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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는 과거 사극에서 자주 사용됐던 소재 중 하나였다. 비리와 폭정을 일삼으며 일반 국민들을 수탈하고 못살게 하는 탐관오리들을 벌주고 무고한 이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등 일종의 구세주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 암행어사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들이 신분을 숨기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 악을 응징하는 모습을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다. 권선징악의 드라마 소재로 그만큼 극적인 소재도 그리 흔치 않았다.

실제 조선시대 암행어사는 비밀리에 왕명을 받고 지방을 순시하며 비리 관리를 벌주고 잘못된 지방행정을 바로잡는 역할을 했다. 당연히 암행어사의 존재는 일반 국민들에게 희망이었다. 이들은 이런 사찰 업무와 동시에 민심을 살피고 왕에게 전달하는 가교 역할까지 했다. 암행어사는 조선시대 중앙의 지방 통제를 강화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하지만 암행어사의 임무는 큰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신분을 드러내지 말아야 하는 까닭에 높은 지방관리들에 즉시 공권력을 행사할 수 막강한 권한이 있었음에도 수행자를 최소해야 했다. 위험을 감수하야 하는 일이었다. 가는 길에 산짐승이나 산적들에게 봉변을 당하거나 오지에서 조난을 당해 목숨을 잃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여기에 그들의 존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지방관들의 자객들에 의해 희생되는 일도 있었다. 여기에 붕당정치에 가속화된 이후에는 반대파를 견제하고 무고하는 수단으로 그 임무가 변질되기도 했다. 하지만 암행어사는 조선 말기 고종 때까지 그 존재가 역사서에 기록될 정도로 중앙에서 지방행정을 사찰하고 감독하는 수단이었다.



이런 암행어사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인물은 박문수를 꼽을 수 있는 실제 암행어사 박문수라는 드라마가 과거 인기리에 방영될 정도로 박문수는 암행어사 그 자체를 상장하는 인물이었다. 그에 대한 다양한 설화는 지방 곳곳에서 구전되어 전해질 정도로 그의 이름은 조선시대 일반 국민들에 크게 회자됐다.

하지만 조선시대 실록에 그가 암행어사로 활약한 기록은 없다. 대신 그는 조선 영조 시대 어사라고 하는 왕명을 수행하는 공식적인 업무를 수행한 적은 있었다. 박문수는 당시 영남지역에서 어사로 활동하면서 빈민들을 구휼하고 지방관리들의 비리를 처벌하는 한편 지역의 현안들을 잘 해결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때의 기억이 그에 대한 신화를 만드는데 큰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박문수는 암행어사라기보다는 행정가로 더 이름이 높았다. 박문수는 젊은 시절 관직에 등용된 이후 그 능력을 인정받고 주요 요직에 기용됐다. 그는 노론 세력이 조정의 중심 세력으로 떠오르던 영조 시대 소론에 속해있었지만,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영조가 강력하게 추진하던 탕평책의 수혜를 입은 인물이었다.



그만큼 영조의 박문수에 대한 신뢰는 컷을 가능성이 높다. 박문수는 국방을 담당하는 병조판서와 재정을 담당하는 호조판서 등 주요 요직을 맡아 영조를 보필했다. 특히, 호조판서로서 박문수는 당시 문제가 되던 조세 제조 개편이나 화폐개혁을 추진하는 것과 동시에 일반 국민들의 민생고를 해결하는 일에 적극 나섰다.

​박문수는 이와 동시에 행동하는 실천가였다. 국가가 소금 생산을 관장해 필수품은 소금의 가격을 안정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국가 재정 확충을 도모하기도 했다. 이는 노동을 천시하는 대다수 조정 대신들의 반대와 조롱을 받는 일이었지만, 그는 이를 꾸준히 밀어붙이는 뚝심을 보였다.



여기에 양반과 평민 모두에게 균등하게 군역을 부담하게 하는 호포제 도입을 주장하면서 조세정의의 실현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는 군포를 부담하지 않는 것은 양반들의 특권이라 여기던 시절, 집권층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박문수는 그 자신이 양반이었음에도 이를 주장하며 일반 국민들의 조세 부담을 덜어주려 했다. 이런 과감한 정책 추진과 더불어 박문수는 정치적으로 반대파에 있던 인물이 무고를 당해 위험에 처했을 때 이를 구명하는 등 공과 사를 구분하는 일처리로 왕의 강한 신임을 받았다.

 

박문수가 추진했던 정책들은 당시대에 실현되지 못했지만, 그의 정책은 일반 국민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치열해지는 붕당정치의 와중에 자신이 속한 당파의 이익을 우선시하던 당시 정치환경 속에서 박문수는 몇 안되는 일하는 정치가였다. 그가 죽자 영조는 깊은 슬픔은 드러내며 이를 애도할 정도였다.



박문수가 일반 국민들의 희망의 이름이 된 것은 암행어사로의 활동 이전에 진심으로 민생을 챙기고 고민했던 그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당시 국민들에게 민생정치는 먼 나라 이야기였고 쉽게 체험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는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다르지 않다.


선거때만 되면 국민을 하늘같이 섬기겠다고 하면서 굽실거리던 국회의원 후보들이 막상 당선이 되고 나면 갑질을 일삼거나 애초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 한 것이 현실이다.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하면서도 정책에 이에 대한 베려는 없고 사회적 불평등이 점점 심해지는 요즘에 박문수와 같이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정치가의 존재가 아쉬울 수밖에 없다.



2017년 연말, 세상은 더 발전하고 첨단 기술의 발달이 눈부시지만, 뉴스에서는 각종 비리와 부정들 판을 치는 세상과 만나고 있다. 이는 박문수가 정치가로 활동하던 시기가 크게 다른 모습이 아니다. 사람들은 치열한 경쟁만이 존재하는 삶과 갑의 횡포에 지쳐갈 뿐이다. 어쩌면 우월한 직위를 이용해 부정부패를 저지르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을 시원하게 응징할 누군가가 나왔으면 하는 마음속 소망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박문수는 조선시대 이런 소시민들의 삶 속에 함께 하는 영웅 같은 인물이었다. 그가 실제 암행어사로서 비리 관리를 혼내주는 드라마 같은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삶에서 일반 국민들은 분명 큰 존재였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박문수와 같은 정치인은 분명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사진, 글 : 지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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