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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여러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진행된 비폭력, 평화운동은 우리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한편, 일제의 강압통치에 힘을 잃어가던 독립운동을 다시 촉진시키는 촉매제가 됐다. 3.1운동의 정신은 이후 임시정부를 거쳐 대한민국에까지 이어지고 있고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다. 그렇기에 3.1운동 100주년은 그 의미가 너무나 크다 할 수 있다. 

역사 시사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이 3.1운동의 의미를 되새기는 코너를 2부에 거쳐 마련했다. 그 첫 순서로 김규식과 여운형 두 독립운동가의 3.1 운동을 전후한 활동에 대해 재조명했다. 이들은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19년부터 1920년 사이 열린 파리 강화회의에서 치열하게 전개됐던 외교전을 이끈 인물들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면이 있지만, 파리 강화회의는 3.1운동이 일어난 중요한 배경 중 하나였다. 

애초 3.1운동은 1919년 1월 고종 황제의 갑작스러운 승하에 따른 일제에 대한 반감과 당시 세계의 중요한 시대 조류였던 민족 자결주의라는 외적 변수가 결합되어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도 그랬다. 고종황제의 승하는 을사늑약과 강제병합 협정을 통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우리 민족에게는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는 것과 같은 충격이었다. 고종 황제는 여러 경로로 조선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위한 노력을 했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이 원인이 되어 강제 퇴위됐다. 






그런 고종황제의 갑작스러운 승하는 독립운동의 중요한 구심점이  사라지는 것과 같았다. 또한, 고종황제 승하에 대한 독살설이 퍼지면서 일제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 에너지는 일제에 저항할 수 있는 중요한 힘을 만들 수 있었다. 여기에 당시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는 독립 의지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었다. 

이 흐름 속에서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줄 수 있는 기회였다. 전 세계 대표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우리의 독립 의지와 일제의 강압적 식민 통치를 알린다면 국제 여론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제의 감시를 뚫고 그 회의에 참석하기는 어려웠다. 이미 국권을 상실한 상태에서 정식적인 대표가 될 수 없었고 파리까지 가는 길도 험난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파리 강화회의 참석을 위해 노력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김규식과 여운형이었다. 이들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만나 그 뜻을 함께했고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들은 영어에 능통한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시키고 여운형이 측면에서 이를 지원하기로 했다. 특히, 여운형은 미국 윌슨 대통령에서 독립의 의지를 담은 서한을 보내거나 당시 승전국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중국을 통해 김규식의 파리행을 이끌어냈다. 그는 재정적 지원은 물론이고 신한청년당이라는 해외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했고 이를 통해 김규식의 파리행과 이후 활동을 지속적으로 지원했다. 

하지만 어렵게 찾은 파리 강화회의에서의 활동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를 지원하기 위해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그와 힘을 합쳤지만, 파리 강화회의는 1차 세계대전승전국들의 잔치였다. 전후 세계질서를 개편하는 문제를 논의하면서 아시아의 작은 나라 조선에는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조선은 승전국 일본의 식민지였다. 미국의 주창한 민족 자결주의는 패전국 식민지에 적용됐다. 김규식 일행은 미국에 희망을 걸었지만, 이미 일제의 조선 병합을 밀약을 통해 승인한 미국이 우리의 입장을 들어줄 리 만무했다. 

결국, 파리 강화회의 대표단은 별도 사무실을 만들고 측면에서 일제의 강압적인 식민지 통치와 우리 민족의 독립 당위성과 의지를 알리는데 주력했다. 그 울림은 미약했지만, 점점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 소식은 해외는 물론이고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에게 국민들에게 전해졌다. 3.1운동의 중요한 계기 중 하나였던 일본 유학생들이 중심된 2.8 독립 선언도 파리 강화회의에서의 독립을 위한 활동이 큰 자극제가 됐다. 이러한 외교적 노력은 성과는 분면 긍정적이었다. 

이후 3.1운동이 일어난 이후 이 소식을 들은 김규식은 파리 현지에서 그 소식을 알리는 등 활동을 지속했다. 물론, 여러 제약들로 인해 눈에 보이는 성과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파리 강화회의에서의 외침은 3.1운동과 이후 임시정부의 탄생과 결코 떼 노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이를 이끈 김규식과 여운형의 역할을 그만큼 중요했다. 

이후 김규식과 여운형은 국. 내외에서 활발히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이들의 불운한 삶을 살아야 했다. 이들은 미국과 소련의 냉정 체제 속에 대한민국이 편입되고 좌. 우 이념 대립 속에 분단이 고착화되는 상황을 막고자 노력을 했지만, 남과 북한의 정권 좌익과 우익 어느 쪽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운형은 좌. 우 통합을 위한 노력을 지속했지만, 1947년 극우세력에 의해 암살되어 생을 마감해야 했다. 

김규식은 우익 성향의 인사였지만, 좌. 우 통합의 노력을 지속한 탓에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김규식은 6.25 전쟁이 발발한 이후 납북되어 북한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김규식과 여운형은 누구보다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들이었지만, 독립된 조국에서 환영하지 못한 삶을 살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이들의 죽음은 우리 근대사의 또 다른 비극이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시점에 김규식과 여운형의 삶은 다시 한 번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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