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롯데 팬들에게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된 롯데의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 유두열 전 코치가 별세했다. 그의 나이 60, 아직 충분히 일 할 수 있는 나이였지만, 오랜 기간 그를 괴롭혀왔던 암과의 싸움을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유두열 전 코치는 암 투병 중에도 롯데의 홈경기 시구자로 나서는 등 강한 의지를 보이며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지만, 결국 세상과 안타까운 이별을 하고 말았다. 



선수로서 유두열의 통산 성적은 뛰어나지 않았다. 1983년 롯데에 입단한 유두열은 1991년 은퇴했다. 통산 타율은 0.264였고 58홈런과 268타점을 기록했다. 한 팀의 레전드라 하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성적이었다. 하지만 롯데 팬들에게 유두열은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선수다. 1984년 롯데의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 7차전 승리를 결정짓는 극적 홈런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의 홈런은 극적이었고 짜릿했다. 



1984년 한국시리즈 한 편의 드라마였다. 당시 롯데의 한국시리즈 상대 팀의 최강 전력의 삼성이었다. 삼성은 재일동포 투수 김일륭과 국가대표 출신 김시진이 선발 원투펀치를 구성했고, 이만수, 장효조가 이끄는 리그 최강의 타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전. 후기 리그제도가 있었던 그 당시 삼성은 압도적 성적으로 전기리그 우승을 확정하고 후기리그는 한국시리즈를 대비해 전열을 정비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삼성의 한국시리즈 우승은 당연해 보였다. 마치 난공불락의 골리앗 삼성과 힘없는 다윗 롯데의 대결이라 해도 되는 대결이었다. 








뻔한 승부로 여겨졌던 한국시리즈였지만, 이 대결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사건이 후기리그 막판에 있었다. 한국시리즈 진출을 위한 후기리그 우승을 놓고 롯데와 지금의 두산인 OB가 경합 중이었다. 양 팀은 정규리그 마지막 시리즈까지 팽팽하게 맞섰다. 마침 롯데의 정규리그 마지막 상대는 삼성이었다. 



삼성은 롯데와의 경기에서 크게 앞서던 경기를 패했고 롯데는 이 승리를 바탕으로 후기리그 우승을 확정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삼성이 노골적인 져주기 플레이를 했다는 논란이 불거졌다는 점이었다. 사실 한국시리즈를 대비해 전력을 모두 가동하지 않았던 삼성이었지만, 당시 삼성은 잘 던지던 선발 투수를 돌연 교체하고 충분히 잡을 수 있는 플라이가 안타가 되는 등 석연치 않은 장면을 연출했다. 게다가 삼성은 당시 이만수와 타율 부분 1위를 다투던 롯데 홍문종의 모든 타석을 고의 4구로 내보내며 빈축을 사기도 했다. 그렇게 이만수는 타율, 타점, 홈런부분 1위를 차지하며 리그 3관왕의 위업을 달성했지만, 빛이 바래고 말았다.  



사실상 삼성에 의해 한국시리즈 파트너가 된 롯데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 있는 대결이었지만, 전력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롯데에는 최동원이라는 리그 최고 투수가 있었다. 롯데는 최동원에 절대 의존하는 마운드 운영 전략으로 맞섰다. 최동원은 삼성 김일융, 김시진 두 원투 펀치와 1 : 2의 대결을 해야했다. 삼성은 최동원이 등판하는 경기에 에이스 김일융을 피해 등판시켰다. 삼성은 최동원이 등판하는 경기 중 한 경기만 잡는다면 한국시리즈 우승을 할 수 있다 여겼다. 하지만 삼성의 의도대로 한국시리즈는 전개되지 않았다. 



최동원은 1차전과 3차전 선발투수로 나서 롯데의 승리를 이끌었고 한국시리즈는 장기전이 됐다. 삼성은 김일륭이 등판하는 경기에 모두 승리하며 시리즈는 2승 2패가 됐다. 팽팽하던 한국시리즈는 잠실에서 펼쳐진 5차전에서 삼성이 승리하며 삼성쪽으로 급격히 승부의 추가 기울었다. 삼성은 5차전에서 롯데 에이스 최동원에 승리했고 롯데는 필승 카드가 실패한 충격이 상당했다. 하지만 6차전에서 롯데는 최동원을 구원 등판시키는 초강수로 승리를 가져갔고 시리즈는 최종 7차전으로 이어졌다. 



한 경기로 챔피언이 가려지는 7차전, 롯데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최동원을 선발로 내세웠다. 문제는 이미 3경기 선발, 1경기 구원으로 경기에 나섰던 최동원이 지쳐있었다는 점이었다. 최동원은 가지고 있는 힘을 다해 투구했지만, 초반 삼성 타선은 최동원 공략에 성공하며 리그를 잡았다. 여기에 삼성 에이스 김일융이 호투하며 경기는 삼성의 우세로 굳어졌다. 삼성의 한국시리즈 우승 염원이 이루어지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롯데는 포기하지 않았다. 초반 실점에도 최동원은 투혼을 발휘하며 마운드를 지켰고 팀 타선은 경기 후반으로 가면서 삼성 에이스 김일융 공략에 성공하며 점수 차를 좁혀나갔다. 롯데는 3 : 4 한 점차로 삼성을 압박했고 8회 초 결정적인 득점 기회를 잡았다. 그리고 타석에 들어선 타자가 유두열이었다. 유두열은 한국시리즈에서 극심한 타격 부진을 겪고 있었다. 대타 기용도 가능성도 있었지만, 롯데 코칭스태프는 그를 그대로 타석에 내보냈다. 극도로 긴장된 순간, 유두열을 삼성 김일융의 공을 공략해 좌측 담장을 넘기는 3점 홈런으로 연결했다. 극적인 역전이었다. 7차전까지 이어진 한국시리즈가 유두열의 홈런을 위한 예고편과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 홈런으로 역전에 성공한 롯데는 최동원의 완투로 리드를 지키며 6 : 4로 승리했고 그해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다. 유두열은 그 한 방으로 한국시리즈 MVP가 됐고 최동원은 정규리그 MVP의 영광을 차지했다. 물론, 한국시리즈에서 나홀로 4승 1패를 한 최동원이 최고의 수훈 선수이긴 했지만, 유두열의 한 방은 너무나 강렬했다. 그의 홈런이 있어 최동원의 전설이 완성된 것도 사실이었다. 애초 한국시리즈 7차전 당시 타격이 부진한 유두열이 타격코치의 실수로 5번 타순에 배치됐지만, 라인업 변경을 하지 않고 경기에 나섰다는 뒷이야기가 남겨질 정도로 그의 홈런을 오랜 기간 야구팬들의 기억속에 남았다. 



비록 그가 통산 성적에서 뚜렸한 성적을 남기지 못했지만, 그만큼 그의 한국시리즈 7차전 역전 3점 홈런은 가치는 롯데의 역사와 함께 하는 가치있는 홈런이었다. 유두열의 홈런과 그에 따른 롯데의 우승은 프로야구의 인기를 높이는 기폭제가 됐다. 그 다음해 삼성은 전.후기 통합우승으로 한국시리즈가 열리는 것을 원천 봉쇄하며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지만, 이는 포스트시즌 제도 변경을 불러왔다. 이후 삼성은 지독한 한국시리즈 징크스에 시달렸다. 그들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게 된 건 한 세기가 지나서였다. 1984년 한국시리즈의 기억은 롯데에 영광의 기억이었지만, 삼성에는 최악의 징크스의 시작이었다. 



이렇게 롯데 역사에 남을 장면의 주인공이었던 유두열이었지만, 이후 선수생활과 지도자로서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유두열은 부상이 겹치며 오랜 기간 선수생활을 하지 못했고 이른 은퇴를 해야 했다. 이후 프로에서 지도자로서도 활약이 크지 않았다. 이후 유두열은 상당 기간 야인으로 머물렀다. 그가 다시 야구팬들에게 이름이 알려진 건 그의 외로운 암 투병 소식이 전해지면서부터였다. 이후 그에 대한 격려와 응원이 이어졌지만, 그의 의지와는 달리 병마는 그를 저 세상으로 데려갔다. 



