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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민들의  이야기를 찾아 떠나는 김영철의 동내 한 바퀴 5번째 동네는 서울 북한산 자락의 산동네 강북구 삼양동이었다. 삼양동으로 가는 길은  최근 개통된 우이신설 경전철을 이용했다. 무인 시스템으로 운영하는 우이 경전철은 2냥짜리 작은 기차지만, 지역민들을 시내로 연결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경전철 삼양 4거리에서 시작한 본격적인 동네 여행은 북한산의 중요한 봉우리인 인왕산이 보이는 산동네를 걷는 것으로 시작했다. 가파르고 미로처럼 연결된 동네 골목길은 낡고 오래된 담들이 연결되어 있어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일터로 나간 집 주인을 대신해 집을 지키고 있는 개들이 낯선 이를 맞이하고 있었다. 

여정은 강북구와 성북구를 연결하는 솔샘 터널에서의 풍경을 뒤로하고 동네 어르신들의 작은 쉼터로 이어졌다. 이곳은 동네 어르신들이 십시일반으로 힘을 모아 만든 쉼터였다. 이곳에서 어르신들은 윷놀이를 하거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설은 허술하고 외부의 찬 공기를 막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난로 역시 가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넉넉하지 못한 이들의 쉼터이다 보니 마음껏 등유 난로를 가동하지 못한 탓이었다. 





진행자는 이 쉼터의 따뜻한 겨울은 위해 등류 한 통을 주문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 모여있는 공간에서 몸까지 따뜻하게 함께 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던 배려였다. 등유가 배달되는 사이 마을 아주머니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통닭집을 찾았다. 

수십 년간 옛날 방식으로 통닭을 튀겨 판매하는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은 손님들의 모습만 봐도 어떤 닭이 필요한지 알아차릴 정도였다. 이곳에서는 수시로 마을 아주머니들이 이야기 한 마당을 열고 있었다. 그런 소통의 시간이 쌓이고 쌓여 정이 쌓였고 오랜 단골들인 친구가 되었다. 삼양동을 떠난 사람들도 이 통닭집을 찾는 이유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어르신 쉼터에 난로에 채워진 등유가 어르신들의 따뜻한 일상을 만들어주는 사이, 발걸음은 삼양동의 골목으로 다시 향했다. 그곳에서 50년 넘게 삼양동에서 태어나 이곳을 지키고 있는 마을 주민들 만났다. 삼양 초등학교 졸업생으로 삼양동은 그의 고향이자 삶의 터전이었다. 많은 친구들이 삼양동을 떠났지만, 

그는 삼양동을 떠나지 않았다. 동네의 푸근함과 편안함이 그를 떠나지 못하게 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이곳저곳 이사를 하는 것이 보편화된 요즘, 낡고 불편한 동네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과거의 추억을 함께 하는 침구들이 있어 그는 외롭지 않았다. 

삼양동 골목을 벗어난 여정은 2대에 거쳐 유지되고 있는 사진관을 거쳐 역시 수십 년 전통의 동네 떡볶이 집으로 향했다. 삼양동 사진관은 아버지와 그 아들이 이곳을 지키면서 50년의 역사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이곳은 과거 전직 대통령이나 고위 공직자들이 찾는 곳이었고 지금도 마을 주민들의 추억을 담아주는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디지털카메라가 보편화되었지만, 이 사진관의 아날로그 감성은 여전히 많은 이들을 잡아끌고 있었다. 

사진관을 지나 만난 동네 떡볶이집은 이탈리아에서 온 사위가 일을 도와주는 보기 드문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 떡볶이집의 사장은 3명의 자녀가 어릴 적 작고한 배우자의 몫까지 더해 장성시켰다. 이 떡볶이집은 가족의 애환이 가득 담긴 공간이었다. 지금도 이곳은 동네 아이들이 하교 후 떡볶이를 즐기는 곳이었다. 

수십 년의 역사를 간직한 삶의 터전을 떠난 여정은 삼양동의 오래된 골목을 지나 작은 성당으로 향했다. 그 여정 속에서는 정감 어른 풍경과 함께 가난한 이들의 고단한 삶도 함께 볼 수 있었다. 여전히 낙후된 인프라는 이곳 주민들에게의 삶을 더 힘들게 했다. 삼양동도 개발의 바람이 불어 몇몇 마을이 현대식 아파트 단지로 바뀌긴 했지만, 이곳 주민들의 삶을 바꾸는 일은 아니었다. 지역민들이 삶이 더 나아지는 개발을 고민하게 하는 장면 장면들이었다. 

이런 고민을 안고 계속된 여정 끝에 삼양동 주민연대 사무실을 지키는 한 외국인 신부를 만났다. 그는 뉴질랜드 출신은 이 신부는 20대의 나이에 한국에 들어와 5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삼양동에 들어온 이곳에서 빈민구호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제 70대의 노인이 된 이 신부는 이름도 한국 이름을 바꾸고 어려운 처지의 어른 학생을 양아들로 삼아 그가 성장하고 아이를 낳은 지금까지 가족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삼양동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성직자로서 격식을 버리고 청빈한 삶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낮은 자세로 봉사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삼양 주민연대를 이끌고 있는 것도 그 활동의 연장선상이라 할 수 있다. 마을의 어려운 이들을 위해 사무실 다락방에 모아둔 라면, 햄, 김 등의 생필품은 이 신부의 삼양동 사랑을 가득 담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진행자는 그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받아 울컥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전혀 연고가 없는 외국에서 수십 년의 세월의 세월 봉사하는 삶을 사는 외국인 신부는 1년 내내 가난하고 힘든 이들을 보듬어주는 산타클로스 그 자체였다. 

진행자는 외국인 신부의 따뜻한 마음을 가득 담은 선물을 배달하면서 따뜻한 마음을 더했다. 외국인 신부는 삼양동 사람들이 이기심과 시기김도 없지만, 무관심도 없는 이들이 모여사는 곳이라 했다. 고층 아파트나 편의 시설이 많지 않은 삼양동이지만, 이곳을 지키는 사람들은 그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이웃을 위한 마음을 나누고 있었다. 마지막 장면, 삼양동 골목을 밝히는 작은 크리스마스트리는 이 신부와 마을 주민들의 따뜻한 마음이 응축된 빛과 같은 느낌이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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