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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들의 수다 한 마당, tvn의 알쓸신잡 시즌 3, 제9회에서 찾은 장소는 부산이다. 부산은 대한민국 제2위 도시이자 제1의 항구도시로 경제개발 드라이브가 한창이었던 70년대와 80년대 무역 항구로서 큰 역할을 했다. 지금도 부산은 수. 출입 항구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큰 번영을 이룬 부산이지만, 그 발전의 이면에는 6.25 한국전쟁의 아픔이 함께하고 있었다. 알쓸신잡에서는 한국전쟁과 부산의 이야기를 비중 있게 다뤘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한에 대해 기습적인 전면전을 개시하면서 시작된 6.25 한국전쟁은 개전 초기 북한군의 일방적인 우세였다. 

당시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북한의 전면전 가능성이 전혀 대비하지 못했다. 북한은 치밀하게 남침을 준비했고 비밀리에 소련과 중공의 지원까지 받았다. 북한군은 당시 남한에는 한 대도 없었던 탱크를 앞세웠다. 소련제 탱크는 당시 남한 군대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탱크를 파괴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중과 부족의 상황에서 북한군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고 엄청난 속도로 남한 영토를 점령했다. 

이에 남한의 이승만 정부의 대응은 무기력하기만 했다. 이승만 정부는 안심하라는 대통령의 녹음방송을 라디오를 통해 반복하는 하는 사이 대전을 거쳐 부산으로 정부를 이동했다. 상당수 서울 시민들은 피난조차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이승만 정부는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피난민들도 가득한 한강 다리를 폭파하며 상당수 사상자를 발생시키기까지 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북진 통일론을 내세웠지만, 이는 허황된 자신감이었다. 실상은 정 반대였다. 






뒤늦게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이 전선에 투입됐지만, 전세는 쉽게 역전되지 않았다. 결국, 북한군은 대구, 부산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남한 영토를 차지했다. 전선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이는 불가피하게 전쟁을 피해 남으로 피난 온 피난민들을 부산으로 모이도록 했다. 

당시 부산은 지금과 같은 큰 도시가 아니었지만, 엄청난 인구 유입으로 그 규모가 일시에 크게 팽창했다. 부산은 유엔군이 지원하고 임시정부가 있어 전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 이후 전세가 역전된 이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파생된 흥남철수는 또 한 번 엄청난 수의 외지인들을 부산으로 유입하게 했다. 당시 흥남철수 당시 마지막 미군 수송선이 군수 물자를 모두 버리고 수만의 피난민들을 가득 태워 거제로 항해한 일은 6.25 한국전쟁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였다. 

이렇게 저렇게 부산은 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이들에게 삶의 터전이 됐다. 대부분 연고가 없는 외지인들은 그들의 쉼터를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그들은 산비탈이나 심지어 공동묘지에까지 판자집을 만들었다. 지금도 부산의 산비탈에 자리한 마을들은 6.25 전쟁 당시 형성된 마을이 그대로 이어져 것이다. 프로그램에서도 지금은 벽화마을로 유명한 부산 감천동을 찾아 당시의 기억을 다시 떠오르게 했다. 

힘없고 가난한 이들이 맨주먹으로 만든 그 마을의 삶은 고단하고 힘겹기만 했고 지금도 그 상황이 다르지 않다. 벽화 마을로 관광지가 된 곳도 있지만, 현지인들의 삶이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닌 가난한 삶이 구경거리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다만, 관광수익을 현지 주민들을 위한 사업에 투자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전쟁 당시 많은 이들에게 부산은 전쟁의 공포를 덜어낼 수 있는 안전한 장소이기도 했지만, 힘든 삶은 이어가야 하는 또 다른 전쟁터였다. 이런 사람들의 삶이 이야기가 모여 부산은 거대 도시로 성장했다. 전쟁의 비극이 아이러니하게도 부산을 대도시로 만들었다. 6.25 한국전쟁과 부산은 이점에서 그 연관성이 상당하다. 

그리고 한국전쟁과 부산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에 장기려 박사가 있다. 북한 출신으로 한국전쟁 당시 월남한 장기려 박사는 부산에서 개업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헌신적인 의료활동을 했다. 그는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았고 무료 진료 등으로 의료혜택에서 멀어져 있는 이들에게도 인술을 베풀었다. 

장기려 박사는 의료봉사 외에도 우리 의학계에서 최초로 간암의 절제 수술을 성공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외과 의사로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도 있었지만, 장기려 박사는 평생 청빈한 삶을 살았고 남을 위한 사람을 살았다. 그의 병원이 규모가 커졌음에도 장기려 박사는 큰 병원을 유지하기 위해 병원비를 올려 받아야 하는 현실을 더 걱정했다. 이 때문에 가난한 이들이 자신의 병원을 찾지 못하는 것을 더 안타까워했다. 

영양실조에 있는 환자에게 닭 2마리를 살 수 있는 돈을 내어주라는 처방전을 내린 것이나 돈이 없어 치료비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이 도망갈 수 있도록 병원 뒷문을 항상 열어두었다는 일화는 그의 환자에 대한 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일화다. 또한 장기려 박사는 병원 옥탑방에서 기거하며 일체 재산을 소유하지 않았다. 그의 통장에 있어 마지막 돈 역시 그가 병중에 있을 때 그를 돌봐주었던 간병인에게 주었다. 그는 말 그대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세상을 떠났다. 

안타까웠던 건 북에 배우자가 많은 자식들을 남겨둔 실향민으로 있으면서 장기려 박사가 특별 이산가족 상봉을 2차례나 거부했다는 점이다. 그는 그로 인해 다른 이들의 상봉 기회가 사라지는 걸 더 걱정했다. 그렇게 그의 삶은 이타적이었다. 장기려 박사는 생의 끝자락에서 북에 있는 가족과의 3번째 상봉의 기회를 잡았지만, 이번에는 지병으로 쓰러져 뜻을 이루지 못했고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이렇게 장기려 박사는 6.25 한국전쟁의 비극 그 중심에 있었지만, 그 속에서 휴머니스트로서 아무나 흉내 낼 수 조치 없는 일을 했다. 하지만 그의 삶은 현대에 와서 크게 조명되지 못하고 있다. 대신 그가 만들었던 사설 의료보험 조합은 지금의 국민 건강보험의 모태가 되는 획기적인 시도로 우리  삶 속에 남아있는 그의 유산이다. 어쩌면 그의 유산이 일상 속에 함께 하기에 그에 삶에 대한 특별함을 인식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알쓸신잡 부산 편은 부산이라는 도시가 가지는 의미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었다. 굴곡진 현대사에서 부산은 그 중심이 있었던 도시였고 지금도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지후니 74 (youlsim7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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