그의 부고 소식이 전해진 9월 1일, 롯데 선수들은 NC와의 대결에서 검은 리본을 달고 경기에 나서 팀의 레전드를 추모했다. 그 어느 때보다 경기에 집중했다. 하지만 롯데는 올 시즌 절대적 열세를 보이는 NC에 2 : 4로 패하면서 승리로 레전드를 배웅하지 못했다. 이 패배로 롯데의 포스트시즌 진출 희망도 더 멀어졌다. 그의 별세 소식과 함께 한 롯데의 패배, 멀어진 포스트시즌, 여기에 롯데에 너무나 먼 이야기가 된 한국시리스 우승의 기억까지 그의 별세는 롯데 팬들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저세상으로 떠났지만, 그의 야구에 대한 열정은 넥센의 선수로 활약하고 있는 유재신에게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가 남긴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홈런의 기억은 롯데 팬들뿐만 아니라 야구 팬들의 마음속에 우리 프로야구의 한 시대를 대표하는 장면으로 자리하고 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이 글을 마친다.  



사진, 글 : 심종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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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프로야구에서 아마 야구의 유망주는 프로에서의 성공을 보장하는 말이었다. 그만큼 선수가 부족했고 야구의 수준도 높지 못했다. 신인들이 팀의 주축선수가 되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프로야구의 수준을 올라갔고 신인이 곧바로 리그에서 성공하는 예도 크게 줄었다. 고졸 최대어, 대졸 최대어가 성공의 방정식이 될 수 없었다.

 

이젠 유망주들에게 기회의 문조차 잘 열리지 않는 프로야구다. 아마시절이 명성이 성공의 열쇠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야구 천재 소리를 듣던 많은 선수가 프로 입단 후 이렇다 할 활약 없이 조용히 사라지곤 했다. 그중에서 강혁이라는 이름은 아직도 많은 야구팬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비운의 천재다. 강혁은 프로와 아마야구의 스카우트 분쟁의 희생자이기도 했다.

 

강혁은 아마시절 강혁은 차원이 다른 선수였다. 강혁은 고교 시절부터 프로에서 당장 통할 수 있는 타자로 기대를 모았다. 좌타자라는 장점에 힘과 정교함을 겸비한 타격은 프로와 대학 스카우터들의 눈길을 사로잡을만 했다. 고교야구 무대는 그에게 너무나 좁았다. 강혁이 초고교급 선수로 활약했던 1990년대 초반만 해도 대학에 진학하는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타자의 경우 그 경향이 더 강했다.

 

당시만 해도 대학야구가 활성화되어 있었고 대학별로 팀 전력을 강화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한 시기였다. 좋은 선수를 확보하기 위한 프로팀과의 경쟁도 뜨거웠었다. 지금은 고졸 선수 대부분이 프로의 문을 우선 두드리는 것과 다른 풍경이었다. 이런 프로와 아마 간 선수영입 경쟁은 종종 스카우트 관련 분쟁으로 이어졌다. 강혁의 빼어난 실력은 역설적으로 분쟁의 중심에 그를 서게 했다.

 

 

 

 

 

 

고교 졸업 후 강혁의 진로는 연고팀 두산행이 유력했다. 두산은 좌타 거포의 가능성이 큰 강혁에 일찌감치 손을 내밀었고 계약까지 했다. 문제는 이후 발생했다. 강혁이 당시 한양대 야구부에 입학한다는 뉴스가 함께 터졌다. 강력은 졸지에 2중 계약을 한 선수가 되었다. 명백한 계약위반이었다. 이는 프로야구계 전체의 공분을 샀다. 강력은 이후 프로야구에서 영구제명되는 비운을 맞이했다. 프로에 입단한 기회가 원천 봉쇄된 셈이었다.

 

아직 사회에 대한 적응력도 갖추지 못한 어린 강혁에서 너무나 큰 시련이었다. 그를 둘러싼 어른들의 이기심과 욕심이 불러온 결과였다. 큰 충격이었지만 강혁은 마음을 다잡았다. 대학야구에서 강혁은 리그를 평정하는 타자였다. 국가대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타격능력은 당시 시대를 풍미했던 투수들마저 그를 두려워하게 했다.

 

당시 최고투수 임선동이 아마야구 경기에서 승리를 위해 만루 위기에서 강혁을 고의사구로 거른 일화는 그의 위세가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 예였다. 그만큼 강혁의 타자로서의 위치는 확고했다. 하지만 더 큰 무대로의 나아가는 길은 없었다. 대학 졸업 후 강혁은 실업팀 현대 피닉스에 입단해야 했다. 당시 프로진출 고려하고 현대에서 만든 실업팀 현대 피닉스는 엄청난 물량공세로 선수를 모았고 아마 최고 선수들로 가득했다. 그 안에서도 강혁은 돋보이는 타자 중 한 명이었다.

 

이런 계속된 활약은 그가 아마선수임에도 1998 방콕아시안게임 야구 대표팀으로 선발하게 하는 근거였다. 박찬호가 마운드의 중심을 이루고 프로선수들의 다수 포진된 대표팀에서도 강혁은 자신의 수비 포지션인 1루수를 지키며 금메달 획득에도 기여했다. 아시안 게임 금메달은 그의 프로야구 영구제명의 족쇄를 푸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먼 길을 돌았지만, 강혁은 1999년 두산에 신인으로 당당하게 입단할 수 있었다. 프로와 아마야구 간 스카우트 파동으로 꺾었던 날개를 활짝 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를 영입한 두산 역시 6년의 시간이 지나서야 그를 품을 수 있었다. 두산은 강혁이 젊은 중심타자로서 큰 역할을 해주길 기대했다.

 

이런 기대와 다르게 아마야구 최고 타자였던 강혁에서 프로 무대는 다른 세상이었다.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하던 아마야구 선수들의 나무배트에 적응하는 기간이 필요했지만. 강혁은 아마시절 위력을 나무배트로는 재현하지 못했다. 1999시즌 적응기를 거친 강혁은 2000시즌 0.266의 타율을 기록하며 조금 나아진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두산이 원하는 강타자의 성적은 아니었다. 

 

2001시즌을 앞두고 강혁은 전격적으로 SK로 트레이드되었다. SK는 팀의 미래를 이끌어갈 젊은 중심 타자가 필요했다. 두산은 거액의 계약금을 투자한 강혁을 미련없이 현금 트레이드했다. 영입 실패를 인정한 것과 같았다. 강혁은 SK에서 꾸준히 기회를 잡았지만, 예전의 명성에 미치지 못했다. 강혁은 더 이상 천재가 아니었다.

 

이런 강혁에게 2004년은 또 다른 시련이 시기였다. 그 해 프로야구를 강타한 병역비리 사건에 강혁이 포함되었다. 그는 1998년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병역 면제 요건을 충족했지만, 그 이전에 병역면제를 받았었다. 하지만 그것은 병역브로커와의 검은 거래에 의한 것으로 드러났다. 강혁은 법적 처벌과 병역의무 이행으로 긴 공백기를 거쳐야 했다.

 

2007시즌 SK로 복귀했지만, 7타수 무안타의 성적을 남기고 쓸쓸히 선수생활을 접고 말았다.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선수생활을 한 강혁은 그렇게 프로야구 팬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최고 선수가 될 자질을 보였던 강혁이었지만, 그를 흔드는 외적인 힘에 꺽인 날개를 끝내 펼쳐보지 못했다. 강혁은 비운의 선수로 팬들에 기억될 뿐이다. 

 

프로야구 선수로서 강혁의 인생은 조금 허무하게 막을 내렸지만, 현재 강혁은 어린 선수들을 지도하는 지도자로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다. 그에게 영광과 좌절을 모두 안겨준 야구를 그는 떠나지 않았다. 지금도 그를 기억하는 많은 팬들은 만약 강혁이 프로와 아마 계약파동에 휩싸이지 않고 프로에 바로 입단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

 

강혁이 프로에서 체계적인 육성과정을 밟았다면 리그를 뒤흔들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과거의 일이다. 강혁은 이제 프로야구 기록에서만 그의 자취를 찾을 수 있는 선수가 되었다. 강혁의 비운은 선수를 둘러싼 주변인들의 욕심이 선수에게 얼마나 큰 악영향을 줄 수 있는지 선수 스카우트 질서 확립 필요성을 일깨우는 예였다. 다시는 이런 외적 요인으로 재능있는 선수가 희생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는 야구계 전체에 큰 손실이기 때문이다.

 

Gimpoman/심종열 (http://gimpoman.tistory.com/, http://www.facebook.com/gimpoman)

사진 : SK 와이번스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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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시작된 우리 프로야구는 정치적 목적에 따라 급하게 리그가 만들어졌다. 그 덕분에 프로야구에 맞는 시스템과 인프라 구축의 시간이 없었다. 선수들을 비롯한 여타구성원들 역시 프로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히 시행착오가 많았고 문제점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무엇보다 장기 레이스를 치르는 데 필요한 선수가 절대 부족했다.

