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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9월 14일은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날이다. 롯데 자이언츠의 레전드 최동원의 기일이기 때문이다. 2011년 젊은 나이에 암으로 사망한 최동원은 이후 그의 등번호가 롯데의 영구 결번이 되었고 해마다 그의 기일에 롯데는 추모식과 함께 홈경기에서 그를 추모하는 이벤트를 열고 있다. 올 시즌은 그의 기일과 가장 가까운 9월 13일 홈경기가 있었다. 

경기전 추모식과 함께 1984년 최동원이 팀 우승을 이끌었던 당시 롯데의 홈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선 선수들의 선두 SK에 1 : 0으로 승리하며 레전드에게 승리를 선물했다. 롯데 타선은 극심한 부진을 보였지만, 선발 투수 박세웅의 6이닝 무실점 투구에 이어 마무리 손승락까지 불펜진의 무실점 투구로 승리를 가져올 수 있었다. 

의미 있는 날 승리를 했지만, 올 시즌 롯데는 일찌감치 최하위에 머물려 가을야구와는 이미 멀어졌다. 시즌 내내 경기력 논란은 끊이지 않았고 단장과 감독은 전반기를 마치고 사퇴했다. 이후에도 팀 간판선수 이대호 논란을 비롯해 악재만 가득한 시즌을 보내고 있는 롯데다. 최근 젊은 단장을 선임하고 팀 개편에 시동을 걸었지만, 팀에 대한 팬들의 불신은 여전하다.


이런 롯데에게 최동원은 레전드 그 이상의 존재다. 올드팬들에게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1984년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4차례의 선발 등판과 1차례의 구원 등판을 포함해 5경기 마운드에 올라 홀로 4승 1패를 기록하며 롯데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던 최동원의 스토리는 여전히 롯데의 전설이다.

프로야구가 시작되기 전부터 최동원의 존재감을 상당했다. 고교시절부터 대학, 실업야구까지 그는 최고의 투수였다. 국가 대항전에서도 최동원은 국가대표의 에이스였다. 이런 활약을 바탕으로 최동원은 메이저리그 팀과 정식 계약을 하고 메이저리그 진출의 꿈을 이루기 직전에 이르렀지만, 여러 현실적 장벽에 막혀 1983년 롯데에 입단하며 KBO 리그에서 프로 선수의 이력을 시작했다.

1984년 최동원은 51경기 마운드에 올랐다. 그 해 최동원은 27승 13패 6세이브 방어율 2.40을 기록했다. 프로야구 초창기 선발과 중간, 마무리 투수의 시스템이 정착되기 전이었던 탓에 최동원은 선발과 불펜을 가리지 않고 마운드에 올랐다. 그가 소화한 이닝은 284.2이닝이었다. 당시 전기 리그와 후기리그 챔피언이 한국시리즈에서 격돌하는 프로야구 시스템 속에 최동원을 앞세운 롯데는 후기리그 우승으로 한국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한국시리즈에서 만난 삼성은 초호화 라인업을 자랑하는 최강팀이었다. 삼성은 여유 있게 전기리그를 우승하고 후기리그는 컨디션을 조절하며 한국시리즈를 대비했다. 후기리그 막바지 삼성은 롯데와 지금 두산의 전신인 OB의 우승 경쟁 과정에서 롯데전 고의 패배의 논란까지 불러일으키며 롯데를 한국시리즈 파트너로 선택해다. 삼성은 최동원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롯데가 한국시리즈에서 더 상대하기 쉽다고 여겼다. 

그 해 한국시리즈는 사실상 최동원 대 삼성의 대결과 같았다. 삼성은 최동원을 최소한 한 번만 무너뜨리면 한국시리즈 승리는 자신들 것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시리즈 5차전에서 삼성은 최동원이 선발 등판한 경기를 승리하며 그 계획이 성공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최동원은 시리즈 6차전 구원 등판으로 승리투수가 됐고 7차전에도 선발 등판해 완투승으로 롯데의 우승을 이끌었다. 만화에나 나올 수 있는 최동원의 영웅 스토리는 그렇게 완성됐다. 1984년 한국시리즈 패배 이후 삼성은 한국시리즈 우승을 위해 긴 인고의 세월을 견뎌내야 했다. 

이렇게 롯데의 우승을 홀로 이끌었던 최동원이었지만, 이후 그의 야구 인생을 순탄하지 않았다. 1988년 최동원은 선수협 창립을 주도했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삼성으로 트레이되는 아픔을 겪었다. 민주화 열기가 뜨거운 시기였지만, 사실상의 노조인 선수협의 존재를 프로야구 구단들은 인정할 수 없었다. 지금도 모기업의 지원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우리 프로야구 현실을 고려하면 당시 선수협 창립 시도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 일을 주도한 이가 최고 투수였고 최고 연봉을 받고있는 최동원이었다는 점은 놀라웠다. 최동원은 저 연차 저 연봉 선수들의 처우 개선과 함께 구단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 선수협이 필요하다 여겼다. 

하지만 당시 사회적 분위기는 선수협의 창립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시도는 무산됐다. 그 후폭풍으로 최동원은 롯데를 떠나야 했다. 이후 삼성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지만, 최동원은 전성기의 기량을 회복하지 못했고 은퇴식도 없이 쓸쓸히 은퇴했다. 아직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였다. 아마 야구 시절부터 누적된 혹사의 여파도 영향이 있었다. 

은퇴 후 최동원은 지방자치 선거에서 부산시 광역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아직 지역주의가 지배하는 정치권에서 최동원은 영남을 기반으로 하는 여당 민자당이 아닌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 최동원으로서는 큰 모험이었다. 결과는 낙선이었다. 이후 최동원은 방송인으로 해설의원으로 야구계에서 일했지만, 그가 원했던 지도차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선수협 창립을 주도했던 이력은 원 소속팀 롯데는 물론이고 타 프로야구 구단도 그를 외면하게 하는 요인이었다. 

2001년 한화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최동원은 롯데에서의 지도자 생활을 열망했지만, 생전에 그 꿈을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2011년 그가 지병으로 세상과 작별할 때까지 최동원과 롯데의 만남은 이루어지 않았다. 롯데는 노골적으로 최동원을 외면했다. 그가 사망한 이후에도 그의 장례를 지원한 건 그가 코치로 있었던 한화였다. 이런 구단의 처사에 롯데 팬들은 비난 여론은 상당했다. 여론 악화에 롯데는 부랴부랴 그의 등번호를 영구결번으로 정하고 그 기념식을 거행했다. 최동원은 그의 사후에서야 그토록 염원했다 롯데와의 재회를 할 수 있었다. 

롯데는 2009년부터 매 시즌 그의 기일에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최동원상이 만들어져 그 해 최고 투수에 시상하는 기념식도 열려 그의 기억하게 하고 있다. 하지만 최동원의 생전에 그가 롯데에서 지도자로서 활동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는 점은 롯데 팬들에게는 너무나 큰 안타까움이다. 

최근 롯데의 부진한 경기력은 더욱더 최동원을 떠오르게 한다. 프로야구 초창기의 특수성도 있었지만, 그의 투혼은 지금 롯데 선수들에게 필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지금 롯데 팬들의 팀에 대한 실망은 하위권 성적이라는 결과물보다는 한숨 나오게 하는 근성 없는 플레이가 주원인이다. 이 점에서 최동원에 대한 기억은 지금 롯데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롯데 선수들은 왜 롯데 팬들이 아직도 최동원을 추억하고 기억하고자 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진 : 롯데자이언츠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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