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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시즌 우리 프로야구는 큰 변화를 맞이한다. 제9구단이 참가하면서 기존 8개 구단 체제에 큰 변화가 생겼다. 제10구단 창단도 가시권에 들어왔다. 수십 년간 노후화 문제를 지적받던 야구장도 새롭게 지어지고 단장되고 있다. 최고 인기스포츠가 된 프로야구의 인기는 올해도 여전할 것으로 보인다. 프로야구의 새로운 중흥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젠 프로야구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할 때가 되었다. 출범한 지 30년이 넘는 시점에 미국 프로야구의 명예의 전당과 같은 과거를 추억하고 가치 있는 기록들과 사료들을 더 많은 이들과 더 오랜기간 공유할 수 있는 공간 마련도 필요한 시점이다. 과거가 없는 현재가 없고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과거 우리 프로야구를 풍미했던 선수들을 추억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 첫 번째로 80년대 중반과 90년대 초반 롯데의 에이스로 활약했던 윤학길과의 과거 여행을 하려 한다. 윤학길은 지난해 롯데의 2군 감독을 지냈고 선수 은퇴 후에도 여러 팀에서 코치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철저한 자기관리로 오랜 기간 선수로 활동한 윤학길은 지금은 보기 드문 선발 완투형 투수의 전형이었다. 그가 나서는 경기는 그가 책임지는 것이 당연했을 정도였다.


윤학길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프로야구는 성장기에 있었다. 하지만 많은 것이 부족했다. 시설도 그랬고 선수도 그랬다. 특히 투수 부분은 그 층이 엷었다. 당연히 에이스급 투수들의 혹사가 당연시 되던 시절이었다. 과거 최동원이 한국시리즈 7경기에서 4차례 완투, 1차례 구원등판으로 홀로 4승 1패를 하며 우승을 이끌었을 때에도 그의 투혼을 얘기하는 이는 많았지만, 혹사 문제를 지적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그만큼 초창기 프로야구는 선수보호라던가 과학적인 선수 육성, 관리 개념이 크게 대두하지 않았었다. 1987년 시즌 처음 프로에 입문한 윤학길은 입단 당시부터 될성부른 나무였다. 큰 키에서 내리꽂는 위력적인 직구와 낙차 큰 변화구, 제구력까지 겸비한 선발 요원은 당장 롯데의 에이스로 자리 잡았다. 팀의 레전드 최동원이 팀을 떠난 상화에서 윤학길은 롯데 NO. 1 투수였다. 


하지만 이런 위치는 그에게 초인적인 등판을 강요하는 굴레였다. 윤학길은 전성기 시절,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이닝과 경기를 소화했다. 당시 롯데는 윤학길이 등판하는 경기는 그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식이었다. 장마철 경기가 순연되면 윤학길을 장맛비와 함께 로테이션을 맞추곤 했다. 윤학길, 비, 비, 비, 윤학길 이런 식이었다. 그럼에도 윤학길은 묵묵히 마운드에 올랐다. 


1986년 롯데에 입단한 윤학길은 1987년 시즌 13승 10패 방어율 2.57로 팀의 주력 선발투수로 자리를 잡았다. 이후 윤학길은 3승 12패로 부진했던 1990시즌을 제외하고 1993시즌까지 매 년 200이닝이 넘는 투구를 했다. 초인적이라는 표현이 딱 맞았다. 선발, 중간, 마무리의 구분이 없던 시절, 윤학길은 팀에 꼭 필요한 선발투수 그 이상의 존재였다.

 

리그 정상급의 선발 투수였지만, 그에게 최고라는 수식어는 붙지 않았다. 어느 순간 그에게 붙여진 별명은 고독한 황태자였다. 윤학길은 등판하는 경기에서 불펜진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전통적으로 불펜이 약했던 롯데 마운드 사정은 윤학길에 대한 의존도를 높였다. 무리한 등판은 필연이었다. 그 과정에서도 윤학길은 매 년 호성적으로 팀의 기대에 부응했다.