 

이런 선수부족 현상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이들이 재일교포 선수였다. 그 당시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했던 우리 국적의 선수들은 한 차원 높은 야구를 하는 선수들로 각 팀의 중심선수로 활약했다. 대부분 전성기를 지난 선수들이었지만, 초기 우리 프로야구에서 그들의 기량은 분명 한 수 위였고 프로야구의 경기력을 높여주었다.  

 

이 중에서 원년에 창단했지만 단명한 팀이었던 삼미의 에이스 투수로 활약했던 장명부는 가장 인상적인 활약을 한 선수 중 한 명이었다. 장명부가 우리 프로야구에서 뛴 것은 4년에 불과했지만, 그가 남긴 조적은 엄청났다. 장명부는 4시즌을 치르면서 무려 172경기에 등판했다. 55승 79패 방어율 3.55의 성적을 남겼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장명부는 64경기를 완투했다. 이 안에는 7번의 완봉 경기도 있었다. 4년간 그가 던진 총 이닝 수는 1,043.1이닝 이었다. 1년 평균 250이닝이 넘는 수치였다. 최근 우리 프로야구에서 에이스 투수가 200이닝을 넘지 못함을 고려하면 엄청난 이닝이었다. 당시 주전 투수들의 혹사가 보편적이었다고 하지만 장명부는 선발과 구원을 가리지 않고 무리한 등판을 강행했다. 

 

 

 

 

 

 

장명부의 초인적인 기록은 1983시즌 삼미의 돌풍과 함께 도드라졌다. 프로 원년이 1982시즌 최하위를 한 삼미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뛴 장명부를 내세워 상위권 진출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1983시즌 장명부는 427.1이닝을 던지면서 30승 16패 6세이브 방어율 2.34의 성적을 남겼다. 사실상 장명부 홀로 팀 마운드를 책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장명부는 빠른 공을 가진 투수가 아니었지만, 구석구석을 찌르는 제구와 빼어난 수 읽기 능력으로 타자들을 농락했다. 어느새 그에게는 너구라는 또 다른 별명이 생겼다. 표정 변화가 없는 어찌 보면 능글맞기까지 한 그의 투구는 타자들의 혼란시키기에 충분했다. 일설에는 장명부가 막대한 성적 인센티브를 받기 위해 무리한 등판을 자청했다는 말이 있었지만, 그 동기가 어찌 되었건 장명부의 투구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투구였다.

 

하지만 이러한 장명부의 고군분투에도 삼미는 전.후기 리그로 운영되던 1983년 정규리그 우승의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당시 강팀의 위용을 뽐내기 시작한 해태라는 벽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삼미는 전기리그에 올인했지만, 해태와의 마지막 연전에 연패를 당하면서 다 잡은 우승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장명부는 우승을 확정 짓기 위해 연속 등판했지만, 해태의 기세를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전기리그에 너무 많은 힘을 쏟은 탓인지 삼미는 후기리그에서 하위권으로 쳐지고 말았다. 이는 장명부도 마찬가지였다. 패배를 모르던 그였지만 후반기 그는 패 수를 더 많이 쌓아갔다. 무리한 등판의 후유증이 나타났고 장명부의 구질에 대한 타자들의 적응력도 높아진 탓이었다. 우리 프로야구서 보여준 장명부의 짧았던 전성기도 서서히 저물어 갔다.

 

그다음 해부터 장명부는 급격한 내림세를 타기 시작했다. 여전히 많은 이닝을 소화했지만, 1983시즌 30승을 올렸던 투수가 아니었다. 한 때 반짝한 이후 약체팀으로 돌아선 팀 분위기와 맞물리면서 장명부는 승보다 패를 더 많이 쌓아갔다. 1984시즌 13승 20패, 1985시즌 11승 25패를 기록한 장명부는 해마다 구단과 연봉 갈등을 빚으며 미운털이 박혔고 삼미에서 청보로 간판을 바꾼 팀에서 방출되고 말았다.

 

이후 신생팀 빙그레에서 재기를 모색했지만, 그의 투구는 더는 통하지 않았다. 타자들 눈에 익은 그의 투구는 위력적이지 않았다. 장명부는 1986시즌 빙그레에서 1승 18패 방어율 4.98의 저조한 성적을 끝으로 조용히 한국에서의 선수생활을 접어야 했다. 재일교포 투수로서 큰 돌풍을 일으켰던 그였지만, 지나친 혹사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너무 일찍 선수생활을 접고 말았다.

 

이후 장명부는 한때 롯데에서 투수코치로 활약하기도 했지만,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급기야 1991년 마약사건에 연루되면서 우리 프로야구와 인연을 더 이어가지 못했다. 이후 장명부는 야인으로 야구와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 사업가로 일본에서 또 다른 삶은 살던 장명부는 2005년 자신의 운영하는 사업장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야구 선수로서 풍운아였고 우리 프로야구에 큰 족적을 남긴 그였지만, 생애 마지막 순간은 너무나 쓸쓸했다. 

 

장명부의 시즌 30승은 사실 말도 안 되는 기록이었다. 프로 원년 프로야구가 정착되지 않은 시기 기형적인 선수 운영이 만들어낸 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프로야구가 아무리 발전해도 1982시즌 백인천이 기록한 4할 타율과 함께 깨기 가장 어려운 기록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장명부는 역사에 남을 기록을 남기긴 했지만, 이는 선수생명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덕분에 그의 전성기는 너무 짧게 끝났다.

 

최근 프로야구의 마운드 운영은 철저한 분업 체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선발 완투형의 투수를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장명부는 선발 완투형의 그 이상의 투수로 에이스 투수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보여준 투수였다. 거기에 프로야구가 정착되지 못한 과정에서 나온 슬픈 자화상을 상징하는 선수이기도 하다.

 

비록 그가 좋지 못한 사건으로 우리 프로야구와의 인연을 끝내긴 했지만, 그가 역사에 남을 기록을 남겼다는 점이고 프로야구를 정착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만큼 장명부가 우리 프로야구에서 활약한 4년은 짧지만 강렬했다. 프로야구 원년 팬들에게 장명부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초인, 그리고 영원히 깨지지 않을 기록이 될 가능성이 높은 30승 투수이자 레전드임에 틀림없다.

 

Gimpoman/심종열 (http://gimpoman.tistory.com/, http://www.facebook.com/gimpoman)



다음 메인에 선정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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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는 그 어느 팀보다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팬들을 보유하고 있다. 그 때문에 다른팀 팬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하지만, 이런 팬들의 성원을 받는다는 것은 큰 행운이라 할 수 있다. 프로야구 선수라면 누구나 폭발적인 응원을 자랑하는 사직야구장에서 홈 팀으로 뛰고 싶은 생각을 한 번쯤을 할 정도로 롯데 팬들의 팀 사랑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런 롯데 팬들의 추억 속에 강하게 각인된 선수 중 대표적인 선수를 택하라면 빠지지지 않는 선수가 박정태다. 박정태는 신인 시설부터 독특한 타격폼에 더해진 출중한 기량, 남다른 근성과 투혼으로 롯데를 대표했다. 야구선수로는 작은 체구였지만, 박정태의 야구는 다부지고 투쟁심이 남달랐다. 신체적인 약점을 그만의 타격폼으로 극복했고 리그 정상급 2루수로 자리했던 박정태였다.

 

박정태의 야구는 탱크라는 별명답게 저돌적이고 거침이 없었다. 흐느적 거리는 그만의 타격폼은 우수워 보이기도 했지만, 그는 투수들을 주눅 들게 하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아마시절부터 국가대표 중심타자로 활약했던 박정태는 1991년 롯데에 입단한 직후 중심 타선에 배치되었다. 입단 첫해 박정태는 0.285의 타율과 132안타 14홈런 74타점으로 순조롭게 프로에 적응했다.

 

1992시즌 박정태는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그 해 박정태는 0.335의 타율과 149개의 안타 14홈런, 79타점으로 큰 활약을 했다. 그가 기록한 한 시즌 43개의 2루타는 99년 이병규, 2003년 이종범과 함께 시즌 최다 2루타 기록으로 남아있다. 박정태는 작은 체구지만 정교함과 장타력을 겸비한 선수였다. 좌.우중간을 빼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 해 롯데는 박정태를 비롯한 상하위 타선 가리지 않는 불꽃 타선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프로 데뷔 이후 리그를 대표하는 2루수로 승승장구하던 박정태는 1993시즌 큰 부상을 당하면서 선수생명까지 위협받는 위기를 맞이했다. 그 해 박정태는 베이스런닝 도중 입은 부상으로 발목의 복합 골절되고 말았다. 상당한 재활기간이 요구되는 부상이었고 재기를 장담할 수 없었다. 박정태는 강한 의지로 부상을 이겨냈다. 1994시즌 내내 재활에 매달렸던 박정태는 1995시즌 중반 다시 그라운드에 복귀했다.  

