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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2회에 거쳐 그 의미를 재조명한 시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211회에서는 3.1운동의 전개 과정을 소개해주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 외에 잘 몰랐던 이야기까지 알 수 있었다. 물론, 3.1 운동의 역사적 의미는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다는 건 변함이 없었다.

3.1운동은 1910년 일제의 조선에 대한 강제 병합 이후 계속된 압제에 대한 반감, 고종 황제의 승하를 기점으로 증폭된 분노, 국. 내외 독립운동과 민족자결주의 등 대외적 여건이 결합되어 발생했다. 결코 우연에 의한 사건이 아니었고 치밀한 준비와 많은 이들의 헌신이 있어 가능했다. 

3.1운동은 전국적으로 200만명 이상의 국민들이 만세 운동에 참여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의 무자비한 진압에 죽거나 다치거나 투옥당했다. 그 대상자들은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았다. 1919년 3월은 조국 독립에 대한 열망에 온 국민이 하나가 되었다. 3.1운동을 기점으로 독립운동은 더 활기를 띠었고 4월 11일 민주공화국의 시작을 알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3.1운동은 일제에 대한 봉건체제를 우리 역사에서 지우고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정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했다.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3.1운동에 관련한 많은 이들이 잘못 알고 있는 몇 가지 사실을 언급했다. 우선, 1919년 3월 1일 지금의 탑골 공원에서 시작된 만세 운동에는 태극기가 사용되지 않았다. 일제의 삼엄한 감시와 압제 속에 독립선언문을 전국 각지로 전달하는 것에도 큰 어려움이 있기도 했고 태극기를 사용하게 되면 거사가 발각될 우려가 컸던 탓도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 독립의지를 알리는 것이 주 목적이었던 것도 큰 원인이었다. 

또한, 민족 대표 33인이 애초 탑골 공원에 모여 만세 운동을 주도하기로 한 계획을 거사 직전 수정하여 태화관으로 장소를 옮기게 된 배경도 소개했다. 이를 두고 민족 대표 33인의 나약함과 함께 태화관이라는 장소가  지금의 대형 술집이었다는 점에서 태화관에서의 모임이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도 있었다. 

민족 대표 33인이 그들만의 독립 선언을 하고 만세 운동에는 소극적이었다는 비판이 있기도 하지만, 대규모 집회에서 자신들이 일제에 연행되는 모습이 노출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유혈 충돌과 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한 학생들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독립선언문을 총독부에 통보하고 순순히 투옥되기를 택했다. 투옥되면 모진 고문을 피할 수 없었고 목숨을 내놓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민족 대표 33인의 염려에도 독립에 대한 국민들의 에너지가 분출되는 건 피할 수 없었다. 학생들이 주도가 된 만세 운동은 탑골 공원을 벗어나 서울시내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다. 이 과정에서 독립선언서의 낭독은 황해도 해주에서 전도사로 활동하다 만세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한 정재용에 의해 이루어졌다. 

민족 대표 33인이 탑골공원에서 나타나지 않고 공원에 모인 이들이 혼란에 빠져 있을 E 단상에 올라 품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그의 선창으로 시작된 만세 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펴져나갔다. 물론, 정재용의 독립선언서 낭독이 진실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당시 참여자들의 증언과 정재용 본인의 증언 상세하고 일치하는 부분이 많은 탓에 정설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펴지게 된 계기는 학생들에 의해 주도된 3월 5일 서울역 만세운동이 결정적이었다. 이날은 고종의 장례를 위해 전국에서 서울로 올라온 이들이 귀경길에 오르는 시점이었다. 귀경하는 이들에게 이 만세운동은 큰 자극제가 되었고 그 소식이 전국으로 알려졌다. 이후 만세 운동은 전국적인 항거로 이어졌다. 

이에 대해 일제는 무력에 의한 무자비한 진압을 했다.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가 하나가 되어 큰 저항운동이 되는 것이 그들은 두려웠다. 그들은 일본에서 군대를 증원하면서 총칼로 비폭력 평화운동을 진압했다. 일제는 이 과정에서 제암리 마을 학살사건과 같은 비인간적이고 잔혹한 범죄까지 저질렀다. 제암리 학살사건은 당시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들어와 있었던 스코필드에 의해 취재되어 일제의 만행이 전 세계에 알려지기도 했다. 일제는 이를 통해 3.1운동의 확산을 막으려 했다. 결국, 3.1운동은 많은 희생을 가져왔고 그 불씨가 점점 사그라드는 건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친일파들의 역할이 있었다. 매국노의 대표자 이완용은 신문 기고를 통해 만세 운동을 일종의 폭동으로 규정하고 멈출 것을 수차례 촉구했다. 또한, 친일 인사들이 주도가 된 자제단은 만세 운동의 참여자들을 회유 협박하고 신고하는 등 일제의 3.1운동 탄압에 앞장섰다. 이들에게는 민족의 독립보다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부와 지위, 안위가 소중했다. 

결국, 3.1운동은 원하는 결실을 맺지 못했다. 하지만 3.1운동은 그 주체가 일반 평민들로서 시민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띄었다. 실제 민족대표 33인도 대부분 조선 시대 양반 출신들이 아닌 같은 평민 계급이었다.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이들은 젊은 학생들이었고 참여자들은 연령이나 계층, 사회적 지위의 구분도 없었다. 다수의 여성들이 독립운동에 전면에 나섰다. 그 이전의 의병운동이 일제에 대한 저항이 양반 계층에서 주도한 것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3.1운동은 국민들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민주 공화정의 초석이 되었다. 이후 중국 상하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정을 헌법을 통해 천명했다.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 대신 대한민국을 사용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지금의 우리 헌법에는 대한민국이 3.1운동으로 인해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전문 첫 줄에 밝히고 있다. 3.1운동은 대한민국이 민주주의의 시작이었다. 

3.1운동 100주년은 민주공화국의 역사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1948년 8월 15일 당시 남한의 정부 수립을 건국절로 지정하자는 주장을 하면서 이념의 잦대를 들이대며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듯한 일부 학계와 정치권의 자세는 분명 아쉬움이 있다. 이 주장대로라면 대한민국이 역사 중 수십 년은 사라지게 된다. 이는 당시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일제에 항거했던 전국적인 3.1운동의 정신과도 상충된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3.1운동의 정신은 결코 폄하되거나 왜곡되어서는 안된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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