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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조선 정조 개혁의 하이라이트, 수원 화성 행차

문화/역사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17. 6. 9.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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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부흥기를 이끌었던 정조, 그에 대해 현대의 평가는 개혁군주였다는 점이다. 정조는 재위 기간 정치, 사회적으로 조선의 부흥을 이끌었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 발전해 다양한 정치 세력의 공존을 모색했다. 그 과정에서 같은 양반이면서도 관직 등용에서 철저히 배격됐던 서얼, 후처 소생의 자녀들에게 기회를 부여했다.

또한 정조는 소수 기득권층만을 위한 정치가 아닌 일반 백성들을 삶에도 관심을 가지는 민생정치를 추구했다. 정조는 노예제도 개선에도 힘썼고 지방의 토착 비리 근절에서 관심을 기울였다. 대규모 토목공사를 실시함에 있어 부역에 나서는 이들에게 일정 보수를 지급했고 농업 외에 상공업 발전을 위한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실학자들도 권력의 중심에서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다. 최고 지도자의 이런 움직임은 조선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부흥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조는 어린 나이 때부터 치열한 권력 암투에 노출되어 생사의 고비를 넘겨야 했다.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권력 투쟁에 밀려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그는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정조는 영조에 의해 세손이 되고 대리청정을 하기도 했지만, 끊임없이 반대 세력에 견제와 감시를 당하고 살해 위협을 이겨내야 했다.






정조는 이런 위험을 이겨내기 위해 스스로 무예를 익히고 다방면에 지식을 쌓았다. 그러면서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아들을 죽음으로 내몬 영조 역시 정조를 끊임없이 시험하고 견제했지만, 결과적으로 후계자로서 그의 자리를 지켜줬다. 사도세자가 죽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노론 강경파들이 조정의 중요 자리를 차지한 현실에서 영조의 후원이 없었다면 정조는 진작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노론 강경파는 정조가 집권할 경우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히 그의 왕위 계승을 막아야 했다. 그럴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정조를 죄인의 아들이라 칭하며 정통성을 흔들었다. 하지만 정조는 어려서부터 터득한 정치권력의 속성을 이해하고 이런 공격을 피해 가는 정치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마침내 긴 기다림 끝에 왕위에 올랐다.


물론, 그것으로 정조가 정치적 입지를 다진 건 아니었다. 그에 대한 암살 위협은 계속됐고 관직의 상당수는 반대파들로 채워져있었다. 정조는 이를 정면으로 돌파했다. 과감한 정책을 추진함과 동시에 노론 세력에 맞설 학문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규장각을 설치하는 하면 왕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해 군사적인 힘을 키웠다. 그는 10년이 넘는 시간 노론 강경파와 끊임없이 대결하며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졌다. 그리고 집권 19년이 되는 1795년 그는 조선시대 최고의 이벤트를 마련하며 왕권의 위엄을 보였다.

그해 2월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이유로 대규모 행사를 추진했다. 그것은 수도 한양에서 지금의 수원에 건립한 화성 행차를 실행에 옮겼다. 정조의 수원 화성 행차는 수천 명의 인원이 동원되는 대규모 행사였다. 그 행차의 과정에서 한강을 도하하는 대형 프로젝트도 함께 했다. 정조는 이 행사 진행의 준비와 과정을 모두 기록으로 남기도록 했다. 그리고 그 기록인 "원행을묘의궤"는 최고 문화유산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만큼 그 안에 기록은 상세했고 시대적 상황을 잘 반영했다.


정조가 수원 화성 행차에 공을 들인 데는 이유가 이었다. 화성은 정조에 있어 정치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 그곳에는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이 있었고 당시 최고 기술을 집약한 화성과 더불어 왕위 친위 부대 장용영이 주둔하고 있었다. 정조는 이 이벤트를 통해 그에게 반대하는 세력에 일종의 무력시위를 했다.


그곳에서 정조는 장용영 부대 1만 3천 명이 모두 동원되는 대규모 군사훈련을 통해 장용영의 군세를 만천하에 보였다. 당시 화성에는 일반 국민들보다 장용영 부대원들이 더 많았을 정도로 정조를 위해 건립된 성이었고 그의 권력을 지탱하는 군사적 기반이었다. 이런 장용영 부대의 위력을 실감한 반대 세력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조는 이를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포용의 정치를 위한 방편으로 삼았다. 정조는 8일간의 화성 행차 마지막에 대규모 연회를 베풀며 행사에 참여야 한 모든 이들을 위로했다. 반대파 세력들도 차별이 없었다. 그는 연회를 일종의 화합의 장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통합의 정치를 위한 계기를 마련했다. 힘 있는 왕이 추진하는 통합의 정치는 명분도 있었고 반대할 명분도 없었다. 화성 행차가 끝난 후 정조는 반대파들도 관직에 등용하며 통합의 정치를 실현했다.

정조로서는 8일간의 화성 행차를 통해 아버지 사도세자의 죄인 낙인을 지워내고 왕실의 정통성을 굳건히 했고 그의 권력적 기반을 공고히 했다. 아울러 행사 과정을 일반 국민들이 자유롭게 볼 수 있게 하면서 모든 이들이 함께 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그는 사회적 통합을 이루도록 했다. 화성 행차는 그의 개혁 정치에 있어 하이라이트였다. 이런 사회통합의 기운을 발전의 에너지로 변환시킬 수 있다면 조선은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화성 행차가 있은지 5년 후인 1800년, 정조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아직 젊은 나이였고 세자의 나이는 10살이 체 되지 않았다. 후계 구도를 제대로 정립할 시간도 없었다. 그의 사후 왕위에 오른 순조는 정치적으로 아무런 힘이 없었다. 보수적인 집권 세력은 정조가 추진하던 개혁 정책과 그 성과물들은 대부분 폐기했다.

정조시대 활발하게 활동하던 실학자들 역시 숙청당했다. 신흥 종교였던 천주교 역시 극심한 박해를 받아야 했다. 보수 반동의 움직임 속에 조선은 부흥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조선의 정치 역시 일부 외척들이 정치를 주도하는 세도정치로 변질되면서 정치 세력가 견제와 토론의 문화는 모두 사라졌다. 물론, 정조의 개혁이 왕권 강화에만 초점이 맞추어지고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굴레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 성리학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개혁이었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조선 부흥의 가능성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우리 역사에서도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결국, 정조의 수원 화성 행차는 그의 개혁뿐만 아니라 조선 부흥의 마지막 불꽃이 되고 말았다. 그만큼 정조의 수원 화성 행차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 대형 이벤트였다. 비록 그때의 불꽃이 오래가지 못했지만, 아직까지 그 기록들이 상세히 남아있어 정조의 개혁 정치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은 큰 의미가 있다 할 수 있다.


사진, 글 : 지후니(심종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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