를 본격화했다. 한때 율곡 이이와 같은 인물이 동. 서 양당의 공존을 모색하며 이를 위해 힘쓰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서인은 율곡 이이의 사상을 기반으로 동인은 퇴계 이황의 사상을 기반으로 더 강하게 대립했다. 


이후 서인은 노론과 서론으로 동인은 북인과 남인 등으로 다시 분화되며 붕당정치는 더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됐다. 초기에는 상대 당의 존재를 인정하고 상호 공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권력 독점화 경향이 강화되면서 상대당을 숙청하는 식의 정치 보복이 난무하는 식으로 변질됐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의 대립이 정파 간 이해관계를 우선시하면서 국가 정책 결정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었다. 특히, 임진왜란 직전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수행원들이 동인과 서인의 입장에서 다른 의견을 내면서 일본의 야욕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부분은 붕당정치의 폐해를 보여준 장면이었다. 이렇게 붕당들의 대립은 나라를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보다는 정파의 이익과 권력투쟁의 방향으로 전개됐다.


물론, 붕당정치를 긍정적 방향으로 이용한 왕들도 있었다. 조선 후기 부흥기를 이끈 영조와 정조는 특정 정당에 의존하지 않는 다양한 인재 기용으로 정파 간 대립을 완화했다. 이를 통해 정치 안정과 함께 왕과 권력을 지난 붕당과 그렇지 않은 붕당이 상호 견제하에 공존했다. 이런 구조는 권력의 독점과 부패를 막는 효과도 있었다. 이처럼 붕당정치의 본래 목적은 권력의 쏠림 현상을 막고 다양한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는 발전된 정치 형태였다.

하지만 이런 이상적 붕당정치는 강력한 왕권이 있을 때만 제대로 작동했다. 그 시간도 길지 않았다. 왕권이 미약할 때 정파 간 이해관계는 다시 심화됐고 권력 투쟁은 다시 격화됐다. 이 과정에서 상호 공존의 원칙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고 일반 국민들을 위한 정치는 실종됐다. 마치 오늘날 우리 정치의 모습과 같았다.


정조 사후 붕당정치는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로 변질되면서 그 명맥마저 끊어지게 됐다. 그나마 존재하던 견제세력마저 사라진 세도정치는 나라를 더 병들게 하고 조선을 쇠락시키는 원인이었다. 즉, 붕당정치가 조선을 망하게 했다는 식의 논리는 다소 비약한 측면이 있다 할 수 있다. 그나마 유지되던 붕당정치 시스템의 붕괴가 더 큰 문제였다.


이렇게 붕당정치는 당파싸움으로 매도되기에는 아쉬움이 많은 조선의 역사다. ​근대적 정치 형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문제는 이런 시스템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사장시켰다는 점이다. 붕당정치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조선 시대 붕당정치의 나쁜 이면을 그대로 닮은 우리 정치의 모습을 보면 붕당정치에 대해 무조건 비판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붕당정치가 조선을 망하게 할 원인이었을지 아직은 그렇게 단정하기에는 보다 많은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사진, 글 : 지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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