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728x90
반응형
728x170

일제시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독립운동의 단체가 중국과 러시아 등 해외 각지에 있었고 독립운동의 노선에 다양했던 탓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을 모두 총괄하였는지에 대한 이견도 있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고 많은 인사들이 이곳에 속해 있었다. 윤봉길, 이봉창 의사의 의거도 임시정부가 주도하였고 이후 광복군 창설 역시 임시정부가 중심에 있었다. 

해방 후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 속에 한반도가 편입되면서 임시정부는 그 존재감을 잃었지만, 다수의 임시정부 인사들이 정치활동을 했고 우리 헌법에는 대한민국이 1919년 3.1운동의 정신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밝히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정의 시작이었고 대한민국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는 법률적 토대를 마련해준 인물이 있었다. 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237회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기초한 조소앙의 삶과 사상에 대해 조명하였다. 



조소앙은 조선 말기 1887년 태어났고 어린 나이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수학할 정도로 학문적으로 뛰어난 역량이 있었다. 1904년 국비 장학생으로 일본에 유학한 조소앙은 일본에서 법을 공부하여 법률가로 자질을 가지게 되었고 국제정세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또한, 일본에서 조선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후 학업을 마친 조소앙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조소앙은 1919년 2월, 3.1운동의 전조가 된 무오독립선언서, 즉 대한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고 일본 유학생들이 중심이 된 2.8 독립선언을 위한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외교관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소앙은 1919년부터 수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표하여 유럽 각지를 돌며 대한민국의 독립을 역설하고 다양한 인사사들과 교류하였다. 그의 여정은 파리를 비롯해 러시아까지 이어졌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돌아온 이후에는 임시정부가 어려운 시기에도 임시정부를 지키며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조소앙의 가장 큰 업적은 그의 사상인 3균주의가 대한민국 건국강령의 중심을 이룬다는 점이다. 조소앙의 3균주의는 개인간, 민족간, 국가간의 균등과 함께 국민의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그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 3균 주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에 크게 반영되었다. 

건국강령에서는 남녀의 평등에 기초하여 18세 이상의 남녀는 모두 참정권을 가지고 23세 이상의 남녀는 누구 피선거권을 가질 수 있었다. 나라의 근간이 되는 중요 산업과 토지는 국유화하고 국민들은 대학교까지 무상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 외 건국강령에서는 민주주의에 근거한 자유와 평등, 국민의 권리를 명시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강령은 좌. 우를 포함한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이론적 기초였다. 지금의 관점으로도 쉽게 생각할 수 없는 혁신적인 내용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강령의 토대가 된 3균주의는 조소앙의 역사적 성찰과 좌우를 모두 포괄하는 통합적 사고의 산물이었다. 조소앙은 대한민국이 민주 공화정을 기초로 하는 국가임과 동시에 모두가 행복하고 평등한 이상적인 국가가 되길 기대했다. 

하지만 그의  3균 주의는 해방 후 현실 정치에서 제대로 구현되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이 냉전체제 속 대결장 된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좌. 우의 이념 대립과 갈등이 컸다. 조소앙의 이상주의가 뿌리내리기 힘든 상황이었다. 조소앙은 이런 어려움에도 정치인으로 대중들 속으로 다가갔다. 방송에서 공개된 그의 육성 연설에서는 그의 3균 주의 사상이 그대로 드러나있었다. 조소앙은 대중들에게 아이들마다 대학을 졸업하게 하오리다. 어른마다 투표하여 정치성 권리를 가지고 살게 하오리다. 사람마다 우유 한 병씩 먹고 집 한 채씩 가지고 살게 하오리다. 하고 외쳤다. 

정치적 구호라 할 수도 있는 발언이었지만, 그가 오랜 세월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던 3균주의를 그대로 반영한 내용이었다. 이는 해방 이후에도 궁핍한 삶을 벗어나지 못했던 일반 국민들에게는 실질적으로 와닿는 내용이었다. 그의 강연과 연설은 대중들의 높은 지지와 호응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대중적 호응에도 조소앙은 정치인으로 입지를 쉽게 다지기 힘들었다. 그의 사상은 사회통합적 성격이 강했지만, 좌. 우 진영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정치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만들어 가려 했고 1950년 6월 민의원 선거에서 서울의 성북구에서 압도적 지지로 당선되었다. 이제 정치인으로서 꿈을 펼치려 했던 조소앙의 희망은 1950년 6월 25일 6.25전쟁 발발로 좌절됐다. 조소앙은 전쟁 발발 후 피난을 하지 못했고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었다. 북한에서 조소앙은 김일성 유일체제에 협조하지 않고 나름의 정치적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그곳은 그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는 곳이었다. 1958년 조소앙은 북한에서 생을 마감했다. 

납북된 탓인지 그의 독립운동의 공적은 해방 후 바로 인정받지 못했다. 1988년에서야 조소앙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아 그의 공적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준 그의 활동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최근에서야 그의 사상과 활동이 대중들에게 알려지고 있고 2019년 광복절 대통령 경축사에서 그의 3균주의가 언급되며 다시 한 번 주목받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조소앙의 사상적 지향점을 두고 현실을 무시한 이상주의라는 비판을 할 수도 있다. 공산주의 사상이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좌. 우 진영이 함께 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수용되었다. 또한 조소앙은  해방 후 우익 진영에서 정치활동을 했고 공산주의를 배격했다. 그의 사상적 기반은 민족이었고 국민이 함께 잘 사는 나라였다. 이는 불평등이 고착화되고 계층 간 이동이 힘들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분명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의  평등사상은 기회의 불평등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댓글
반응형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