 

1995시즌 50경기에서 0.337의 타율로 재기에 성공한 박정태는 1996시즌 0.309의 타율을 기록하며 녹슬지 않은 기량을 과시했고 2루수 부분 골든글러브 수상자로 돌아왔다. 박정태는 1997시즌 2할대 타율로 다소 주춤했지만, 1998, 1999시즌 연속 3할 타율과 두 자리 수 홈런 평균 80타점을 기록하며 2년 연속 골든글러브 수상자가 되었다. 부상 회복조차 장담할 수 없었던 그가 리그 최고 2루수로 돌아왔다는 것은 인간 승리 그 자체였다.

 

이렇게 박정태는 부상을 이겨낸 강한 의지, 꾸준한 성적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남다른 리더십도 롯데 팬들의 지지를 받는 요인이었다. 특히 프로야구 포스트시즌 최고 명승부 중 하나로 꼽히는 1999시즌 삼성과 롯데의 플레이오프 7차전에서 보여준 강력한 리더십은 그를 특징짓는 것이었다.

 

당시 롯데와 삼성은 한국시리즈 진출을 위해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두 팀은 마지막 대결은 양 팀 선수들뿐만 아니라 관중마저 흥분시키는 대결이었다. 삼성의 홈은 대구에서 열린 7차전 경기는 홈런을 주고받는 공방전이었다. 과열된 경기는 관중이 던진 오물에 몸을 맞는 롯데 외국인 선수 호세가 방망이를 관중석에 투척하는 사건으로 이어졌고 이에 흥분한 대구 관중들의 집단 오물 투척이 이어지면서 경기는 수십 분간 중단되었다. 

 

이 과정에서 롯데 중심 타자 호세가 퇴장당하고 말았다. 이에 롯데 선수들은 박정태를 중심으로 경기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코치진의 만루로 경기는 속행되었지만, 롯데 선수들의 사기는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박정태는 선수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았다. 롯데 선수들은 포기하지 않은 근성과 높은 집중력으로 불리한 경기를 연장으로 몰고 갔고 극적인 승리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 경기는 롯데 팬들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남는 승리의 기억이었고 박정태의 당시 롯데의 구심점이었다.

 

 

 

 

 

 

이런 박정태를 롯데 팬들은 사랑했고 아낌없는 성원을 보냈다. 이렇게 팬들의 지지를 받는 그였지만, 구단과의 관계는 항상 좋지 못했다. 선수협 파동의 주역으로 구단에 반기를 들기도 했고 연봉협상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 롯데로서는 박정태의 팀의 레전드이기도 했지만, 눈에 가시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이런 박정태도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했다. 2000년 들어 박정태는 점점 성적에서 내림세에 접어들었다. 그의 마지막 시즌인 2004시즌까지 박정태는 더는 3할 타자로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2루수로서 수비 폭도 크게 줄었다. 자연히 출전 경기수도 줄었다. 2004시즌 박정태는 세대교체라는 구단의 방침에 따라 자의 반 타의 반 출전기회를 빼앗기고 말았다. 트레이드설이 나올 정도로 팀내 위상도 떨어졌다.

 

2004시즌을 마지막으로 박정태는 선수생활을 접고 또 다른 길을 가야 했다. 그는 선수생활을 연장하고 싶었지만, 롯데를 떠날수도 없었던 그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은퇴후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은 박정태는 자신이 뛰었던 롯데에서 코치로 팀과 함께했다. 공교롭게도 롯데는 박정태가 은퇴할 즈음 암흑기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가 코치로 돌아왔어도 롯데는 만연 하위권 티의 오명을 벗지 못했다. 박정태는 코치로서 롯데의 안타까운 시즌을 함께 겪어야 했다.

 

이후 롯데가 상위권 팀으로 팀 면모를 일신했을 때에는 2군 감독으로 롯데의 팜 시스템을 확립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도라로서 2012시즌은 박정태에 큰 시련의 시기였다. 이대호가 빠진 롯데 타선은 더는 강타선이 아니었다. 그 전해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낸 선수들의 그 성적을 능가하지 못했고 이대호 효과마저 사라지면서 롯데는 시즌 내내 약체 타선으로 고전해야 했다. 전임 김무관 코치에 이어 1군 타격코치역할을 했던 박정태 코치에 따가운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시즌 종료 후 박정태는 팀 타선 부진에 책임을 지고 코치직을 사임했다. 다른 보직을 맞을 수도 있었지만, 박정태는 이를 마다하고 정든 팀을 떠나는 결정을 했다. 선수생활 내내 롯데 선수였고 코치로서도 롯데에만 머물렀던 그였지만,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또 다른 도전을 선택한 박정태였다. 박정태는 그가 팀을 떠나면서 롯데가 코칭 스탭을 개편하고 분위기를 일신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박정태는 코치로서도 롯데를 떠났지만, 3월에 열리는 WBC 대회 국가대표팀 코치로 참가하고 있다. 롯데에서 그의 야구는 잠시 중단되었지만, 그는 야구를 떠나지 않았다. WBC 대회를 통해 박정태는 지도자로서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잡은 셈이다. 

 

이렇게 박정태는 선수로서도 지도자로서도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경험했다. 그가 팀을 떠났지만 롯데 팬들 마음속에 박정태는 영원한 레전드 그 자체다. 박정태는 2루수 부분 골든글러브 5회 수상자로 이 부분 최다 기록을 유지하고 있다. 레전드 올스타 선정에서도 박정태는 당당한 2루수로 그 자리를 차지하는 선수다. 박정태는 여전히 롯데와 리그를 대표하는 2루수라 할 수 있다.

 

롯데가 오랜 침체기에 빠져있던 시절 롯데 팬들의 롯데 선수들에게 박정태의 근성과 투혼을 배우라고 질책하곤 했다. 그가 가지는 상징성이 그만큼 강하다는 방증이었다. 그 정도로 박정태는 선수생활을 통해 강렬한 인상을 남긴 몇 안되는 선수 중 하나였다. 그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던 박정태는 근성, 투혼으로 상징되는 선수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박정태의 근성과 투혼은 화려했던 롯데 선수, 코치시절을 뒤로하고 만들어갈 그의 야구인생이 더 궁금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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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롯데 자이언츠 홈페이지 

Posted by 지후니 지후니74 트랙백 0 : 댓글 4

프로야구 선수에 있어 오랜 기간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은퇴 후에도 팬들에게 기억되는 것만큼 영광스러운 일도 없다. 프로선수가 되면 누구가 그런 소망을 가지곤 하지만, 이루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프로의 세계는 그만큼 냉혹하고 치열한 경쟁이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베테랑 선수들에 대한 구단의 잘못된 인식도 크게 작용했다. 


구단들은 효율성의 논리로 베테랑들을 홀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 그 가치를 인정하고 있긴 하지만, 자의 반 타의 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유니폼을 벗는 것을 볼 수 있다. 공정한 경쟁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세대교체의 물결 속에 한 시대를 풍미하는 선수가 휩쓸리는 것은 팬들에게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프로야구 롯데는 타 팀보다 유독 팀의 레전드가 될 수 있는 선수들을 아쉽게 떠나보낸 경우가 많았다. 과거 한국 시리즈 4승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최동원이 그랬고 원년 롯데의 강타자 김용철도 롯데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하지 못했다. 수퍼베이비라 불리며 한 시대를 이끌어갈 투수로 평가받던 박동희도 타 팀에서 쓸쓸히 선수생활을 마감해야 했다. 


이 외에도 롯데는 매 시즌 팀의 주축 선수들과 연봉협상 과정에서 크고 작은 마찰을 일으켰다. 이는 FA 시장에서 상당수 선수들을 잃는 결과로 이어졌다. 선수들의 마음을 잡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올 시즌을 앞둔 FA 시장에서도 롯데는 홍성흔, 김주찬 두 주축 선수를 잃었다. 이들의 이적은 금액이나 조건의 차이보다는 보이지 않는 이유가 더 크게 작용했다. 