 

그럼에도 윤학길은 당 시대를 풍미하던 스타에 밀려 대관식을 올릴 수 없었다. 막강 해태 시대를 이끌던 선동렬은 윤학길이 넘기 어려운 벽이었다. 여기에 롯데 하면 떠올리는 이름 최동원의 존재 또한 윤학길에 무거운 짐이었다. 윤학길이 전성기를 보내던 시절 최동원은 팀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족적은 남아있었다. 롯데 팬들은 최동원을 대신할 에이스를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윤학길은 영원한 2인자였다.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고 온화한 성격은 그를 팬들에 어필하지 못하는 요인이기도 했다. 윤학길은 30살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흐르는 세월을 극복할 수 없었다. 1997시즌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무리한 윤학길은 통산 방어율 3.33, 117승 94패의 성적을 남겼다. 그중에서 완투 경기는 무려 100경기였고 완봉승은 20차례가 있었다. 

 

특히 100완투 경기 기록은 경이롭기까지 한 기록이다. 지금의 프로야구라면 나오긴 힘든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 통산 완투경기 기록만으로 윤학길은 리그를 대표하는 투수로 손색이 없다. 우리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이 생긴다면 가장 먼저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선수 중 하나다. 이렇게 윤학길은 당대 최고 투수들에 가려진 비운의 영웅이기도 했지만, 의미가 큰 기록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윤학길은 롯데의 중흥기, 암흑기를 관통하던 시절 팀을 대표하는 선수이기도 했다. 윤학길은 1992년 롯데의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이었다. 당시 롯데 마운드의 중심은 윤학길, 고졸 신인으로 돌풍을 일으켰던 염종석, 수퍼 베이비라 불리었던 박동희 세 명이었다. 이들은 준PO부터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팀 마운드를 이끌었다. 스포트라이트는 염종석과 박동희가 더 많이 받았지만, 윤학길은 팀의 리더로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팀에 기여했다. 

 

 

 

 

 

 

이후 윤학길은 롯데의 암흑기 때에는 나 홀로 고군분투하기도 했다. 그가 은퇴한 이후 롯데는 더 깊은 침체기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윤학길은 롯데의 팀 역사와 함께했던 투수였다. 그는 고톡한 황태자로 불리었지만, 최소한 롯데 팬들에게 윤학길은 고독하지 않는 황태자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선수였다. 

 

선수생활을 마감한 윤학길은 이후 여러 프로팀에서 투수코치로 활동하면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갔다. 지도자로서 윤학길은 그 길이 순탄치 않았다. 한 팀에 정착하지 못하는 것이 코치들의 숙명이지만 윤학길은 여러 팀을 전전했다. 지난 시즌에는 롯데 2군 감독을 역임하기도 했지만, 재계약에 실패하면서 야인으로 돌아간 상황이다. 하지만 그의 풍부한 경험과 노하우라면 언제든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윤학길은 프로야구 태동기에 그리고 발전기를 함께 한 선수였다. 투수들의 혹사가 절정에 이른 시절을 보냈고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해냈다. 그가 선수생활을 접은 이후 프로야구는 투수운영의 분업 체계가 더 확실하게 자리 잡았고 체계적인 팀 운영에 눈을 떴다. 이런 과도기를 견뎌내며 쌓아온 그의 기록은 상당한 가치를 지닌다.

 

선수생활을 하는 동안 사람들은 그가 고독했다고 하지만, 프로야구 역사에서 윤학길은 리그를 대표하는 투수 그 이상의 존재였다. 앞으로 지도자로서 그가 어떤 모습을 계속 보여줄지 주목된다. 

 

Gimpoman/심종열 (http://gimpoman.tistory.com/, http://www.facebook.com/gimpoman)

사진 : 롯데 자이언츠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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