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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한계 뛰어넘었던 투수 장명부, 짧지만 강렬했던 4년

스포츠/야구 그리고 추억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13. 2. 22.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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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시작된 우리 프로야구는 정치적 목적에 따라 급하게 리그가 만들어졌다. 그 덕분에 프로야구에 맞는 시스템과 인프라 구축의 시간이 없었다. 선수들을 비롯한 여타구성원들 역시 프로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히 시행착오가 많았고 문제점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무엇보다 장기 레이스를 치르는 데 필요한 선수가 절대 부족했다.

 

이런 선수부족 현상을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이들이 재일교포 선수였다. 그 당시 일본프로야구에서 활약했던 우리 국적의 선수들은 한 차원 높은 야구를 하는 선수들로 각 팀의 중심선수로 활약했다. 대부분 전성기를 지난 선수들이었지만, 초기 우리 프로야구에서 그들의 기량은 분명 한 수 위였고 프로야구의 경기력을 높여주었다.  

 

이 중에서 원년에 창단했지만 단명한 팀이었던 삼미의 에이스 투수로 활약했던 장명부는 가장 인상적인 활약을 한 선수 중 한 명이었다. 장명부가 우리 프로야구에서 뛴 것은 4년에 불과했지만, 그가 남긴 조적은 엄청났다. 장명부는 4시즌을 치르면서 무려 172경기에 등판했다. 55승 79패 방어율 3.55의 성적을 남겼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장명부는 64경기를 완투했다. 이 안에는 7번의 완봉 경기도 있었다. 4년간 그가 던진 총 이닝 수는 1,043.1이닝 이었다. 1년 평균 250이닝이 넘는 수치였다. 최근 우리 프로야구에서 에이스 투수가 200이닝을 넘지 못함을 고려하면 엄청난 이닝이었다. 당시 주전 투수들의 혹사가 보편적이었다고 하지만 장명부는 선발과 구원을 가리지 않고 무리한 등판을 강행했다. 

 

 

 

 

 

 

장명부의 초인적인 기록은 1983시즌 삼미의 돌풍과 함께 도드라졌다. 프로 원년이 1982시즌 최하위를 한 삼미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뛴 장명부를 내세워 상위권 진출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1983시즌 장명부는 427.1이닝을 던지면서 30승 16패 6세이브 방어율 2.34의 성적을 남겼다. 사실상 장명부 홀로 팀 마운드를 책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장명부는 빠른 공을 가진 투수가 아니었지만, 구석구석을 찌르는 제구와 빼어난 수 읽기 능력으로 타자들을 농락했다. 어느새 그에게는 너구라는 또 다른 별명이 생겼다. 표정 변화가 없는 어찌 보면 능글맞기까지 한 그의 투구는 타자들의 혼란시키기에 충분했다. 일설에는 장명부가 막대한 성적 인센티브를 받기 위해 무리한 등판을 자청했다는 말이 있었지만, 그 동기가 어찌 되었건 장명부의 투구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투구였다.

 

하지만 이러한 장명부의 고군분투에도 삼미는 전.후기 리그로 운영되던 1983년 정규리그 우승의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당시 강팀의 위용을 뽐내기 시작한 해태라는 벽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삼미는 전기리그에 올인했지만, 해태와의 마지막 연전에 연패를 당하면서 다 잡은 우승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장명부는 우승을 확정 짓기 위해 연속 등판했지만, 해태의 기세를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전기리그에 너무 많은 힘을 쏟은 탓인지 삼미는 후기리그에서 하위권으로 쳐지고 말았다. 이는 장명부도 마찬가지였다. 패배를 모르던 그였지만 후반기 그는 패 수를 더 많이 쌓아갔다. 무리한 등판의 후유증이 나타났고 장명부의 구질에 대한 타자들의 적응력도 높아진 탓이었다. 우리 프로야구서 보여준 장명부의 짧았던 전성기도 서서히 저물어 갔다.

