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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스포츠 선수든 멋진 선수생활의 마무리를 꿈꾼다. 프로선수들에게는 더 큰 희망이기도 하다. 프로야구도 예외는 아니다. 화려한 은퇴식과 함께 오랜 기간 팬들에 기억되는 선수가 되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일이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명예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선수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좋은 성적을 꾸준히 올려야 하고 선수생활을 오래 이어가야 한다. 그러면서 의미 있는 기록들도 남겨야 한다. 야구를 오래 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 팀 2군까지 50명 안팎의 선수가 해마다 경쟁하는 프로야구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꾸준한 자기관리와 노력이 함께해야 한다. 여기에 소속팀의 좋은 성적이 더 해저야 비로소 그 선수는 레전드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다.

 

최근 들어 레전드라 불리던 선수들의 은퇴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대부분 선수는 선수생활을 더 이어가고 싶어하지만, 여러 요인으로 그 뜻을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성기에서 멀어진 베테랑 선수에게 고액 연봉을 지급하기 어려운 구단의 사정, 젊은 선수들을 키워 구단의 선수자원을 확충하고 단단한 전력을 만들어야 하는 현실적인 요인들이 겹치면서 레전드들은 자의 반 타의 반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

 

야구팬들로서는 아쉬운 일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를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떠나보내야 하는 현실은 마음 한구석을 허전하게 한다. 레전드들에 대한 구단들의 야박한 처사가 반발을 사기도 한다. 이번에 은퇴를 선언한 박재홍도 이와 다르지 않다. 소속팀 SK의 코치연수 제의를 뿌리치고 선수생활 연장을 꿈꾸던 박재홍은 소속팀을 찾지 못했다. 결국, 그는 새로운 길을 선택했다.

 

 

 

 

 

 

박재홍은 프로입단 직후부터 천부적인 야구 재능을 바탕으로 리그 정상급 타자로 자리했다. 리틀쿠바라는 별명은 그가 정말 야구를 잘하는 선수였기에 붙일 수 있었다. 아마시절부터 대표팀의 중심 선수였던 박재홍은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아 프로에 입단했다. 입단 첫해인 1996년 30홈런 36도루를 기록하며 프로야구 첫 30-30클럽에 가입하며 신인 돌풍을 일으킨 박재홍은 승승장구했다.

 

그의 소속팀 현대는 당대 최강팀이었고 박재홍은 수차례 현대 우승의 주역이었다. 2002년까지 두 차례 더 30-30클럽을 달성할 정도로 박재홍은 힘과 기술, 스피드를 겸비한 타자로 타격 각부분 상위권을 점했다. 이렇게 리그 정상급 타자로서 순항하던 박재홍이었지만, 트레이드로 새롭게 둥지를 튼 고향팀 KIA에서의 2년은 그의 행보를 주춤거리게 하였다.

 

박재홍은 팀과 융화되지 못했고 부상이 겹치면서 경기 출전수도 줄어들었다. 코칭스탭과의 불화설도 터져 나왔다. KIA에서 2년간 박재홍은 침체기에 빠졌다. 이런 박재홍을 두고 이기적이라는 비판도 따라왔다. 2004시즌 박재홍은 73경기에만 나설 수 있었고 타율은 0.259로 추락했다. 팀 전력구상에서도 멀어졌다. 그의 부진은 실력저하라기보다는 정신적인 면이 더 강했다.

 

박재홍에게 SK행은 새로운 전성기를 여는 기회였다. 박재홍은 2005시즌 트레이드로 SK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 전성기를 연 인천으로 다시 돌아온 박재홍은 베테랑 선수로 무적 SK를 뒷받침했다. 현대시절의 폭발력은 줄었지만, 마음의 부담을 던 박재홍은 공격 각 부분에서 꾸준한 성적을 올렸다. 어느 타순에서도 박재홍은 제 몫을 다했고 보이지 않게 SK에 큰 힘이 되었다.

 

SK에서 박재홍은 프랜차이즈스타 그 이상의 존재였다. 그가 쌓아간 통산 기록은 그 자체로 큰 가치고 이었다. 30-30클럽의 사나이 박재홍은 300-300클럽에 도전할 수 있는 선수였다. 그의 꾸준함은 그 가능성을 높였다. 어느 순간 SK의 관중석벽 한 편은 박재홍이 쌓아가는 통산기록으로 장식되었다.