 

 

 

 

 


이렇게 롯데를 떠난 베테랑들 중에서 생각나는 이름이 있다. 롯데의 마지막 도루왕 전준호가 그렇다. 전준호는 신인때부터 롯데 외야진의 주축이었고 팀의 테이블세터로 활약했다. 다부진 체구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타격과 현란한 주루 플레이는 롯데 공격의 중요한 무기 중 하나였다. 전준호는 빼어난 기량으로 롯데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전준호는 1992년 롯데의 기적 같은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이었다. 개인적으로 두 차례 도루왕에 오르며 대도의 계보를 잇는 선수가 되기도 했다. 특히 1993시즌 야구천재 이종범과 벌인 도루왕 경쟁은 당시 큰 화제였다. 두 선수는 시즌 막판까지 1~2개 차이로 도루왕 경쟁을 벌였고 전준호는 간발의 차이로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이후 전준호는 1995년 69개의 도루로 또 다시 도루왕에 오르면 리그를 대표하는 정상급 1번 타자로 자리매김했다. 전준호는 롯데를 대표하는 선수였다. 하지만 1995년 전준호의 도루왕 타이틀은 롯데의 마지막 도루왕 타이틀이기도 했다. 1997시즌 전준호가 갑작스럽게 트레이된 이후 롯데는 더는 도루왕 타이틀 홀더를 배출하지 못했다. 


당시 롯데는 아마야구 최고 투수였던 문동환을 영입하기 위한 카드로 전준호를 현대에 제시했다. 문동환은 롯데 지명선수였지만, 아마 현대 피닉스 선수 소속으로 뛰었던 탓에 그 보유권을 롯데가 가질 수 없었다. 현대가 프로야구팀을 창단하면서 문동환 영입은 더 꼬일 수밖에 없었다. 롯데는 아마추어 현대에 지급해야 할 막대한 보상금을 전준호로 대신했다.

 

결과적으로 롯데의 전준호 트레이드는 패착이었다. 이후 전준호는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현대와 히어로즈로 팀이 바뀌는 과정에도 정상급 1번 타자로 활약했지만, 문동환은 기대와 달리 1998시즌 12승, 1999시즌 16승 이후 부상이 겹치면서 급격히 내리막을 걸었고 이후 2004시즌 FA 보상선수로 팀을 떠나야 했다. 이후 문동환은 한화에서 2006시즌 16승을 올리며 재기에 성공했지만, 그의 부활은 롯데의 것이 아니었다.

 

롯데는 팀의 레전드가 될 수 있는 부동의 1번 타자를 너무 쉽게 떠나보냈고 팀의 10년 에이스로 여겨졌던 투수를 얼마 활용하지 못하고 타 팀으로 내주고 말았다. 두 선수 모두 롯데의 주축 선수가 될 수 있었지만, 당시 롯데 구단의 판단 실수가 더해지면서 타 팀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해야 했다. 전준호, 문동환이 얽힌 이 트레이드는 두고두고 롯데 팬들에게 아쉬움이 남는 사건이었다.

 

롯데는 전준호를 떠나보낸 이후 상당기간 1번 타자 부재에 시달렸다. 정수근이라는 당대 최고 1번 타자를 FA 영입하기도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김주찬이 자리하기까지 롯데의 1번타순은 타순의 큰 고민이었다. 떠난 전준호가 오랜 기간 기억되는 이유이기도 했다. 전준호 트레이드는 두고두고 롯데 구단이 팬들의 비난을 받는 소재였다.

 

현대로 팀을 옮긴 전준호는 이후 현대가 최강 팀이 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전준호는 철저한 자기관리와 성실함으로 30살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그 기량을 유지했다. 해마다 전준호는 매 시즌 3할대 언저리의 타율을 유지했고 꾸준히 안타와 도루를 만들어냈다. 도루 부분에서는 항상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다. 2004시즌에는 1995시즌 이후 오랜 세월을 뛰어넘어 도루왕 타이틀 홀더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전준호는 롯데 선수라는 그림자를 지워내고 당대 최강 팀 현대의 1번 타자로 정상급 기량을 과시했다. 무엇보다 나이를 잊는 그의 꾸준함은 베테랑 선수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현대에서 히어로즈로 팀이 바뀌면서 전준호는 선수생활 후반기에 큰 시련을 겪었다.

 

자금난에 시달리던 히어로즈 구단은 고액 연봉을 받는 베테랑 선수들의 연봉을 대폭 삭감했다. 현대가 어려운 시절 후배들을 다독이며 팀을 이끌었던 히어로즈의 베테랑들은 반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팀을 떠날 수 없었던 이들은 구단의 처사에 따라야 했다. 전준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전준호는 거의 70%에 가까운 연봉삭감을 받아들였다. 2008시즌 전준호는 2억 5천만에서 7천만으로 연봉이 삭감됐다.

 

의욕이 떨어질 수 있었지만 전준호는 성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다. 2008시즌 전준호는 114경기에 나서며 타율 0.310, 109안타, 16개의 도루로 녹슬지 않은 기량을 과시했다. 40을 바라보는 나이의 선수라 믿기지 않는 성적이었다. 선수난에 시달리던 히어로즈의 주축 선수로 팀을 잘 이끌어주었다.

 

장수하는 선수로 40살을 넘어서까지 활약이 기대되던 전준호였지만, 2009시즌 입은 큰 부상은 그의 선수생활 연장 의지를 꺾이게 하고 말았다. 2009시즌 21경기 출전에 그친 전준호는 재기를 꿈꿨지만, 구단의 반응은 냉담했다. 전준호는 선수생활 연장의 의지를 더는 이어갈 수 없었다.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은퇴를 선택해야 했다. 또 한 명의 레전드가 쓸쓸히 선수생활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구단과의 마찰로 화려한 은퇴식도 열 수 없었다.

 

 

 

 

 

 

이런 전준호를 팬들은 잊지 않았다. 팬들을 중심으로 그의 은퇴식 논의가 있었고 전준호는 팬들이 만들어준 은퇴식을 치를 수 있었다. 성대한 은퇴식은 아니었지만, 1991년 프로입단 이후 2009시즌까지 18년을 이어온 선수생활을 의미있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야구를 아는 팬들은 베테랑의 가치를 알고 있었고 팬들이 마련한 감동의 은퇴식으로 이어졌다.

 

전준호는 롯데, 현대, 히어로즈로 이어지는 선수생활 통산 0.291, 2018안타, 550개의 도루라는 대기록을 남겼고 프로야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현역에서 물러났다. 전준호는 이후 지도자 수업을 받고 지금은 신생팀 NC의 코치로 자리 잡았다. 그가 선수생활 동안 보여준 성실함과 오랜 경험에서 나온 노하우는 특히 주루 부분에서 NC 선수들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제 도루왕 전준호는 추억 속의 이름이 되었다. 롯데와 전준호의 인연도 먼 기억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 비록 전준호가 롯데에서 선수생할을 마감하지 못했지만, 롯데 팬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도루왕으로 남아있다. 롯데에서 보낸 6년은 그만큼 강렬했다. 그 당시 롯데는 똑딱이 타선과 기동력을 앞세워 지금과 다른 공격 야구를 펼치는 팀이었다. 전준호는 당시 롯데 공격의 중심에 있었고 강하게 롯데팬들에 각인될 수밖에 없었다.

 

올 시즌 전준호는 롯데와 지역 라이벌 구도를 형성할 신생팀 NC의 1군 코치로 롯데팬들과 만날 것으로 보인다. 지도자로서 그의 선수생활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직야구장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 전준호는 아직 롯데의 마지막 도루왕이라는 점과 롯데 마지막 우승의 주역이었다는 점이다. 롯데의 과거를 기억하는 팬들은 전준호가 코치로 롯데와 인연을 이어가길 바랄지도 모른다. 앞으로 전준호가 지도자로도 어떤 모습을 보일지 그가 만들어갈 야구인생 제2막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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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넥센 히어로즈 홈페이지

Posted by 지후니 지후니74 트랙백 0 : 댓글 5

올 시즌 우리 프로야구는 큰 변화를 맞이한다. 제9구단이 참가하면서 기존 8개 구단 체제에 큰 변화가 생겼다. 제10구단 창단도 가시권에 들어왔다. 수십 년간 노후화 문제를 지적받던 야구장도 새롭게 지어지고 단장되고 있다. 최고 인기스포츠가 된 프로야구의 인기는 올해도 여전할 것으로 보인다. 프로야구의 새로운 중흥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젠 프로야구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할 때가 되었다. 출범한 지 30년이 넘는 시점에 미국 프로야구의 명예의 전당과 같은 과거를 추억하고 가치 있는 기록들과 사료들을 더 많은 이들과 더 오랜기간 공유할 수 있는 공간 마련도 필요한 시점이다. 과거가 없는 현재가 없고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과거 우리 프로야구를 풍미했던 선수들을 추억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 첫 번째로 80년대 중반과 90년대 초반 롯데의 에이스로 활약했던 윤학길과의 과거 여행을 하려 한다. 윤학길은 지난해 롯데의 2군 감독을 지냈고 선수 은퇴 후에도 여러 팀에서 코치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철저한 자기관리로 오랜 기간 선수로 활동한 윤학길은 지금은 보기 드문 선발 완투형 투수의 전형이었다. 그가 나서는 경기는 그가 책임지는 것이 당연했을 정도였다.


