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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가 자신했던 임진강 전투는 조선군의 허무한 패배였다. 애초 조선군은 일본군의 도강을 막고 호남에서 한양으로 향하는 증원군과 합세해 위 아래에서 일본군을 협공하려 했지만, 임진강 방어선을 책임진 장수 한웅인의 잘못된 판단이 전략에 혼선을 가져왔다. 그는 의욕이 넘치는 장수였지만, 상황을 읽는 눈이 밝지 않았다. 



이는 선조가 도원수 김명원을 제치고 그보다 몇 단계 지위가 낮은 한웅인에게 지휘권을 넘긴 것에서 그 원인이 있었다. 한양 수성전에 실패한 김명원을 신뢰하지 않은 선조는 패기 넘치는 장수 한웅인을 등용했지만, 지휘 체계를 흔드는 일이었다. 류성룡 역시 이런 선조의 결정에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선조는 이를 무시했다. 선조는 전쟁 발발 이후 파천을 거듭하며 떨어진 자신의 위상을 되찾기 위해 직접 임진강 전투를 챙겼고 무리수를 둔 셈이었다. 



일본군은 도강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유인책으로 조선군을 흔들었고 이에 말려든 조선군은 스스로 유리한 입지를 버리고 도강을 감행하는 우를 범했다. 1만 3천의 조선군은 궤멸되고 임진강 방어선을 쉽게 허물어졌다. 이는 일본군이 선조가 조정이 파천한 평양성으로 직접 공격을 의미하는 일이었다. 










선조는 물론이고 조정 역시 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전장의 판세를 파악하고 지위할 수 있는 컨트롤타워 부재에 따른 패전이었다. 선조는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지 않았고 조정은 패전의 책임을 논하기에 급급했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 방법이 필요했다. 관직에서 파직당한 류성룡의 재 등용 가능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선조는 과거 자신이 관직에서 배제했던 서인 세력들을 다시 중용하며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데 치중했다. 류성룡에 대한 반감을 선조는 버리지 않았다. 류성룡은 나름의 방법은 전쟁 상황을 파악하고 대책 마련에 부심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선조와 류성룡의 불편한 관계는 일본군의 평양성 진군을 눈앞에 둔 시점에도 계속됐다. 



선조가 평양성을 떠나 북쪽으로 또 다른 파천을 고려하는 시점에 전쟁 상황을 바꿀 두 가지 변수가 발생했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의 항전이 그것이었다. 이순신의 함대는 남해안의 요충지를 장악하고 있는 일본 수군을 격퇴하며 재해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곽재우의 의병은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하며 그 세력을 넓혀나갔다. 



조선이 바다와 육지에서 희망을 발견했다면 이는 일본군에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조선 내륙 깊숙이 진출한 일본군의 보급선을 흔드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보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일본군으로서는 큰 부담이었다. 일본군이 더 서둘러 북상을 시도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일본군으로서는 무리한 작전이 불가피했다. 승승장구하고 있던 일본군으로서는 생각지 못한 변수가 발생한 셈이었고 패전에 한숨짓던 조선에는 반격의 실마리을 찾은 셈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희망적 요소를 전쟁 상황 반전으로 이끌 리더십이었다. 선조는 이미 해안을 잃은지 오래였고 조정 역시 붕당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강력하면서도 냉철한 지도자가 필요했다. 류성룡이 다시 등용될 수 있는 시점이었지만, 선조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 류성룡의 재 등용을 망설이고 있다. 과연 류성룡이 언제쯤 등용돼 그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사진, 글 : 심종열 (http://blog.naver.com/youlsim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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