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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다양한 TV 프로그램 중 눈에 띄는 다큐멘터리가 있었다. 일제시대 기독교 목사이면서 독립운동가였던 손정도의 삶을 조명한 다큐였다. 1882년 태어난 그는 1931년 49의 젊은 나이에 그 생을 다할 때까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지금까지 크게 전해지지 않았다. 그의 삶은 굴곡진 우리 현대사와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정도는 비교적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배웠고 유학자들의 가장 큰 목표였던 과거 시험을 응시를 준비했다. 하지만 과거 우연한 기회에 접한 기독교 교리를 배우면서 그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손정도는 기독교와 서구의 신학문에 동화되어 양반 자제로서의 삶을 포기했다. 그는 상투를 자르고 조상의 신주와 사당을 없앴다. 이에 손정도는 가문에서 패륜으로 낙인찍혔고 그의 안위까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길로 손정도는 집을 나와 기독교에 귀의하였고 국내외를 넘나들며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이 과정에서 손정도는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였고 이는 그의 삶을 또 한 번 변화시켰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이 되면서 손정도는 일제의 중요한 감시 대상이 됐다. 그는 일본 총독 암살 모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일제에 의해 투옥되어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 과정에서 손정도는 가혹한 고문에 시달렸고 이후 그 후유증으로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 고난의 시간은 독립운동가 손정도를 만드는 계기가 됐다. 손정도는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한동안 전라남도 진도에서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손정도는 진도에서 그의 선교를 위한 시간으로 만들었다. 그는 진도에서 나이, 성별, 직업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선교활동을 했다. 그의 활동은 지역민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진도에서의 선교활동은 그의 유배가 풀린 이후에도 그 원칙을 이어갔다. 지금도 남아있는 정동교회 목사로 손정도는 당시 교회에서 남녀 신도들을 분리하던 장막을 걷어냈고 모두가 평등한 교회로 만들어갔다. 이전과 다른 그의 설교와 강연은 남녀노소의 구분을 받지 않고 큰 호응을 얻었고 정동교회는 크게 부흥했다. 손정도 역시 주목받는 목회자가 됐다. 

그렇게 목회자로서 큰 성공을 거두고 주목받는 인물이 된 손정도는 그의 얻은 명성을 사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이를 독립운동에 적극 활용했다. 그는 선교활동을 하면서 독립운동 조직과 크게 연결되었고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는 고종의 밀명에 따라 그의 아들인 의친왕 이강의 파리강화회의 참석과 고종의 중국 망명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다. 

손정도는 독립운동을 위해 탄탄대로였던 정동교회 목사직을 버렸다. 그는 평양으로 다시 중국으로 이동해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일제에 의해 고종의 계획의 발각되고 거사는 실패했지만, 그의 국외 독립운동은 계속됐다. 손정도는 1919년 3.1운동에도 관여하였고 이후 인적 네트워크를 독립운동에 적응 활용했다. 

상해 임시정부 수립 이후에는 의정원 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했고 안창호, 김구 등 독립운동가와 함께 무장 독립운동과 독립자금 마련에 힘썼다. 이후 손정도의 삶은 목사가 아닌 독립운동가의 삶이었다. 하지만 상해 임시정부는 일제의 방해와 지역과 이념 대립 등의 내부 갈등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그는 임시정부의 단결과 단합을 위해 온 힘을 다했지만, 임시정부의 반목과 대립은 더 격화됐다. 이에 손정도는 중국 길림에서 또 다른 길을 모색하게 된다. 

