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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본격화된 일본의 침략 야욕, 청일전쟁에서 을미사변까지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18. 10. 29.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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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192회와 193회에서는 일본의 조선 침탈이 본격화된 청일전쟁과 이어진 을미사변을 다뤘다. 청일전쟁을 1894년, 을미사변은 1895년 발생한 사건으로 조선에는 아프고 치욕적인 순간이었고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배권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었다. 

청일 전쟁의 발단은 그 해 일어난 동학 농민혁명이었다.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수탈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당시 서민층들에게 널리 퍼져있는 신흥 종교인 동학을 중심으로 봉기한 것이 동학 농민혁명이었다. 이들의 혁명은 지역민들의 호응을 얻었고 그 세력을 급속히 키웠다. 

조선 정부는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중앙군을 현지에 급파했지만, 동학혁명군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이에 위협을 느낀 조선 정부는 급기야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조선 정부로서는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고 이를 해결할 의지보다는 동학혁명군을 왕실과 기득권 권력자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여겼다. 하지만 외세를 통해 국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분명 잘못된 선택이었다. 

청나라군의 조선 진출은 예상치 못한 사태를 초래했다. 과거 일본과의 톈진 조약을 통해 청나라는 자신들의 조선 파병을 일본에 통보했고 일본은 이에 대응하여 일본군을 자국민 보호를 구실로 파병했다. 톈진조약은 파병을 통보하는 것이었지만, 일본은 이를 자신들의 파병 구실로 삼았다. 그 규모 역시 대규모였다. 결국, 조선의 영토를 청나라와 일본군의 군대에 대치하는 상황이 됐다. 






그 사이 조선 정부는 동학혁명군과 협상을 통해 평화적인 해법을 찾았고 동학 농민군의 세력이 강했던 지역은 집강소 설치를 통해 동학 농민군이 지역의 질서 유지 등을 담당하고 부정부패를 일소하는 조치가 시행되었다. 외국 군대의 파병 명분은 사라졌지만, 청나라군과 일본군은 철군하지 않고 대치를 지속했다. 

대치 국면에서 일본군은 조선의 왕궁인 경복궁을 기습하고 조선의 왕 고종을 사실상 연금하는 일을 벌였다. 일본의 기습에 조선 왕실은 대응하지 못했다. 왕궁을 장악한 일본은 친일 내각을 구성하고 조선의 내정에 간섭했다. 이에 더해 일본군은 청나라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하며 청일 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명분 없는 전쟁이었고 일본의 조선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침략 전쟁이었다. 

일본의 이런 행태는 동학 농민군을 자극했다. 외세 배격을 주장했던 동학 농민군은 일본의 침략행위에 맞서 다시 궐기했다. 일본은 청나라와 동학 농민군을 모두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동학 농민군의 저항을 압도적인 신식 무기를 앞세워 진압하면서 청나라와의 전쟁에 집중할 수 있었다. 

동학 농민군은 구국의 일념으로 일본군에 대항했지만, 신식 무기를 앞세운 일본군과 그들이 사실상 조정하는 조선군에게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대패한 이후 그 세력이 급격히 줄었다. 결국,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부가 검거되면서 저항의 동력을 잃고 말았다. 

동학 농민군을 제압한 일본군은 이후 청나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했고 중국 본토까지 위협했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청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했고 승리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내부 부정부패 등으로 기강이 해이해진 청나라군은 이런 일본군을 당해내지 못했다. 

결국, 청나라는 일본에 사실상의 항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과의 조약을 통해 산동반도를 일본에 내주고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잃고 말았다. 이후 그 쇠약함이 만 천하에 드러난 청나라는 서양 열강들의 침략에 더 시달리며 패망으로 가는 길을 걷고 말았다. 이로써 중국에 대한 길고 길었던 사대 관계를 종식되었지만, 이는 조선의 의지와 노력이 아닌 일본의 필요에 의한 것으로 조선에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청일 전쟁 승리로 기세가 오른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더 확대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의 세력 확장을 경계한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 일본의 전승국으로서의 환호는 오래갈 수 없었다. 동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하던 러시아를 중심으로 프랑스, 독일의 압력에 일본을 굴복했고 중국으로부터 넘겨받았던 산둥반도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이에 더해 조선에 대한 영향력 또한 흔들렸다. 이른바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 간선에 일본이 굴복하는 모습을 지켜본 조선은 외교를 통해 또 다른 강대국의 힘을 빌려 일본의 야욕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본격화했다. 그 시도는 미국을 우방국으로 한 친미파와 러시아를 우방으로 하려는 친러파로 구분되어 반일 전선을 형성토록 했다. 특히, 오늘날을 서울의 정동 지역을 중심으로 산재해있었던 서약 공사관 지역을 중심으로 조선의 인사들과 서양의 인사들이 힘을 규합한 정동구락부는 반일 외교의 구심점이었다. 