 

하지만 박재홍 역시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했다. 박재홍은 2008시즌을 기점으로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다. 잔 부상도 찾아왔다. 경기 출전 수가 급격히 줄었다. 젊고 재능있는 선수들의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박재홍은 백업으로 대타로 그 위상이 떨어졌다. 2012시즌 박재홍은 46경기 출전에 그쳤고 대타 출전이 대부분이었다. 통신 기록을 쌓아갈 기회가 없었다.

 

그 와중에 박재홍은 300홈런을 기록하며 300-300클럽의 한 부분을 채웠다. 경기 출전 수가 많고 많이 뛰어야 하는 도루는 채울 수 없었다.   박재홍은 2012시즌 300홈런 267도루를 기록했다. 박재홍은 300-300이라는 큰 목표를 위해 더 뛰고 싶었지만, 그의 의지는 실현되지 못했다. 박재홍은 SK를 떠나서라도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싶었지만, 선수협회장이라는 신분이 걸림돌이었다.

 

박재홍은 선수협회장을 포기할 수 없었다. 자리에 연연하기 보다는 마지막 자존심을 버릴 수 없는 그였다. 박재홍은 비리사건으로 흔들리던 선수협 회장을 맡아 짧은 기간 내에 선수협을 안정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기적이라는 세간의 비판을 무색하게 할 만큼 박재홍은 선수협 회장으로 결단력과 추진력을 보여주었다. 선수협의 다시 안정을 찾았고 제10구단 창단과정에서 단합된 힘으로 기존 구단들의 10구단 창단 반대 움직임에 맞서기도 했다.

 

회장으로서 박재홍의 역할이 크게 작용한 결과였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박재홍의 위치는 그를 영입하려는 구단들을 망설이게 했다. 박재홍은 몸만 건강하다면 1~2년 대타 요원으로 가치가 있는 선수였다. 베테랑으로 젊은 선수들에 보이지 않게 기여할수도 있었다. 이렇게 가치를 인정받은 그였지만, 그 어느 구단에서도 박재홍은 부름을 받지 못했다.

 

 

 

 

 

 

박재홍은 은퇴 기자회견에서 잠시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수십 년간 이어온 선수생활을 이대로 끝내야 하는 것이 그에게 큰 슬픔일 수 있었다. 하지만 박재홍이 떠나는 자리는 슬픔으로 가득한 것은 아니었다. 박재홍은 선수협 비리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전 선수협 회장 손민한에게 사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의 은퇴회견장에서 손민한은 야구팬들과 선수들에게 사과할 수 있었다. 손민한은 선수협 비리로 사면초가에 놓여있었다. 부상 재활의 의지도 꺾인 상황이었다. 박재홍 역시 최근 손민한의 복귀 움직임에 강한 비판을 한 적이 있었다. 이런 박재홍이 떠나가면서 후배를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박재홍은 자신은 떠나지만, 재기를 위해 마지막 힘을 쏟고 있는 손민한에 마지막 기회를 주고 싶다고 했다. 이것이 손민한이 면죄부를 받게할 수는 없지만, 사과의 진실성을 의심받던 그로서는 최소한 공개적으로 사죄할 수 있는 자리는 찾을 수 있었다. 박재홍은 선수생활을 접는 마지막 순간까지 선수협회장이었고 대인배였다. 그에 대한 이기적 선수라는 편결을 선수협 회장을 하면서 그리고 선수로서 마지막 순간 확실하게 씻어냈다.

 

박재홍은 이제 야구해설가로 제2의 인생을 설계하고 있다. 전 소속팀 SK는 은퇴제안을 뿌리치고 결별했던 박쟁홍에게 성대한 은퇴식을 약속했다. 이렇게 레전드는 떠나지만, 그는 당당했고 그 뒷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가 남긴 발자취는 1990년대 2000년대를 관통한 우리 프로야구의 역사와 함께했다. 야구 명예의 전당이 생긴다면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1순위 선수라 할 수 있다.

 

선수로서 그 마지막까지 빛났던 박재홍이 또 다른 분야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지 해설가로서 지도자로서 그가 보여줄 모습이 기대된다.

 

Gimpoman/심종열 (http://gimpoman.tistory.com/, http://www.facebook.com/gimpoman)

사진 : SK 와이번스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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