 

그다음 해부터 장명부는 급격한 내림세를 타기 시작했다. 여전히 많은 이닝을 소화했지만, 1983시즌 30승을 올렸던 투수가 아니었다. 한 때 반짝한 이후 약체팀으로 돌아선 팀 분위기와 맞물리면서 장명부는 승보다 패를 더 많이 쌓아갔다. 1984시즌 13승 20패, 1985시즌 11승 25패를 기록한 장명부는 해마다 구단과 연봉 갈등을 빚으며 미운털이 박혔고 삼미에서 청보로 간판을 바꾼 팀에서 방출되고 말았다.

 

이후 신생팀 빙그레에서 재기를 모색했지만, 그의 투구는 더는 통하지 않았다. 타자들 눈에 익은 그의 투구는 위력적이지 않았다. 장명부는 1986시즌 빙그레에서 1승 18패 방어율 4.98의 저조한 성적을 끝으로 조용히 한국에서의 선수생활을 접어야 했다. 재일교포 투수로서 큰 돌풍을 일으켰던 그였지만, 지나친 혹사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너무 일찍 선수생활을 접고 말았다.

 

이후 장명부는 한때 롯데에서 투수코치로 활약하기도 했지만,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급기야 1991년 마약사건에 연루되면서 우리 프로야구와 인연을 더 이어가지 못했다. 이후 장명부는 야인으로 야구와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 사업가로 일본에서 또 다른 삶은 살던 장명부는 2005년 자신의 운영하는 사업장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야구 선수로서 풍운아였고 우리 프로야구에 큰 족적을 남긴 그였지만, 생애 마지막 순간은 너무나 쓸쓸했다. 

 

장명부의 시즌 30승은 사실 말도 안 되는 기록이었다. 프로 원년 프로야구가 정착되지 않은 시기 기형적인 선수 운영이 만들어낸 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프로야구가 아무리 발전해도 1982시즌 백인천이 기록한 4할 타율과 함께 깨기 가장 어려운 기록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장명부는 역사에 남을 기록을 남기긴 했지만, 이는 선수생명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덕분에 그의 전성기는 너무 짧게 끝났다.

 

최근 프로야구의 마운드 운영은 철저한 분업 체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선발 완투형의 투수를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장명부는 선발 완투형의 그 이상의 투수로 에이스 투수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보여준 투수였다. 거기에 프로야구가 정착되지 못한 과정에서 나온 슬픈 자화상을 상징하는 선수이기도 하다.

 

비록 그가 좋지 못한 사건으로 우리 프로야구와의 인연을 끝내긴 했지만, 그가 역사에 남을 기록을 남겼다는 점이고 프로야구를 정착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만큼 장명부가 우리 프로야구에서 활약한 4년은 짧지만 강렬했다. 프로야구 원년 팬들에게 장명부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초인, 그리고 영원히 깨지지 않을 기록이 될 가능성이 높은 30승 투수이자 레전드임에 틀림없다.

 

Gimpoman/심종열 (http://gimpoman.tistory.com/, http://www.facebook.com/gimpoman)



다음 메인에 선정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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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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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2.22 11:57 신고
    장명부가 30승이나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장명부의 뛰어난 실력도 있었겠지만
    그 당시 한국야구 수준이 정말 초보단계였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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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2.22 12:19
    오늘도 즐겁고 승리하는 하루 되세요.
    그냥 인사만 내려 놓고 갑니다. 야구는 아무리 봐도... 들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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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2.22 16:05
    장명부 이닝이팅, 연투 능력은 일본에서는 김일융보다 아래.
    한국에서는 투구폼 장난질로 재미를 볼 수 있었을 뿐입니다.

    장명부에 대한 평가는 이글을 먼저 보셨으면 달라졌을 겁니다.
    http://gminhee.egloos.com/2292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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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2.22 20:58
    당시 30승에 1억의 인센티브가 걸렸는데 설마 했던 구단측은 진짜로 30승을 하자 약속이행을 안 했고, 배반감으로 상실감이 컸던 장명부는 그이후 급락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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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2.22 21:13 신고
    ㅎㅎ 야구블로거이시군요 저는 축구블로그를 운영한지 한달도 안된 블로거 초짜라고 할수있겠네요.ㅋ
    같은 스포츠 블로그로서 앞으로 많이 배워갈수있을거같습니다. 다음뷰 구독하고 자주들리겠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