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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급격한 산업화를 이룬 대한민국에서 그에 따른 변화와 발전을 상징하는 도시다. 우리나라의 수도이기도 하지만, 우리 경제 발전의 중심지, 이제는 세계에서 주목하는 도시로 발전한 서울이다. 이런 변화 속에 서울은 옛 모습이 대부분 사라졌다. 서울 중심부에 남은 고궁과 몇몇 한옥 마을 등이 과거 서울의 모습을 살필 수 있게 한다. 그 때문에 고궁과 한옥마을은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보호되고 있다. 

그중 북촌 한옥마을은 서울의 대표적 관광지로 대표적 핫 플레이스로 각광받고 있다. 서울을 찾는 외국인들에게 북촌 한옥마을은 필수 방문 코스로 자리 잡았고 젊은이들의 데이트 코스로 남녀노소를 가르지 않은 도보 여행 코스로도 인기를 얻고 있다. 이에 주말이면 북촌 한옥마을 일대는 방문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기도 한다. 사람이 모이면서 이 일대에는 크고 작은 상권이 형성되고 새로운 문화 공간이 되고 있기도 하다. 북촌 한옥마을의 성공을 기점으로 인근 서촌, 익선동 등 인근 한옥 거주 지역 역시 새로운 여행지로 활기를 얻고 있다.

이런 북촌 한옥마을의 지금을 있게 한 인물이 일제 강점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 우리 역사상 최초의 부동산 개발업자이자 건설 사업가, 민족주의 사업가였던 정세권이 그 주인공이다. 1888년 태어나 1965년 세상을 떠난 정세권은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한옥인 도시형 한옥을 만들고 그 한옥들도 대단지 마을을 개발하는 등 도시개발을 주도한 사업가였다. 지금의 북촌 한옥마을은 그의 개발사업의 유산이라 할 수 있다. 

북촌 한옥마을 형성 과정을 살피기 위해서는 당시 시대적 배경을 먼저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종묘 사이에 위치해 있어 왕족들과 고관대작들의 거주지로 유명했다. 북촌은 지금의 가회동, 계동, 삼청동, 안국동, 원서동 일대로 조선의 도성 한양의 하천인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청계천을 중심으로 남쪽에 자리한 을지로와 충무로, 명동과 남산 일대는 남촌으로 불렸다. 북촌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부촌이라 할 수 있었다. 

 

 

북촌

 



이런 북촌에 일제 강점기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한일 강제병합조약이 체결된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일 이후 일본인들의 서울 진출이 본격화됐다. 초기에는 청계천 남쪽의 을지로, 명동 등 남촌에 일본인들의 거주 지역이 만들어졌다. 그 당시에는 북촌은 조선인들의 거주 지역, 남촌은 일본인들의 거주 지역이라는 일종의 불문율이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인들의 인구가 크게 늘면서 그들의 주거 수요도 증가했다. 기존의 남촌 일대에는 더는 주택을 지을 땅이 없었고 일본인들은 청계천을 넘어 북촌으로 진출했다. 일제 역시 총독부를 지금의 경복궁 근정전 앞에 건설하고 북촌 지역에 각종 관공서를 만들며 인구 유입을 사실상 조장했다. 일본인들의 북촌 진출은 지역의 부동산 가격 폭등을 불러왔다. 상대적으로 경제적으로 취약한 조선인들은 일부 부유층을 제외하면 심각한 주거난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자칫 서울의 중심부가 일본인들에게 점령당할 수 있었다. 

이 시기 한 사업가 정세권이 등장했다. 그는 경남 고성에서 서울로 상경했다. 그는 주택 사업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건양사라는 부동산 개발회사를 창업했다. 그는 기존의 중요한 주택 건축양식인 기존 한옥, 서양식 문화주택, 일본인들이 선호하는 일본식 주택 대신, 한옥을 개조한 도시형 한옥을 지었다. 

정세권의 도시형 한옥은 기존 한옥보다 크기를 크게 줄인 대신 배치를 바꾸고 전기와 수도를 들어오게 하고 서양의 건축 형태를 수용하는 등 실용적인 구조로 만들어졌다. 지금도 볼 수 있는 양반들의 고택과는 전혀 다른 단독주택과 같은 형태였다. 이는 조선인들의 주거문화까지 바꾸는 혁신이었다. 

정세권은 일본인들의 북촌 진출을 막기 위해 북촌 일대의 땅을 매입해 도시형 한옥촌은 건설해 분양했다. 최근 다양한 카페들과 음식점 등이 들어서며 서울의 새로운 명소가 된 익선동 일대는 그가 일대 땅을 매입해 건설한 한옥촌이다. 또한, 가회동을 포함한 북촌 일대의 한옥 마을 촌도 그의 개발사업의 결과다.

