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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내부 결정 과정을 거쳐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한 조선, 하지만 통신사에 대한 인식은 양국에 크게 달랐다. 조선은 교린을 핑계로 일본과 새 지도자 토요토미의 성향을 파악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일본에서는 조선과의 전면전을 피하려는 세력이 조선 통신사를 이용했다. 고니시와 대마도주는 조선 통신사를 토요토미에서 입조를 위한 사신으로 위장했다.

이들은 역관과 문서를 위조하는 방식으로 위기를 넘겼다. 조선 통신사 일행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일본 내부 세력에 이용당하며 소중한 시간만을 흘려보내야 했다. 그나마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상황 대체에 대한 방식이 엇갈리며 효율적인 대응을 하지 못 했다. 황윤길과 김성일은 토요토미와 일본의 위협에도 다른 시각을 가지며 앞으로 파란을 예고했다.

조선 통신사가 일본에 머무는 사이 조선의 정국도 급격하게 돌아갔다. 특히, 선조 이후 후계구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당시 선조는 중전에게서 아들을 두지 못 했다. 후궁을 통해 임해군과 광해군, 신성군 3 아들을 두었다. 자신의 방계 출신이라는 점에서 정통성에 콤플렉스가 있었던 선조는 쉽게 세자를 결정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정실부인을 통한 아들을 원했다.







더 큰 이유는 후계자를 결정할 경우 그가 추진하는 왕권 강화책이 흐트러질 수 있음을 염려했다. 만약 세자가 정해지면 권력 구도는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으로 나뉠 수 있고 이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서인은 생각이 달랐다. 그들은 선조가 그들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지 않자 자신들의 정책을 원할하게 추진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새로운 왕이 필요했다.


그들은 음밀히 세자 옹립을 논의했다. 서인의 중심이었던 정철과 윤두수는 왕자 중 능력과 인격이 출중했던 광해군을 옹립하기를 결정하고 반대파인 동인의 동의를 구하려 했다. 이들은 동인의 중심은 이산해, 류성용과의 회합을 추진해 극비리에 이를 논의하려 했다. 서인이 권력의 중심에 있었지만, 영의정과 우의정에 있는 이산해, 류성용이 함께 이를 추진해야 명분이 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서인의 움직임은 분명 선조의 의사에는 반하는 일이었다. 이는 또 한 번의 정치적 격변 가능성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선조는 이미 대신들의 의견의 끌려다니는 유약한 임금이 아니었다. 그는 그런 유약함 뒤에 치밀한 수 싸움과 날카로운 비수를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조는 언제든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되는 세력에 대해서는 숙청을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서인의 세자 책봉 움직임은 수많은 이들의 희생 위에 새워진 서인의 권력기반을 흔드는 자충수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런 정치적 이슈에 류성용은 어떤 대응을 할지, 일본을 다녀온 통신사들로 인해 파생될 사건들이 정국에 어떤 영향을 줄지가 임진왜란 발발은 2년도 채 안남은 시점에서 이야기의 중요한 줄기를 이룰 것으로 보인다.


사진, 글 : 지후니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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