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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260회] 민주주의의 도도한 물결 지켜낸 4.19 혁명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0. 4. 15.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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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은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그 정신을 계승한다고 할 정도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 1960년 당시 이승만 정권에 의해 자행된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면서 시작된 시민혁명은 이승만의 하야와 그를 추종하는 자유당 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다. 우리 현대사에서 너무나 중요한 사건이었다. 역사저널 그날 260회에서는 4.19 혁명 60주년을 맞이하는 시점에 4.19 혁명의 역사적 의미와 당시의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4.19 혁명의 중요한 원인은 앞서 언급한 3.15 대통령, 부통령 부정 선거에 있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의 계속된 실정과 부정부패도 큰 원인이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오른 이승만은 대통령 연임을 지속하며 그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자신에서 유리한 정치적 환경을 만들기 위해 무리한 개헌을 지속했다. 문제는 그가 대통령 자리에 있으면서 민주주의의 원칙이 무너지고 점점 권위주의와 독재 정권의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이승만을 추종하는 세력들은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며 우상화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의 생일은 국경일로 지정되고 전 국가적으로 대대적인 축하 행사를 하기도 했다. 또한, 곳곳에 그의 동상이 세워지고 이승만은 대통령 그 이상의 존재가 됐다. 이승만의 절대 권력은 집권층의 부정부패를 불러왔다. 당연히 민심은 자유당 정권에 등을 돌렸다. 

 

 



1960년 대통령, 부통령 선거는 정권 교체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그만큼 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지명으로 급사하면서 이승만은 단독 출마로 사실상 대통령 당선이 확정적이었다. 다만, 당시 선거가 대통령과 부통령을 분리 선거한 탓에 부통령 후보였던 이기붕의 당선은 불확실했다. 그전 선거에서도 이승만은 야당 후보였던 신익희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대통령에 손쉽게 당선되었지만, 부통령 자리는 야당 후보였던 장면이 당선되었었다. 

당시 이승만의 나이는 80대 중반에 이르고 있었다. 그의 건강에 대한 우려가 컸다. 미국의 비밀 보고서에서도 이승만의 인지능력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이승만이 당선되어도 그가 임기 중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알 수 없었다. 이에 자유당 부통령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그 과정에서 금권과 관권이 모두 동원된 정권 차원의 부정선거가 투표와 개표 과정에서 자행됐다. 

우선 선거운동 과정에서 야당에 대한 방해가 극심했다. 그럼에도 장면에 대한 국민적 성원은 상당했다. 이에 자유당 정권은 투표 시 투표함에 이승만과 이기붕을 기표한 투표용지를 사전에 넣어두거나 그룹별로 투표토록 하여 야당에 투표하지 못하도록 하는 사실상 공개투표를 하도록 했다. 여기에 개표 과정에서 장면을 기표한 용지를 일부러 훼손해 무효표로 만들거나 장면의 투표용지를 이기붕을 기표한 투표용지로 바꿔치기하는 등의 방법도 사용했다. 또한, 선거인 명부를 조작해 이미 사망한 사람이나 지역주민이 아닌 사람을 등재하여 그들의 표를 이기붕의 표로 만들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선거는 사실상 의미가 없었다. 부정선거는 실제 유권자보다 투표용지가 더 많아지는 웃지 못할 상황까지 이르게 했다. 선거 결과 역시 정권의 입맛대로 조작되어 발표됐다. 결과는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기붕의 당선이었다. 하지만 이런 선거 결과에 국민들은 승복하지 않았다. 이미 부정선거가 실시될 당시 곳곳에서 이를 규탄하고 선거 무효를 주장하는 시위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에 자유당 정권은 경찰력을 동원해 강제진압하며 시위를 잠재우려 했다. 

공권력에 의해 강압적인 방법으로 부정선거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잠재우는 시점이었다. 4월 11일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었던 10대 소년 김주열이 마산 앞바다에서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최루탄이 머리에 박힌 그의 시신은 마산시민들은 물론이고 그 사진이 있는 기사를 접한 국민들을 충격과 분노에 빠뜨리게 했다. 

김주열은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여했다 실종된 상황이었다. 그를 찾기 위한 부모의 애타는 마음은 마산 시민들을 움직였고 시민들이 나서 그를 찾기 위해 나섰다. 하지만 실종된 김주열을 찾을 수 없었고 모두가 포기하는 시점에 김주열이 나타났다. 불의에 저항한 소년이 공권력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사실은 이승만 정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불러왔다. 

