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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0월 26일, 이날은 우리가 잘 아는 안중근 의사가 일본의 대한제국 침탈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저격, 사살한 날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러시아가 중국으로부터 조차하여 사용 중인 하얼빈에서 러일전쟁 이후 전후 처리 문제, 만주 철도 부설권과 같은 어려 현안들을 논의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만주 철도 부설권은 상당한 이권 사업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하얼빈 방문은 서구 열강들의 관심이 쏠려있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안중근 의사는 그가 소지한 권총으로 3발을 총탄을 이토 히로부미에게 명중시켰고 이토 히로부미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안중근 의사는 아직 총알이 더 남아있었지만, 대한독립 만세를 러시아어로 외치며 그가 가지고 있는 권총을 러시아 헌병에 넘겨주고 순순히 체포됐다. 

안중근 의사는 재판 과정을 통해 일본의 조선에 대한 부당한 침략을 규탄하고 자신의 동양평화론을 전 세계에 알리려 했다. 실제 안중근 의사는 사형을 언도받고도 뤼순 감독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는 열정을 보였다. 일본은 재판이 길어지는 것에 부담을 느꼈고 서둘러 재판을 끝내고 안중근 의사의 사형을 집행했다. 1910년 3월 26일의 일이었다. 지금 하얼빈 역에는 당시 안중근 의사의 거사 장소를 표시하는 표식이 남아있어 그때의 기억을 떠오르게 하고 있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그의 사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의 유품만이 전해질 뿐이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단순히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을 제거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에서 가지는 위상과 영향력이 상당하기도 했고 그가 서양의 제국주의를 본떠 일본이 추구하던 군국주의의 기초를 놓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크게 보면 서양 열강들의 제국주의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정치의 최고 실력자가 되었지만, 일본 정치인들이 명문가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던 것과 비교해 가난한 집안의 출신이었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부친이 명문가의 양자로 입적하면서 형편이 나아졌고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당시 사상가인 요시다 쇼운의 문화로 들어가 수학하면서 자신의 사상적 기반을 다졌다. 요시다 쇼운은 막부시대 말기 일본 천황을 중심으로 한 개혁, 존왕양이를 주장하고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뤄 그들과 맞서 이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목적을 위해서는 과격한 방법도 불사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그의 사상은 오랜 일본 정치 체제인 막부 체제 타도와 더불어 궁극적으로 일본의 군국주의의 모태가 됐다. 

그에게서 수학한 이토 히로부미 역시 상당한 영향을 받았고 청년 시설 영국 공사관 방화사건과 막부 체제 유지에 우호적 인사에 대한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과격 인사로 자리했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존왕 양이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받아 점점 그 신분을 높여나갔고 영국 유학을 통해 영어를 배우고 견문을 넓히면서 서구 열강의 앞선 기술과 그들의 힘을 현장에서 느꼈다. 

이토 히로부미가 포함된 5인의 젊은 영국 유학생들은 정상적인 경로가 아닌 밀항을 통해 영국에 입국해 영국의 대학에서 청강생으로 그들의 문물을 익혔지만 일본에서는 선각자로서 지금도 추앙받고 있고 영화로도 제작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이 영국에서 배운 건 앞선 문물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의 달콤함이었다. 어쩌면 영국에서의 경험은 존왕양이 사상에 제국주의 사상을 결합한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그의 철학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을 수보 있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유신으로 일본의 정치 체제가 천황 중심제로 변하는 과정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정치권에서 그 힘을 키워갔고 일본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위치에 오르게 된다. 히토 히로부미는 일본 내에서 정치 수완을 발휘해 최고 권력자로 자리했고 나아가 일본의 대한 제국에 대한 침략을 진두지휘했다. 그는 표면적으로 일본이 대한 제국의 문명화를 이룰 때까지 한시적 보호국이 될 것임을 천명하였지만, 일본의 대한제국 병합을 위한 작업을 지휘했다. 그는 대한 제국을 위하는 척했지만, 실상은 치밀하게 병합을 진행했다. 대한제국 초대 통감으로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 이후 진행된 한일의정서 협약, 대한제국 군대 해산도 그의 주도하여 이루어졌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왕실의 수호자를 자처했지만, 마지막 왕위 계승자라 할 수 있는 영친왕의 일본행을 주도하고 그들을 일본과 동화시키는 작업 진행했다. 그는 영국이 이집트 지배 시 사용한 제국주의 경영 기법을 따라 대한 제국의 통치에 활용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통해 일본만의 제국주의가 완성되었고 대한 제국에 실제 적용됐다. 이는 이토 히로부미 튼 일본 군국주의를 이끈 인물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일본의 군국주의의 근거한 대동아 공영권 추구가 허구이고 주변국의 희생에 근거한 것임을 전 세계에 알리는 일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동양의 모든 나라가  하나가 되어 평화체제를 이루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의 동양평화론은 일본을 배격하는 것이 아니었고 일본도 함께 손잡고 가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이나 동양 평화를 위협하는 인물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그만큼 큰 뜻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인들 중에도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에 공감하는 이들이 있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렇기에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원하는 바는 이루지 못했지만,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그 숭고한 뜻을 이어가야 하는 이유다.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안중근 의사 의거의 사상적으로 분석하여 그 의미를 새롭게 해주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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