윤학길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프로야구는 성장기에 있었다. 하지만 많은 것이 부족했다. 시설도 그랬고 선수도 그랬다. 특히 투수 부분은 그 층이 엷었다. 당연히 에이스급 투수들의 혹사가 당연시 되던 시절이었다. 과거 최동원이 한국시리즈 7경기에서 4차례 완투, 1차례 구원등판으로 홀로 4승 1패를 하며 우승을 이끌었을 때에도 그의 투혼을 얘기하는 이는 많았지만, 혹사 문제를 지적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그만큼 초창기 프로야구는 선수보호라던가 과학적인 선수 육성, 관리 개념이 크게 대두하지 않았었다. 1987년 시즌 처음 프로에 입문한 윤학길은 입단 당시부터 될성부른 나무였다. 큰 키에서 내리꽂는 위력적인 직구와 낙차 큰 변화구, 제구력까지 겸비한 선발 요원은 당장 롯데의 에이스로 자리 잡았다. 팀의 레전드 최동원이 팀을 떠난 상화에서 윤학길은 롯데 NO. 1 투수였다. 


하지만 이런 위치는 그에게 초인적인 등판을 강요하는 굴레였다. 윤학길은 전성기 시절,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이닝과 경기를 소화했다. 당시 롯데는 윤학길이 등판하는 경기는 그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식이었다. 장마철 경기가 순연되면 윤학길을 장맛비와 함께 로테이션을 맞추곤 했다. 윤학길, 비, 비, 비, 윤학길 이런 식이었다. 그럼에도 윤학길은 묵묵히 마운드에 올랐다. 


1986년 롯데에 입단한 윤학길은 1987년 시즌 13승 10패 방어율 2.57로 팀의 주력 선발투수로 자리를 잡았다. 이후 윤학길은 3승 12패로 부진했던 1990시즌을 제외하고 1993시즌까지 매 년 200이닝이 넘는 투구를 했다. 초인적이라는 표현이 딱 맞았다. 선발, 중간, 마무리의 구분이 없던 시절, 윤학길은 팀에 꼭 필요한 선발투수 그 이상의 존재였다.

 

리그 정상급의 선발 투수였지만, 그에게 최고라는 수식어는 붙지 않았다. 어느 순간 그에게 붙여진 별명은 고독한 황태자였다. 윤학길은 등판하는 경기에서 불펜진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전통적으로 불펜이 약했던 롯데 마운드 사정은 윤학길에 대한 의존도를 높였다. 무리한 등판은 필연이었다. 그 과정에서도 윤학길은 매 년 호성적으로 팀의 기대에 부응했다.

 

그럼에도 윤학길은 당 시대를 풍미하던 스타에 밀려 대관식을 올릴 수 없었다. 막강 해태 시대를 이끌던 선동렬은 윤학길이 넘기 어려운 벽이었다. 여기에 롯데 하면 떠올리는 이름 최동원의 존재 또한 윤학길에 무거운 짐이었다. 윤학길이 전성기를 보내던 시절 최동원은 팀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족적은 남아있었다. 롯데 팬들은 최동원을 대신할 에이스를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윤학길은 영원한 2인자였다.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고 온화한 성격은 그를 팬들에 어필하지 못하는 요인이기도 했다. 윤학길은 30살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흐르는 세월을 극복할 수 없었다. 1997시즌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무리한 윤학길은 통산 방어율 3.33, 117승 94패의 성적을 남겼다. 그중에서 완투 경기는 무려 100경기였고 완봉승은 20차례가 있었다. 

 

특히 100완투 경기 기록은 경이롭기까지 한 기록이다. 지금의 프로야구라면 나오긴 힘든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 통산 완투경기 기록만으로 윤학길은 리그를 대표하는 투수로 손색이 없다. 우리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이 생긴다면 가장 먼저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선수 중 하나다. 이렇게 윤학길은 당대 최고 투수들에 가려진 비운의 영웅이기도 했지만, 의미가 큰 기록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윤학길은 롯데의 중흥기, 암흑기를 관통하던 시절 팀을 대표하는 선수이기도 했다. 윤학길은 1992년 롯데의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이었다. 당시 롯데 마운드의 중심은 윤학길, 고졸 신인으로 돌풍을 일으켰던 염종석, 수퍼 베이비라 불리었던 박동희 세 명이었다. 이들은 준PO부터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팀 마운드를 이끌었다. 스포트라이트는 염종석과 박동희가 더 많이 받았지만, 윤학길은 팀의 리더로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팀에 기여했다. 

 

 

 

 

 

 

이후 윤학길은 롯데의 암흑기 때에는 나 홀로 고군분투하기도 했다. 그가 은퇴한 이후 롯데는 더 깊은 침체기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윤학길은 롯데의 팀 역사와 함께했던 투수였다. 그는 고톡한 황태자로 불리었지만, 최소한 롯데 팬들에게 윤학길은 고독하지 않는 황태자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선수였다. 

 

선수생활을 마감한 윤학길은 이후 여러 프로팀에서 투수코치로 활동하면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갔다. 지도자로서 윤학길은 그 길이 순탄치 않았다. 한 팀에 정착하지 못하는 것이 코치들의 숙명이지만 윤학길은 여러 팀을 전전했다. 지난 시즌에는 롯데 2군 감독을 역임하기도 했지만, 재계약에 실패하면서 야인으로 돌아간 상황이다. 하지만 그의 풍부한 경험과 노하우라면 언제든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윤학길은 프로야구 태동기에 그리고 발전기를 함께 한 선수였다. 투수들의 혹사가 절정에 이른 시절을 보냈고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해냈다. 그가 선수생활을 접은 이후 프로야구는 투수운영의 분업 체계가 더 확실하게 자리 잡았고 체계적인 팀 운영에 눈을 떴다. 이런 과도기를 견뎌내며 쌓아온 그의 기록은 상당한 가치를 지닌다.

 

선수생활을 하는 동안 사람들은 그가 고독했다고 하지만, 프로야구 역사에서 윤학길은 리그를 대표하는 투수 그 이상의 존재였다. 앞으로 지도자로서 그가 어떤 모습을 계속 보여줄지 주목된다. 

 

Gimpoman/심종열 (http://gimpoman.tistory.com/, http://www.facebook.com/gimpoman)

사진 : 롯데 자이언츠 홈페이지

Posted by 지후니 지후니74 트랙백 0 : 댓글 5
1984년은 전후기 리그가 존재하던 시절, 전기리그 우승팀 삼성과 후기리그 우승팀 롯데가 한국시리즈에서 만났습니다. 당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삼성의 우승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 그 이상의 전력차가 존재했습니다. 삼성은 타팀을 크게 압도하는 최강 전력이었고 롯데는 후반기 힘겹게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삼성은 충분히 비축하면서 한국시리지를 대비했습니다. 후반기 전력을 아끼는 여유를 보였습니다. 타격 3관왕에 빛나는 이만수와 이미 고인이 된 안타제조기 장효가 이끄는 타선은 상대팀들에겐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하던 좌완 김일융이 가세한 투수진 또한 리그 최강이었습니다. 롯데가 삼성을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극히 낮았습니다.

후기리그 막판 삼성은 손쉬운 상대인 롯데에게 져주기 게임이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노골적으로 롯데를 파트너로 선택했습니다. 여기에 이만수의 타격 3관왕 등극을 위해 경쟁자인 롯데 홍문종에게 고의 볼넷을 연거푸 내보내는 추태까지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래저래 많은 이야기거리를 가진 한국시리즈 대진이었습니다.




롯데가 믿을 수 있는 카드는 최동원이었습니다. 그 해 시즌 27승을 거두면서 롯데의 한국 시리즈 진출을 견인했던 에이스에게 모든 걸 걸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최동원은 이미 시즌중에 그 힘을 소진한 상태였습니다. 아마시절 팀과 국가대표를 오가면 혹사당한 그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1984년의 엄청난 기록은 정말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이미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상황, 롯데로서는 최동원의 초인적인 투구에 운명을 걸러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롯데의 전략은 1, 3 ,5, 7차전에 최동원을 내세워 이 경기를 모두 잡아 시리즈를 잡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무리수였습니다. 그만큼 롯데는 삼성의 강타선을 막아낼 마땅한 카드가 없었습니다.