 

 

정세권 사진 - 위키백과

 



정세권은 한옥촌을 건설하면서 조선인들의 주거 안정에서 힘썼다. 그는 조선인들이 이 한옥에 보다 많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분양 대금은 일시불뿐만 아니라 연납, 월납의 형태로도 지불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를 일반 서민들도 북촌에 거주할 수 있도록 했다. 그의 한옥은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그는 도시형 한옥 개발사업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서울 곳곳에 정세권의 한옥 마을을 만들어 조선인들이 살도록 했다. 그는 성공한 사업가로 부동산 개발업자로 부와 명성을 모두 얻었다. 당시 그가 서울에 지은 도시형 한옥은 6천여 채에 이르렀다. 

정세권은 부동산 개발사업을 통해 얻은 부를 공익적인 목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평소 항일 의식을 잃지 않았고 한복 두루마기를 즐겨 입었다. 또한, 민족 종교인 대종교 신자이기도 하다. 정세권은 직접적인 독립운동보다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사업과 운동에 후원자로서 기여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면서 지속 가능한 독립운동을 가능케 하는 현명한 방법이기도 했다. 

정세권은 1920년대 국산품 애용을 통해 우리 민족의 경제적 자립을 이루자는 취지로 시작한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적극 후원했다. 그 자신이 한복 두루마기를 즐겨 입었고 운동에 필요한 자금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조선의 제품을 홍보하고 판매할 수 있는 조선물산회관을 건립해 기부하기도 했다. 또한, 운동에 도움이 되는 회사를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다. 

 

 

북촌

 



이에 더해 민족주의 독립운동 세력과 사회주의 독립운동 세력이 연합한 단체인 신간회에 활동에서 적극 참여하고 재정적 후원을 했다. 또한, 한글 연구와 조선어 사전 편찬 사업을 진행하던 조선어학회의 후원자로 나서 사무실을 제공하고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정세권은 자신이 축적한 부를 개인이 아닌 민족과 독립운동을 위해 아낌없이 내놓았다. 이런 그의 행동은 일제의 감시를 피할 수 없었다. 한 번은 물산장려운동 지원과 관련해 일제 경찰의 소환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자기 지역에서 나고 만들어진 제품 쓰기를 장려하는 것이 어떻게 문제가 되는가 하는 논리로 당당히 맞서며 상황을 피하기도 했다. 

하지만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지면서 전세권 역시 큰 고초를 겪었다. 당시 조선어학회를 주시하고 있었던 일제는 그들의 활동이 독립운동이나 내란죄에 준하는 중범죄라는 이유를 들어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구속하고 고문을 가하는 등 탄압했다. 큰 후원자였던 정세권 역시 큰 고초를 겪었다. 옥고를 겪으면서 정세권의 건강은 크게 악화됐다.

정세권은 가까스로 풀려나긴 했지만, 일제의 감시는 더 심해졌고 그의 부동산 등 재산이 강제 헌납되고 말았다. 그는 당시 지금의 뚝섬 일대에 수만 평의 토지가 있었지만, 그 땅을 강탈당했고 그의 삶 자체라 할 수 있는 그의 회사인 건양사의 건축업 면허까지 취소되는 등 경제활동에도 제약이 발생했다. 그와 함께 그의 가세도 크게 기울고 말았다. 

광복 후 정세권은 함께 고초를 겪었던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함께 하며 최초의 한글 사전인 조선말 큰 사선의 완성을 지켜봤다. 하지만 그의 민족주의 사업가 독립운동과 관련한 공적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광복 후 서울에서 힘겹게 살았고 6.25 한국전쟁 도중 폭격으로 심각한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말년에는 홀로 고향에 내려가 단칸방에서 살다 1965년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그의 공적은 사후 재조명됐고 1968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고 1990년에 가서야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그의 유해는 고향인 경남 고성군에 안치되어 있다 2016년 4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됐다. 그가 제대로 평가받기까지 너무 긴 세월이 흘러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의 한옥주택 사업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경제적 약자인 조선인들의 주거안정을 위한 일이었고 일본인들의 세상이 될 수 있는 서울 중심부의 지켜낸 일이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지금 북촌 등 한옥마을은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마을의 풍경도 다수의 일본식 주택이 차지했을 수도 있다.

또한, 정세권의 도시형 한옥주택은 당시 한옥의 지나치게 밀집한 한옥촌이 주거 환경을 악화시키고 한옥의 멋을 사라지게 한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반대로 한옥건축 기술을 발전시키고 일본식, 서양식 주택이 대세를 이루는 상황에서 한옥 건축의 맥을 이어가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

또한, 우리 민족의 경제주권을 지키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은 독립운동가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 자신의 부를 독립운동에 기꺼이 내 놓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의 업적은 결코 폄하될 수 없다.

이런 정세권의 노력이 함께 하고 있는 북촌 한옥마을은 중요한 역사의 현장이고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북촌 한옥마을을 잘 지키고 보존하는 건 우리 역사를 지키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북촌 한옥마을을 찾는 이들은 그 정세권이라는 인물을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진 : 지후니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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