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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하거나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역의 오랜 역사와 그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찾아 나서는 동네 탐방기,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6회에서는 서울 종로구 이화동, 창신동의 이모저모를 살폈다. 이야기는 눈이 내리는 날 동대문 성곽공원에 시작됐다.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성곽길을 따라 만나는 서울 시내의 눈 풍경은 봄이 오기 전 겨울이 주는 마지막 선물과 같은 느낌이었다. 성곽길을 따라가다 오른 낙산공원의 풍경은 그래서 더 소중하고 멋지게 다가왔다. 낙산공원에서의 눈 풍경을 뒤로하고 성곽길을 따라 내려온 길, 성곽의 안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를 만났다. 

이 통로는 성곽 축조 당시 만들어진 일종의 비밀 통로였다. 이 통로는 성곽안의 도성과 도성 밖을 연결해 주었다. 지금은 성곽 안은 이화동, 성곽밖은 창신동으로 행정구역이 나누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서울의 중요한 관광 명소가 된 성곽길을 따라가야 만날 수 있는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그 비밀의 통로 밖 창신동으로 향한 여정은 거대한 화강암 절벽과 그 위아래에 펼쳐진 마을과 이어졌다. 이 절벽은 과거 일제시대 화강암을 캐내던 채석장이었다. 이 채석장의 화강암은 일제시대 건축물에 사용되었다. 지금은 철거되었지만, 과거 중앙청이라 불렸던 일제 총독부 건물, 과거 서울역 역사, 지금의 한국은행 본점 건물이 이 화강암으로 지어졌다.

이후 해방이 되고 채석장 운영이 중단되면서 이곳에는 외지에서 서울로 온 이들이 집을 하나 둘 짓고 마을을 형성했다. 지금은 돌산마을이라 불리는 이 마을의  절벽 위아래에 어떻게 보면 위태롭게 지어진 건물들은 우리 아픈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단순히 지역의 명소나 색다름의 장소로만 볼 수 없는 곳이었다. 

무거운 마음을 안고 발걸음은 창신동의 봉제 골목으로 향했다. 창신동 봉제 골목은 1970년대와 80년까지 우리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섬유산업의 중심을 이루었던 소규모 봉제공장들이 밀집해있다. 주변의 의류 도매시장이 활성화된 동대문시장이 있어 봉제공장들이 이곳에 모이는 계기가 됐다. 섬유산업이 쇠퇴하면서 그 규모는 줄었지만, 동대문 의류 도매상가에 납품을 위주로 하는 봉제공장은 여전히 1,000여개가 운영 중이다. 

이 공장들은 대부분 30년 이상의 경력이 있는 기술자들이 운영하고 있고 각각의 파트에 따라 분업화되어 하나의 공단과 같은 모습이었다. 이곳 봉제사들의 숙련된 기술 덕에 동대문 의류상가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제품을 선보일 수 있다. 이 봉제 골목에서 만난 한 부부는 서울에서 머나먼 곳에 자리한 완도에서 함께 상경하여 30년이 넘게 창신동에서 봉제일을 했고 지금은 봉제공장을 운영하며 자리를 잡았다. 30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자녀들을 공부시키고 서울에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힘든 세월이었지만, 이 부부에게 창신동은 고마운 동네이기도 했다. 

창신동 봉제공장의 역사는 이 지역에 만들어진 봉제 역사관에서 상세히 살필 수 있었다. 역사관에서는 70년부터 시작된 봉제공장들과 이곳에서 일했던 이들의 삶의 애환을 각종 기록들과 전시품을 통해 알려주고 있었다. 지금은 젊은이들에게 색다른 체험과 추억의 공간으로 지역의 명소가 되어있었다. 그 모습이 달라지고 있지만, 창신동 봉제공장의 역사는 우리 산업화의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절대 가벼울 수 없어 보였다. 

창신동의 역사를 돼새기며 골목시장을 걸었다. 그 골목길에는 반찬가게를 비롯해 다양한 먹거리 가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자신만의 특화된 조리법으로 만든 매운 족발을 만들어 파는 가게 주인으로부터 봉제사로 일하다 사업의 어려워 족발집은 운영하게되 사연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쉽지 않은 변화를 겪었지만, 지금은 나름 알려진 맛집이 되면서 웃을 수 있는 날이 더 많아진 주인이었다. 그의 족발 맛에는 수십 년의 삶의 애환이 함께 베어 있었다. 

창신동 골목시장을 벗어난 발걸음은 서울시내 번화가를 지키고 있는 동대문, 흥인지문의  역사를 살폈고 동대문에서 시작하는 성곽길을 따라 이화동으로 향했다. 지금은 벽화로 유명한 이화마을로 더 알려진 이화동에는 젊은 예술가들의 공방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고 카페들이 자리해 동네의 풍경을 바꿔놓고 있었다. 

외지인들이 너무 많이 찾는 탓에 지역민들의 삶에 지장을 주고 이로 인한 갈등이 발생하고 있기도 하지만, 이화동은 과거의 현대가 공존하는 문화예술의 공간이었다. 이화동 마을박물관에서는 주민들의 오래된 살림살이가 유물이 되고 작품이 되어 전시되고 있었는데, 이 박물관은 이 지역에 새롭게 자리를 잡은 이들과 주민들이 소통하고 공존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화동을 조명한 후 여정은 창신동의 큰 길로 향했다. 그곳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인장 거리를 만날 수 있었다. 이제는 서명이 보편화되면서 인장의 사용이 줄어들고 있지만, 여전히 이곳을 찾는 이들이 많았다 40년째 이 골목에서 인장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은 수작업을 고집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인장을 만들고 있었다. 그는 자동화된 인장 제작은 언제든 가능하고 편리하지만, 프로그래밍된 인장은 자신만의 인장이 아니고 쉽게 위조될 수 있어 수작업을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리 있는 고집이고 그만의 철학이었다. 그의 고집은 전국 각지에서 그의 인장을 주문하는 단골들의 신뢰로 이어지고 있었다. 

막바지로 향하는 여정, 창신동의 골목길의 오래된 주택들과 건물들을 보면서 잠시 시간이 거꾸로 흘러감을 느끼는 사이 과거 쪽방촌을 개조해만든 쪽방 전시관을 만날 수 있었다. 서민들의 힘든 삶이 응축된 이 공간은 카페가 운영되고 예술가들의 전시회나 공연을 하는 문화 예술의 공간으로 재 탄생되어 있었다. 누구에게는 힘든 추억의 장소가 젊은이들에게 즐거움이 장소로 변한 것에 다소 반감을 가질 수도 있지만, 과거의 것을 무조건 없애고 새롭게 하는 대신 보다 긍정적이고 발전으로 공존토록 하는 시도가 반가웠다. 

여정의 끝은 창신동 또 다른 명소 곱창 골목의 40년 전통의 돼지곱창 가게였다. 그 가게의 주인은 40년 넘게 자판에서 시작해 지금의 가게를 만들었고 대를 이어 운영하고 있었다. 그 가게의 단골손님들 역시 가게 주인과 세월을 함께한 이들이었다. 과거 배고프던 시절 싼 가격에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돼지곱창은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던 창신동 봉제사들에게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지금도 그때의 맛을 잃지 않은 이 가게에 오는 이들은 과거의 추억을 함께하고 있었다. 

이화동과 창신동은 과거의 향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 과거의 모습들은 현재와 단절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었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화동과 창신동의 성곽은 그 삶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계속 지켜보고 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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