팀의 기대대로 최동원은 1차전과 3차전을 완투하며 팀의 2승을 책임졌습니다. 삼성의 일방적 우세가 예상되던 시리즈는 팽팽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삼성은 김일융이 매 경기 승리를 가져가면서 최동원과 맞섰습니다. 삼성은 에이스 김일융과 최동원과의 맞대결을 피했습니다. 최동원이 힘이 떨어지면 한 경기 정도는 잡아낼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5차전에서 삼성의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1,3차전에 힘을 크게 소진한 최동원은 5차전에서 그 위력이 크게 떨어졌습니다. 투혼의 피칭으로 완투했지만 결과는 패전이었습니다. 롯데의 시리즈 전략이 무너진 것이었습니다. 최동원이 나온 경기를 패하면서 롯데의 우승 꿈도 멀어지는것 처럼 보였습니다. 혹시나 롯데의 이변을 기대했던 팬들은 그 기대를 접어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6차전에서 롯데 타선은 삼성의 투수진을 초반부터 공략하면서 리드를 잡았습니다. 경기 초반 리드를 잡은 롯데는 전날 완투한 최동원을 다시 구원등판 시키는 강수를 던졌습니다. 아마야구에서도 나올 수 없는 혹사였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시리즈를 최종전으로 끌고가야 했습니다. 최동원은 전날의 패전을 설욕하면서 구원등을 따냈습니다.

시리즈 3승 3패, 이제 마지막 최종전에 모든 것을 걸어야 했습니다. 롯데는 최동원의 어깨에 또 한번 팀의 운명을 맡겨야했습니다. 이미 지칠대로 지친 최동원의 등판은 무리수였습니다. 하지만 대안이 없었습니다. 삼성의 선발 김일융 역시 무리를 하고 있었지만 최동원보다는 힘을 비축한 상황이었습니다. 양팀 선발의 힘에서 삼성은 롯데는 앞섰습니다.

최동원의 구위는 삼성 타선을 막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투혼을 발휘했지만 초반 실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팀은 그를 대신할 투수를 내세울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엄청난 중압감을 견뎌야 하는 시리즈 최종전에서 최동원과 같이 담대하게 공을 던질 투수는 없었습니다. 모두 그의 투구를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중반 이후 최동원의 구위는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승리에 대한 그의 의지와 열망은 그를 기적적으로 부활시켰습니다. 최동원이 마운드의 안정을 가져다 주면서 롯데타선은 시리즈 내내 당하기만 했던 김일융의 공을 공략하는데 성공했고 경기는 팽팽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그리고 경기 후반 나온 유두열의 3점 홈런은 롯데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짓는 한 방이었습니다.

결국 최동원은 7차전 마저 완투승으로 장식하면서 홀로 팀의 4승을 책임졌습니다. 결정적인 3점 홈런을 기록한 유두열이 시리즈 MVP를 차지하기 했지만 최동원이 없었다면 롯데의 1984년 기적은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최동원의 혼신의 역투는 그를 롯데의 레전드로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롯데는 최강팀 삼성을 누르고 우승팀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롯데의 영광은 최동원의 선수생명을 담보로 한 것이었습니다. 이미 아미시절 혹사로 그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시리즈 투혼은 그의 전성기를 더 단축시켰습니다. 다음해 20승을 올리면서 건재를 과시했지만 그의 그 다음해부터 그의 기록은 점점 하향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리그 정상권의 기량은 여전했지만 최고 투수의 자리는 선동열이라는 또 다른 태양이 자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해마다 구단과 연봉협상 과정에서 마찰을 빚던 그는 롯데구단에 미운털이 박혀있었습니다. 급기야 선수협 창설 당시 주축 멤버였던 최동원은 삼성으로 보복성 트레이드를 당했습니다. 당시 양팀 에이스 최동원, 김시진의 맞트레이드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롯데의 우승을 이끌었던 에이스는 팀과 원치않은 이별을 해야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롯데로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이미 야구에 마음이 떠난 최동원은 그 하향세가 더 두드러졌습니다. 그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성적에 최동원은 미련없이 유니폼을 벗었고 은퇴식조차 치르지 못하고 그라운드를 떠나야 했습니다. 롯데의 레전드였지만 최동원은 선수생활의 마무리를 고향팀에서 하지 못했습니다. 은퇴후 지도자로서 또 다른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마지막 소망으로 고향팀에서의 지도자 생활을 원했습니다.

그의 희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는 긴 병마와의 싸움 끝에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당시 지금과 같이 선발과 불펜이 구분이 없던 시절, 최동원은 팀이 원하면 어느 순간에라도 등판했습니다. 그 결과는 선수수명의 단축과 구단으로부터의 배신이었습니다.

하지만 팬들은 그의 열정과 승리에 대한 의지를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1984년 가을 보여준 그의 초인적인 투구는 영원히 그를 전설로 남기는 장면들이었습니다. 그의 전성기가 길진 않았지만 그는 너무나 강렬한 기억을 팬들에게 남겼습니다. 비록 그의 모습을 다신 볼 수 없지만 그가 남긴 투혼과 열정의 투구는 영원히 팬들의 마음을 울릴 것입니다.

최동원, 그의 불꽃 투혼을 기억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빕니다.


김포총각/심종열 (http://gimpoman.tistory.com, @youlsim)
사진 : 롯데자이언츠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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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시즌 후반기를 앞두고 큰 사건이 터졌습니다. 양준혁 선수의 전격 은퇴 선언이 그것입니다. 올 시즌 이후 은퇴라고 하지만 사실상 그의 플레이는 올스타전이 마지막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아직 힘이 남아있고 올스타전에서 부활의 홈런을 기록했던 그가 스스로 선수생활을 접은 것입니다.

사실 양준혁 선수의 은퇴선언은 이외였습니다. 현역 생활에 대한 의지가 누구보다도 강했고 의욕적인 동계 시즌을 보낸 그였습니다. 팀에 충분히 기여할 수 있는 몸 상태였습니다. 그가 타석에 설때마다 쌓여가던 통산 기록들에 대한 가치도 상당했습니다. 그토록 의욕을 보였던 통산 최다 안타기록도 카운트를 멈추게 되었습니다.

팬들은 무엇보다 위풍당당하던 양준혁 선수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너무나 큽니다. 팀을 떠나서 그가 만들어 가는 프로야구의 역사에 누구나 관심을 가졌고 KIA 이종범 선수와 더불어 신이라 불리는 사나이고 인증되었습니다. 그만큼 그가 프로야구에서 가지는 비중은 너무나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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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준혁 선수는 데뷔때 부터 대형 선수로 각광을 받았습니다. 특유의 호쾌한 타격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신인 답지 않은 당당함과 당당함과 건방져 보이기까지 한 자신감은 그를 특징짓는 것이었습니다. 고향팀인 삼성에 오기위해 타 팀의 신인 지명을 거부하고 상무에 입대한 것은 지금도 화제가 되는 일화입니다. 양준혁 선수는 실력만큼이나 카리스마 넘치는 캐릭터로 팬들에게 각인되었습니다.

양준혁 선수는 방망이를 거꾸로 들어도 3할을 친다는 말처럼 천부적인 재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의 스윙폼은 정석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어떻게 공을 맞힐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정도였습니다. 스윙폼만 고친다면 4할을 칠수도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폼을 은퇴하는 순간까지 버리지 않았습니다. 특유의 타격폼은 그를 특징짓은 것이었습니다.

양준혁 선수는 이전 장효조 선수로 대표되는 삼성 좌타자 계보를 훌륭히 이어갔습니다. 정교함과 힘을 겸비한 타격은 타팀에서 큰 골치거리였습니다. 그가 만들어가는 기록은 삼성의 레전드를 넘어 프로야구의 전설로서 그를 만들어갔습니다.

