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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산업단지다. 과거 반월공단이라 불리기도 했다. 우리 산업화 역사에서 그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안산이었다. 거대한 방조제로 바닷길을 막아 조성된 안산과 접하고 있는 시화호는 과거 활발히 일어났던 간척 사업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렇게 안산은 우리나라의 산업화, 현대화 과정에서 많은 변화를 겪은 곳이다. 그리고 지금의 안산은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공존하는 다문화 공간으로 변신했다. 안산의 산업단지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모여들면서 생긴 현상이다. 

이 안산에서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35번째 이야기가 펼쳐졌다. 안산의 이야기는 시화 방조제를 걸으며 시작됐다. 시화 방조제는 7년여의 공사 끝에 1994년 완공됐다. 이를 통해 만들어진 담수호 시화호와 그 주변의 땅은 신도시와 농업용지로 크게 활용될 것으로 기대됐지만, 공사 후 각종 환경문제가 크게 대두되었고 담수호의 효용 가치가 크게 떨어지면서 애초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다. 심각한 환경오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시화호의 담수화는 철회되었고 지금은 거대한 해수호가 되었다. 인위적으로 자연을 변화시킨 댓가가 얼마가 큰 것인지 시화방조제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지금은 방조제 조력 발전소가 설치되어 전력을 생산하는 데 활용하고 있고 자연으로 되돌린 시화호는 자연의 치유 과정을 거쳐 생태환경이 크게 개선되었다. 






시화 방조제에서 시작된 여정은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안산역으로 이어졌다. 그 안산역의 수도권 전철길을 따라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란 또 다른 철길이 보였다. 과거 1990년대 중반까지 운행되었던 협궤열차 길이었다. 이 협궤 열차는 일반 열차보다 그 규모가 작은 일명 꼬마열차로 불리며 지역민들을 실어 날랐다. 좁은 공간 탓에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지근거리에서 서로를 마주 보며 열차를 타야 했다. 지금은 상당한 불편함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지금은 지하철이나 전철에서 느낄 수 없는 정감이 함께 하는 열차였다. 

그 협궤열차는 이제 현대식 전철에 자리를 내주었지만, 안산역에는 그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 흔적을 찾아 사람들이 그 철길을 찾는 모습도 보였다. 안산역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그 안산역 인근에는 또 다른 공존의 공간이 있었다.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함께 하는 다문화거리가 그곳이었는데 그곳에는 중국을 비롯해동남아, 러시아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등에서 온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그곳의 외국인들은 대부분 안산의 공단지역 노동자들로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먼 타국에서 일하는 이들이었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모습에서 과거 우리나라의 많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가계를 일으키기 위해 먼 나라에서 일했던 장면과 오버랩됐다. 지금 우리나라의 경공업과 농업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의 비중은 절대적이다. 그 숫자가 크게 늘었다. 그로 인한 각종 범죄 등 부정적인 면이 대두되고 있다. 뉴스에서도 이에 대한 소식을 자주 접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 국민들의 일자를 빼앗아 간다는 말도 나온다. 분명 문제가 되는 부분도 있지만, 상당수 외국인 노동자들은 성실히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 몇몇 일탈과 잘못으로 그들을 모두 재단하는 건 문제가 있다. 

안산의 다문화거리에서는 평화로운 공존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덕분에 다양한 문화가 함께하고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성이 함께 하는 공간이 안산의 다문화 거리였다. 그 안에서 생업을 이어가는 이들도 만날 수 있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주 고객층인 가방가게 사장님은 몇 번의 대화로 외국인 노동자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아챌 정도였고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못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수요에 맞게 만들어낸 꽃빵도 별미였다. 중국의 요리사들이 요리하는 도삭면이 있는 중화요리집도 다른 곳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색다름으로 다가왔다.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고려인 가족이 운영하는 식당에서는 우리나라와 중앙아시아의 문화가 함께 하는 새로운 요리도 만날 수 있었다. 

이렇게 안산은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이들이 모여 융합하여 다양성과 독특함이 함께 하고 있었다. 그 안에서 우리의 이웃들은 외국인들과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가도 있었다. 방송이라는 특성상 부정적인 면을 보여주지 않았겠지만, 안산의 다문화 거리는 평화롭고 활력이 함께 하는 곳이었다. 

숨 가쁜 일상으로 가득한 안산에는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조선 영. 정조시대 화가로 이름을 날렸던 김홍도의 흔적이 안산 단원구에 있었다. 단원구의 이름은 김홍도의 호 단원에서 유래했다. 단원군에서 자리한 그의 스승의 처가에서 그림을 배우고 익혀 김홍도만의 화풍을 만들 수 있었다. 천문당이라 불리는 고택에는 김홍도의 숨결이 남아 전해지고 있었다. 산업화의 공간인 안산이었기에 그 느낌이 더 색다르게 다가왔다. 

여정의 막바지 바다로 향한 발걸음은 갈대군락이 우거진 갈대습지에서 자연의 소리를 마음껏 들을 수 있었다. 한때 크게 파괴됐지만, 다시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는 자연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바다로 향하는 길에 대부도에서 만난 작은 포장마차에서는 싱싱한 조개구이를 만날 수 있었다. 포장마차의 사장은 과거 IMF 경제 위기 당시 사업이 실패하고 살기 위해 정착한 안산에서 그는 한 번도 한 적인 없었던 어부인을 시작했고 지금에 이르렀다고 했다. 과거에는 생존을 위해 바다에서 일했지만, 어렵고 힘든 시간을 지탱해준 바다가 지금 그에게는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준 고마움의 공간이지 편안함의 공간이 되었다.  

안산은 이제 또 다른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숨 가쁘게 진행된 산업화의 현장에서 자연과 사람이 함께 하는 곳으로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다문화의 공간이 됐다. 그 구성원들은 서로에게 긍정의 에너지를 전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긍정의 조화를 안산 편에서 느낄 수 있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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