그 중심에는 고등학교 학생들이 있었다. 고등학교 학생들은 당시 이승만 정권의 관제 행사에 자주 동원되며 정치적 의식을 알게 모르게 키울 수 있었다. 또한, 북한 공산정권과 비교되는 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한 교육을 강화하면서 민주주의의 원칙과 그 사상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또한, 고등학교 진학이 힘들었던 시절 고등학생들은 상당한 엘리트 집단이었다. 1919년 3.1운동과 일제의 부당한 차별에 저항한 광주학생 운동을 주도한 이들도 고등학생들이었다. 이런 역사 전통까지 더해진 고등학생들은 학교를 뛰쳐나와 부정선거 규탄에 앞장섰다. 그 과저에서 김주열이 희생됐다. 

김주열의 죽음으로 촉발된 시위는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자유당 정권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깡패 조직까지 동원했다. 이정재로 대표되는 정권에 기생하는 정치 깡패 조직은 공권력이 하지 못하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시민들을 억압했다. 특히, 4월 18일 고려대생들의 시위를 급습하여 다수의 희생자를 발생시킨 사건은 4.19 혁명의 또 다른 도화선이 됐다. 

고려대생들의 피습 사건이 이후 시위대의 규모는 더 커졌다. 서울 시내에 모인 시위대는 이승만의 집무실이 있던 경무대를 향했다. 이에 경찰은 실탄을 발포하며 유혈 사태까지 발생했다. 100명이 넘는 시위대 인원이 사망했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고 강하게 맞섰다. 자유당 정권은 계엄령 선포와 함께 군대를 동원해 반정부 시위를 진압했다. 시위는 다시 소강상태가 됐다. 하지만 이미 자유당 정권에 대해 국민들은 등을 돌린 상황이었다. 

이런 시위를 촉진시킨 사건이 4월 25일 일어났다. 전국의 대학교수들이 이승만의 하야를 주장하며 시위대에 함께 했다. 나라 최고 지성들의 시위 참여는 여론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다시 시위는 활기를 띠었다. 어린 초등학교 학생들까지 시위대열에 합류했다. 계엄령으로 시내에 진입한 군대 역시 시위대를 향해 무력 진압을 하지 않았다. 여기에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자유당 정권과 이승만을 강하게 압박했다. 미국마저 이승만 정권에 등을 돌리면서 이승만은 더 버틸 수 없었다. 

4월 26일 이승만은 시민대표들과의 면담 등을 통해 국민의 뜻을 확인했고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서 그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부정부패의 정치인으로 독재자로 국민에 의해 물러난 대통령의 오명을 함께 하며 정치인으로서 최후를 마무리를 했다. 이후 하와이로 망명한 이승만은 그곳에서 쓸쓸히 삶을 마무리했다. 이후 이승만은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묘지에 묻혔지만,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긍정과 부정이 혼재하고 있다. 중요한 건 그는 자신의 권력욕을 버리지 못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했고 민주주의 되 살리려는 국민들에 의해 물러난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의 공을 덮어버리는 큰 오점이다.

4.19 혁명은 국민들의 불의와 민주적이지 않았던 정치권력에 대한 저항이었고 승리의 결과를 만들어낸 민주주의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후 5.16 군사 쿠데타에 이어진 군사 독재, 이후 80년대 또 한 번의 군사 독재를 거치며 민주주가 큰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4.19 혁명의 정신은 광주항쟁과 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져 민주 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최근 국정 농단 사태에 대한 촛불 혁명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한층 더 발전시키는 사건이었다. 이 모른 일련의 사건은 4.19 혁명이 그 기반에 있었다. 

이 점에서 4.19 혁명은 계승 발전해야 할 대한민국 민주주의 중요한 자산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국민의 열망과 거리가 있는 정치권의 행태와 우리를 실망시키고 있다. 사회는 크게 발전하고 있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정치 시스템은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이런 정치의 후진성에도 대한민국은 유지되고 계속 발전되어 가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의 저력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앞으로도 국민이 주인 되는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로 계속 발전하기 위해서 우리는 민주시민으로서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 참여하는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이는 큰 희생으로 성공한 4.19 혁명의 정신을 이어가는 길이기도 민주주의 강물을 더 힘차게 흘러가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사진,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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