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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조선의 수도로 정해진 이후 지금까지 오랜 세월 수도로서 그 자리를 지켜왔다. 서울 정치, 행정,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기도 하다. 그와 동시에 우리 현대사의 중심이었고 나라 근대화를 이끌어가는 곳으로 큰 변화를 몸소 겪어왔다. 그 덕분에 서울은  많은 것이 발전하고 새롭고 편리하게 변했다. 

하지만 그와 비례해 간직해야 할 과거의 흔적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뒤늦게 그 가치를 인식하고 찾으려 하지만, 이제는 사진 속에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상당수다. 우리 주변의 사라져가는 것들의 소중함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담은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47회에서는 서울 정릉, 삼선동에 발걸음 했다. 

시원함보다 차가움이 더 느껴지는 북한산 자락의 계곡을 따라 시작된 여정은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산 정상의 전망대로 이어졌다. 그곳에서 가을의 색으로 물들어 가는 수목과 콘크리트 빌딩과 집들의 공존하는 장면을 만날 수 있었다. 



도시의 가을 풍경을 뒤로하고 한마을에 이르렀다. 그 마을은 집집마다 문이 열려있었다. 뉴스에 강력 범죄 소식이 거의 매일 전해지고 점점 이웃과의 교류를 꺼리는 각박해지는 시절에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단독 주택들이 대부분인 이 마을의 주민들은 이웃에게 그들의 정원을 공유하고 이를 교류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의 함께  예쁜 꽃이나 화분으로 마을 곳곳을 가꾸면서 마음을 나누고 있었다.  이 마을 찾는 이들에게도 집의 정원을 내어주는 마을 주민들은 모두가 함께하는 공동체를 지켜가고 있었다. 무관심이 미덕이 되어가는 지금 세태와 다른 훈훈함이  있는 곳이었다.

마을 떠나 찾은 곳은 조선 최초의 왕비 신덕왕후가 잠들어 있는 정릉이었다. 신덕왕후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이었으나 첫 번째 부인이 조선 건국전에 승하함에 따라 조선의 첫 왕비가 되었다.  이성계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둔 신덕왕후는 그 아들 중 한 명을 세자 자리에 앉혔지만, 얼마 안가 승하했다. 이후 태종 이방원이 주도한 왕자의 난 때 세자를 비롯한 아들들이 목숨을 잃는 비운의 운명을 맞이했다. 신덕왕후의 릉은 애초 궁궐과 가까이 곳에 있었으나 이방원이 왕이 되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장되는 또 한 번의 비운을 맞이했다. 정릉은 이렇게 조선 초기 치열한 권력 다툼과 비정한 정치의 이면이 담겨있는 현장이었다.

과거를 기억하게 하는 장소를 벗어나 여정은 현재의 삶 속으로 다시 돌아왔다. 주변의 대학과 상인들이 함께 협업하여 상생을 도모하는 활기찬 상가를 지났고 세계 팔씨름 대회를 준비하는 젊은 청년들이 모여있는 체육관에서는 자신들의 꿈을 위해 서로 격려하고 함께 노력하는 이들의 열정과 만날 수 있었다. 

여정을 이어가던 중에 고향의 맛을 그대로 간직한 국숫집과 만날 수 있었다. 예전 방식대로 국수를 만들어 파는 식당에서는 콩가루를 넣어 색다른 맛을 내는 일명 건진국수를 맛볼 수 있었다. 이 국수는 맛도 독특하지만, 과거의 향수를 함께 불러일으키는 매력이 있었다. 이 국수를 만드는 일이 힘들지만, 가게의 주인은 이곳을 잊지 않고 찾는 이들을 위해 이 국수가게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건진국수 한 그릇에 다시 힘을 얻은 여정은 조선 시대 도성을 둘러싼 성곽들을 따라 조성된 성곽길에서 가을의 정취와 함께 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 성곽길은 서울이 가지고 있는 매력적이 공간이었다. 그 성곽길을 따라 꽃차를 판매하는 가게에 들렀다. 이 가게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공가를 젊은 청년 사업가에 제공하여 조성되었다. 청년 사업가는 안정적으로 자신의 사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 가게의 젊은 사장은 성곽길과 잘 어울리는 꽃차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었고 자신의 재능을 마을 주민들과 나누며 소통했다. 어르신들이 대부분인 마을 주민들은 여가를 즐겁게 즐길 수 있었고 젊은 사장과의 교류는 세대간 이해를 높이는 기회도 될 수 있었다. 과거를 테마로 조성되는 각종 벽화마을이 외지인과 지역주민들의 갈등이 커지는 일이 많아지는 상황에서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고 상호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마을 곳곳에 오래된 한옥이 드문드문 자리한 삼선동의 한 동네에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을 또 만날 수 있었다. 오래된 한옥 고택의 열린 문으로 들어선 발걸음을 한옥의 정원을 청소하는 한 외국인과 만날 수 있었다. 이 외국인은 젊은 시절 우리나라 한옥의 매력에 빠져 한국에 정착했고 한옥을 구입해 40년간 살고 있었다. 그는 주변의 한옥들이 하나둘 현대식 건물로 바뀌는 과정에도 한옥 고택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한옥이 낡고 불편하기도 하지만, 콘크리트의 삭막함에서 벗어나 살아 숨 쉬는 한옥의 매력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있었다. 우리 것을 지켜가는 외국인의 열정에 신기하면서도 정말 소중한 것을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건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했다. 

한옥의 멋과 함께 한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찾은 재래시장에서 황해도 이름이 들어간 간판들이 곳곳에 있는 골목과 만났다. 이 시장은 6.25 당시 고향을 떠나온 실향민들에게는 또 다른 삶의 터전이었다. 이곳에서 실향민들은 음식으로 찾을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대신했고 그것으로 낯선 서울에서 그들의 삶을 유지했다. 이곳에서 강아지떡이라 불리는 이북식 찹쌀떡을 맛볼 수 있었고 단출하지만, 푸짐한 이북식 김치만두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이 김치만두 가게는 3대째 그 명백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가게를 운영하는 할머니의 기력이 떨어진 탓에 점심시간에만 단골들을 위해 운영되고 있었다. 가게를 더는 확장하지 않고 수십 년 전 모습을 지키며 간판도 변변히 없지만, 여전히 이 만두 맛을 잊지 못하는 이들이 이곳을 찾고 있었다. 

가게의 주인은 더 많은 만두를 팔아 돈을 벌기보다는 손으로 만들어 파는 만두의 맛을 지키기 위해 가게를 널리 알리지 않고 조용히 그곳을 지켜가고 이었다. 김치, 두부, 부추로 속을 채운 이 만두는 가난하던 시절 마을 사람들을 속을 든든해 채워주었던 것처럼 이곳을 찾는 이들의 배고픔과 함께 마음의 허전함까지 채워주고 있었다. 

김치만두의 넉넉한 인심을 느끼는 사이 성곽길 넘어 석양이 드리워지고 조명들로 채워지는 서울의 야경이 나타났다. 늘 보는 일상의 모습이었지만, 그 안에서 과거의 현재가 공존하는 정릉과 삼선동을 품고 있는 이 석양이 새롭게 느껴졌다. 정릉과 삼선동에서의 하루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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