이런 조선 외교 정책의 중심에는 고종과 함게 명성황후가 있었다. 명성황후는 앙투아네트 손탁이라는 러시아 공사관 통역사를 밀사로 삼아 외교전을 전개해 일본의 영향력에서 조선을 벗어나게 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이 과정에서 손탁이라는 여성은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했다. 프랑스 출신으로 훗날 러시아로 이주에 러시아인이 된 손탁은 프랑스, 독일, 러시아서, 영어가 가능한 통역사로 러시아 공사관이 설립될 당시 파견되었고 조선어까지 익혀 조선 왕실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활발한 외교를 전개하기 위해 통역사가 절실했던 조선으로서는 손탁의 존재가 소중했다. 손탁은 서양의 문물을 전달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국제 정세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고 각국에 퍼져있는 외교 네트워크를 통해 조선과 서양 각국을 연결해주는 밀사이기도 했다. 이런 손탁의 중용은 그가 속한 러시아의 조선의 관계가 밀접해지는 계기가 됐다. 역사 저널 그날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을 추가로 알리며 당시 조선의 외교전을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조선의 이런 노력은 일본에 큰 위협이었다. 이미 3국 간섭으로 청. 일전쟁의 중요한 전리품인 산둥반도 일대를 다시 내준 일본으로서는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놓칠 수 없었다. 조선의 외교적 노력이 결실을 맺기 전 제동을 걸어야 했고 조선 외교전을 주도하던 명성황후의 제거까지 논의하게 됐다.

당시 을미사변은 일본의 사주를 받은 일본 낭인들이 저지른 만행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내면에는 일본 내각 상층부가 개입된 치밀한 계획이 전제되어 있었다. 그 정점에는 안중근 의사에 의해 사살된 일본 정치의 실력자,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승인하에 일본은 일본인이 경영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던 친일계 신문인 한성순보를 일종의 아지트로 삼아 명성황후 시해 계획을 준비했다. 을미사변의 주역들 중 상당수는 한성순보와 관계된 일본인들이었다. 






이들의 시행계획을 만들고 일본군과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조선 수비군, 그들의 만행을 은폐하기 위해 끌어들인 낭인 조직까지 갖춘 일본은 깊은 새벽 경복궁에 침입해 명성황후를 비참하게 살해했다. 그들은 고종과 세자를 완력으로 제압했고 명성황후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했다. 이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명서 황후의 시즌을 화장해 증거를 은폐하려는 시도까지 했다. 아울러 한성순보 등 신문 매체 등을 통해 을미사변이 대원군과 명성황후 간 권력 다툼에 의해 발생한 사건으로 사실을 왜곡하려 했다. 실제 일본은 을미사변 당일 대원군을 끌어들어 사건 경복궁으로 그를 데려오기까지 했다. 

이런 시도에도 일본의 만행은 당시 경복궁에 머물고 있었던 외국인들에게 목격되었고 그들의 증언과 기록에 의해 국제사회에 알려졌다. 이 사실은 조선의 백성들에게도 전해졌고 엄청난 공분을 불러왔다. 이는 항일 의병운동을 다시 촉진시키는 계기가 됐다. 일본은 악화된 국내외 여론을 잠재우고자 범행을 주도한 일본 공사 등을 체포하는 모습도 보였지만, 어디까지나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이후 왕비를 잃은 고종은 사실상 궁궐에 연금된 것과 같은 상태에 놓였다. 중요한 정치적 동반자를 잃은 것과 동시에 고종은 다시 친일 인사로 채워진 궁궐에서 아무도 의지할 곳 없는 처지가 됐다. 고종은 독살 등 신변의 위협을 수시로 걱정해야 했고 외국에서 들려온 통조림이나 날계란같이 즉석에서 독살 시도를 파악할 수 있는 음식으로 식사를 할 정도였다.

이런 고종의 처지를 동정한 조선 외교가의 인물들은 세를 규합해 그를 궁궐에서 구출하려는 시도도 했지만, 그 시도는 내부자의 밀고로 실패했고 일본은 이를 빌미로 을미사변의 책임을 회피하는 구실로 삼았다. 고종으로서는 분함과 원통함을 간직한 채 일본의 억압을 피할 방법을 찾아야 했고 결국, 아관파천으로 불리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몰래 그 거쳐를 옮겨야 했다. 고종으로서는 일본에 맞설 힘이 필요했고 우호적 관계에 있었던 러시아로 사실상의 망명을 택했다. 하지만 이 또한 새로운 외세의 간섭을 불러오는 일로 조선의 자주성을 지키는 일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앞서 언급한 대로 청일전쟁과 을미사변, 아관파천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시련은 내부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외세에 기대려 했던 안이하고 나약한 대응이 불러온 결과였고 비참한 역사의 장면 장면들을 만들고 말았다. 말 그대로 안타까움의 역사였다. 그때의 역사적 교훈은 강대국들의 틈에서 자주성을 지켜야 하는 지금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진 : 역사저널 그날 홈페이지,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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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로필 사진
    2018.10.30 05:48 신고
    조선시대의 아픔이네요

    잘 보고가요,
    즐거운 하루되세요^^
  • 프로필 사진
    2018.10.30 07:24 신고
    이 시기에 대해서는
    다른 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다루어져서 덜 알려져 있는데,
    저도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펴보고
    공부를 해봐야겠습니다.
    변화의 흐름에 빨리 올라타지 못한 것,
    그리고 외세의 힘에 기대려 했던 점이
    특히 큰 패착이었던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