그는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또 다른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만주 길림 지역을 독립운동의 기지로 만들려 했다. 그는 선교활동을 하면서 지역의 한인들을 규합하고 독립의지를 고취시키는 계몽 운동을 하는 한편, 지역에 한인들의 정착촌을 건설하는 일을 함께 했다. 그는 고향의 사재를 털어 자금을 마련했고 땅을 매입하며 한인들이 함께 하는 이상촌을 만들었다. 이곳은 한인들의 경제적 자립을 이루며 더불어 사는 공간이었고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손정도의 이상촌 건설 사업은 일제의 만주 침략이 본격화되고 일제와 결탁한 만주지역 중국 군벌들의 탄압이 시작되면서 어려움을 맞이했다. 여기에 과거 고문의 후유증이 심해지면서 그의 건강도 급격히 악화됐다. 그럼에도 손정도는 선교와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1931년 2월 손정도는 각혈을 하며 의식을 잃었다. 의식을 잃은 손정도는 지역의 일본인이 운영하는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이미 일제에 의해 요주의 인물이 된 손정도는 그곳에서 일본 경찰의 감시속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결국, 손정도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타국에서 맞이한 원통한 죽음이었다. 

일제는 그의 장례마저 철저한 감시 속에 치르게 했고 손정도는 길림 지역의 기독교인 묘지로 안장됐다. 사후에도 그는 편히 잠들 수 없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기독교인 묘지가 훼손되면서 그의 유해는 다른 지역으로 옮겨져야 했고 1996년에야 대한민국으로 봉환되어 지금의 국립현충원에서 안식을 찾을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드라마와 같은 삶이었다. 기독교 목회자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그는 그 편안함을 포기하고 스스로 고난 속으로 들어섰고 죽는 날까지 불의에 저항하고 정의를 위해 싸우고 또 싸웠다. 그 한편으로 손정도는 민족의 단합과 단결을 위해 온 힘을 다했고 차별 없는 사랑을 베풀었다. 그는 스스로를 걸레에 비유하며 힘들도 궂은일을 도맡았다. 

이런 손정도였지만, 그의 삶은 아픈 현대사와 함께 하고 있다. 그의 첫째 아들 손원일은 이후 대한민국 해군의 창설하고 해군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며 애국자의 삶을 계승했다. 하지만 그의 둘째 아들 손원태는 그의 사후 평양에 묘소가 마련되었고 그곳에서 잠들었다. 이에는 사연이 있었다. 

손정도가 길림에서 활동하던 시절 그는 김성주라는 청년을 후원하고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김성주는 훗날 북한의 주석이 된 김일성이었다. 김일성은 손정도의 보살핌 속에 어려운 시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손원태는 그 시기 김일성과 함께 공부하고 지내며 친분을 쌓았다. 모든 것이 불확실성으로 가득했던 시절, 동고동락하면서 쌓은 우정은 세월이 지나서도 큰 잔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훗날 김일성도 그 시기를 자신의 삶에 있어 중요했음을 회고했고 손정도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6.25 전쟁을 일으킨 북한 최고 지도자와의 인연은 쉽게 외부로 알리기 어려운 일이었다. 손정도의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이 사람들에게 덜 알려진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큰 아들은 대한민국의 해군 참모총장으로 그의 둘째 아들은 평양에 영면하는 대조적인 상황은 남과 북이 이념으로 갈리며 대립하는 우리 현재의 굴곡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는 손정도가 원하는 일은 분명 아니다. 그는 임시정부가 분열하고 반목하던 시기 이를 비판하며 단합과 단결을 주장했고 종교인으로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았다. 그에게 민족은 모두가 하나였다. 이는 그가 남과 북 모두에서 존경받는 독립운동가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성탄절 다큐에서는 민감할 수 있는 그의 삶의 이력들도 함께 보여주었다. 남북과 함께 영남과 호남 등 지역과 계층, 연령 등에 따라 강한 대립과 반목을 계속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그의 삶은 분명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손정도의 삶과 그의 정신은 우리 시대에 필요한 지도자의 가치를 보여주었다. 종교인들의 타락과 부정 부패 뉴스를 자주 접하는 이 시대, 자신을 버리면서 불의에 저항하고 행동하는 성직자였던 손정도는 잊지 말아야 할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사진,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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