양준혁 선수는 의도하지 않았던 외부 요인으로 선수생활에 부침이 겪었습니다. 오랜기간 우승에 목말랐던 삼성은 임창용이라는 명품 마무리를 얻기위해 양준혁 선수를 대체카드로 내세웠습니다. 삼성에 오기위해 선수생활의 공백을 감수했던 양준혁선수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영원한 삼성선수로 남고싶었던 그와 그를 아끼는 팬들의 비난은 대단했습니다. 자존심 강한 그의 선수생활이 끝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김응용 감독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선수생활을 이어갔습니다. 당시 해태 감독이었던 김응용 감독이 삼성 감독과 사장으로 양준혁 선수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양준혁 선수의 여정은 해태를 거쳐 LG로 이어졌고 삼성의 레전드로 남기 힘들어 보였습니다. 그를 보내면서까지 우승을 염원했던 삼성은 그 염원을 이루지 못하고 아쉬움만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만들어진 FA 제도는 삼성으로 복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삼성 팬들은 그의 복기를 강하에 염원했고 그는 화려하게 삼성으로 복귀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승을 위해 그를 떠나보냈던 삼성은 그가 삼성에 복귀하면서 우승을 꿈을 이루었습니다. 삼성에서의 그의 존재감은 더 커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2010년, 양준혁 선수는 그가 원했던 대로 삼성이 전설로 은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당당한 모습을 조금 더 보고싶어하는 팬들의 아쉬움은 너무나 큽니다. 팬들은 그에게 신의 칭호까지 붙여주며서 위풍당당한 타격이 영원하길 기대했습니다. 그가 타석에 서는것 만으로도 팬들은 즐거워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의 무게까지 이겨내기엔 그도 힘에 부친 듯 합니다.

2009 시즌 부진한 팀 타선을 홀로 떠 받치던 양준혁 선수는 불의 부상으로 시즌아웃되었고 삼성의 가을야구 전통마저 끝나고 말았습니다. 선수생활을 하면서 부상공백이 없었던 양준혁 선수에게 부상 공백은 큰 타격이었습니다. 반대로 삼성의 세대교체를 더욱 더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젊은 선수들이 중용되고 그들의 기량이 급 성장하면서 양준혁 선수의 팀내 입지는 점점 좁아졌습니다. 삼성은 여름이 되면서 최강의 팀으로 변모했고 세대교체와 팀 성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 있습니다.

그가 없이도 강해진 삼성을 보면서 양준혁 선수는 마음편히 은퇴를 결정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를 트레이드한 삼성에 대한 아쉬움도 있었지만 그는 영원한 삼성선수였고 지금 은퇴하는 것이 팀에 더 보탬이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마지막 포스트시즌 출전의 꿈도 버렸습니다. 초라한 퇴장보다는 당당한 은퇴를 선택했습니다. 그의 자리는 또 다른 젊은 선수로 채워질 것이고 삼성은 더 젊은 팀이 될 것입니다.

영원히 선수생활을 할 것으로 보였던 양준현 선수가 무대뒤편으로 사라지려 하고 있습니다. 그는 좀 더 당당하고 멋진 퇴장을 선택했습니다. 올스타전에서 기록한 홈런은 그의 마지막 안타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카리스마와 수 많은 기록들은 영원히 팬들 가슴속에 남을것이고 프로야구가 존재하는 한 계속 이야기 소재로 남을 것입니다.

양준혁 선수가 은퇴하면서 프로야구의 또 한세대가 저물어 가는 느낌입니다. 그의 빈자리는 또 다른 누군가가 들어설 것이고 또 다른 전설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양준혁 선수가 만들어 놓은 전설을 뛰어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긴 선수생활을 마감한 양준혁 선수가 어떤 모습으로 인생 2막을 열어갈지, 그의 다음 행보도 주목됩니다.  
Posted by 지후니 지후니74 1 : 댓글 7

1992년, 커다란 안경을 쓴 호리호리한 체격의 젊은 투수가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로무대에 뛰어든 젊은 신인, 염종석 선수가 바로 그 투수였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그렇게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투수에게 팬들의 기대는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범경기때 부터 조금씩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염종석 선수는 시즌 중반부터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이 되더니 에이스로서 팀을 이끄는 투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롯데 한국 시리즈 우승의 주역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당시 염종석 선수의 투구는 환상 그 자체였습니다. 140km 중반을 넘는 묵직한 직구와 함께 140km에 육박하는 초고속 슬라이더는 타자들을 바보로 만들었습니다. 활처럼 휘는 슬라이더는 명품 그 자체였습니다. 타자들은 연신 헛 스윙을 남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데뷔 첫해 염종석 선수의 성적은 17승 9패, 6세이브, 방어율 2.33, 완투경기 13번에 완봉도 2번이 있었고 탈삼진은 127개 였습니다. 선발과 구원을 가릴 것 없는 그의 활약은 최고 투수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고 팀을 리그 3위로 이끌었습니다.



그의 활약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넘기 힘든 벽처럼 보였던 삼성, 해태, 빙그레 3팀을 연파하면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롯데의 중심에 그가 있었습니다. 새롭게 익힌 포크볼은 슬라이더와 함께 타자들을 더욱 더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슬라이더에 대비한 상대팀들은 또 다른 변화구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삼성과의 준 플레이오프 부터 팀의 에이스로 활약한 염종석 선수는 해태와의 플레이오프에서는 4차전 선발투구와 5차전 구원을 모두 해내면서 팀을 한국시리즈로 이끌었습니다. 5차전이 끝나고 팀의 고참투수 윤학길의 선수의 포옹 장면은 지금도 가슴 뭉클한 장면이었습니다. 고독한 황태자로 불리웠던 윤학길 선수에게 염종석 선수는 너무나 든든한 지원군이었을 것입니다.

 

 

 


거듭된 투구로 지친 염종석 선수에게 한국 시리즈는 힘겨운 싸움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활약이 다른 선수들의 잠을 깨웠습니다. 부진하던 받동희 선수가 투수들의 구심점이 되었고 윤형배라는 깜짝 선발도 나타났습니다. 팀 전체가 하나가 되는 팀 웍이 만들어졌습니다. 젊은 신인투수가 팀을 이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의 역할은 대단했습니다. 당시 최강의 전력이라던 빙그레는 롯데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힘없이 우승컵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화려하게 리그에 등장한 염종석 선수의 장래는 탄탄대로를 달릴 듯 했습니다. 이전과 달리 메스컴과 팬들의 관심은 커져만 갔습니다. 하지만 염종석 선수의 전성기는 거기까지 였습니다, 그 다음 시즌 10승으로 추춤했던 염종석 선수는 이후 성적으 급격한 하락세를 보였습니다. 부상과의 길고긴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신인 때 부터 그의 팔은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부상을 안고 투혼을 발휘한 것이었습니다. 초인적인 힘으로 1년의 화려함을 만들었지만 이후 그 화려함을 볼 수 없었습니다.


 
길고긴 재활과 거듭된 수술, 그는 재활이 끝나면 어김없이 마운드에 오르는 열정을 보였습니다. 언젠가 수술 자국이 가득한 그의 어때 사진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남들은 한번도 어렵다는 재활과정을 수 없이 반복한 그는 롯데의 암흑기에도 끝임없이 마운드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다시 부상으로 인한 재활이 이어집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그의 구위는 점점 떨어졌고 예전의 강속구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힘으로 윽박스르던 염종석은 사라지고 변화구에 의존하는 기교파 염종석 선수가 마운드에 올랐습니다.



단 1년, 짧은 기간 이룬 성과가 너무나 화려함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일까요? 팬들은 이런 그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기 보다는 이전 보다 더 큰 성원을 보냈습니다. 부실한 타선과 구원진의 그의 승리를 날려버릴 때 염종석 선수보다 더 안타까워 했습니다. 그에게 있어 화려함이라는 수식어는 사라졌지만 꾸준함이 그를 대표하는 표현이 되었습니다. 2008년 시즌까지 그는 롯데 선발의 한 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이루고싶어했던 100승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선수생활을 접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신진 투수들의 성장과 함께 그의 선발 자리는 위태로워졌고 조기 강판 당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새롭게 불펜진에 합류하기도 했지만 그에게 맞지 않는 옷이었습니다.

 
결국 2009년 시즌을 앞두고 염종석 선수는 선수생활 은퇴를 선언합니다. 다른 팀의 러브콜이 있었지만 개인적 아쉬움을 뒤로하고 지도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영원 롯데 자이언츠 선수가 된 것이지요. 올 시즌 코치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부상재활의 고통을 잘 알고 있는 그이기에 비슷한 상황의 선수들에게 그만의 노하우를 전수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랜 선수생활 경험이 있는 염종석 코치의 합류는 팀에 여러모로 도움이 될 듯 합니다.



그도 잠시동안 아주 밝게 빛나다 사라지는 스타보다는 오랜 기간 빛을 발할 수 있는 선수들을 키우고 싶지 않을까요? 롯데 자이언츠의 레전드가 유능한 코치로 또 한번 성공하길 기대해봅니다.


Posted by 지후니 지후니74 트랙백 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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