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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263회] 6.25 한국전쟁 직전의 시간 속으로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0. 5. 7.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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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6.25 한국전쟁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전면 남침으로 시작한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발효될 때까지 3년 넘게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가 있었고 우리는 분단국가로 남게 됐다. 이후 남북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체제의 최전선에서 맞서게 됐고  비극적인 전쟁은 종료되지 않았고 휴전의 형태로 여전히 진행형이다.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6.25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이해 2회에 거쳐 전쟁의 전후 상황, 전개 과정을 소재로 삼아 프로그램을 꾸몄다. 263회에서는 1949년 3월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부터 전쟁에 이르기까지의 국내외 사건들을 중심으로 전쟁 직전의 긴박했던 상황들을 정리했다. 

해방 이후 소련의 지원으로 북한 지역에서 정권을 장악한 김일성은 무력을 통한 한반도의 공산화를 지속적으로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군사전력을 남한이 병력 등에서 앞서 있었다. 미국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후 미군의 철군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대규모 군사고문단을 유지하며 남한을 지원하고 있었다. 김일성으로서는 자신의 야욕을 이루기 위해 공산국가의 맹주 소련으로부터 지원이 필요했다. 

 

 



그의 모스크바 방문은 표면적으로 문화경제협정과 경제적 원조를 얻어내기 위함이었지만, 남침에 대한 소련의 동의와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소련의 최소 실력자 스탈린은 남침에 대한 부정적이었다. 소련은 전쟁에 대해 동의했지만, 선제공격에는 동의하지 않는 입장을 보였다. 소련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최강국이 된 미국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침 이후 미군이 개입한다면 국제전이 되고 이는 소련과 미국의 충돌을 의미했다. 소련은 미국과의 군사적 충돌을 우려했다. 

소련의 부정적 입장이 있었지만, 한반도의 상황은 김일성의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었다. 해방 이후 미국의 주도로 남북의 경계가 된 38선을 중심으로 남북의 군사적 충돌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지도상의 선으로 그어진 38선은 지정학적, 문화적 고려가 전혀 없는 편의에 의한 선이었다. 그 과정에서 같은 마을에서도 남북이 갈라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 남북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보다 유리한 군사적 위치를 점하기 위한 충돌을 불가피했다. 

특히, 1949년 5월 개성 송악산을 중심으로 한 고지를 놓고 남북은 연대급 규모의 부대가 충돌하는 국지전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그만큼 남북의 군사적 긴장은 무력 충돌의 위험성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김일성은 남침을 위한 시나리오를 치밀하게 준비하고 전쟁을 준비했다. 1949년 9월 수립된 전쟁 시나리오에서는 당시 남한의 영토였던 웅진반도를 전쟁 초기 장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개성, 서울을 차례로 점령하여 기선을 제압하고 2달 안에 남한의 영토를 모두 점령하는 것을 내용으로 했다. 

이런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미국은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미국은 기본적으로 북한이 소련의 영향력 하에서 독자적인 행동을 하기 어렵다고 봤다. 미국은 소련의 위협을 가소 평가하고 있었다. 당연히 북한의 위협도 그 범주 내에서 평가했다. 미국인 1949년 6월 미군 철수를 단행한 것이 이런 배경이 있었다. 미국은 철군을 하면서 남한 정부가 요청한 중무기 지원을 거부했다. 미국은 기본적으로 남한의 군사적 무장을 원치 않았다. 이에 남한의 군대는 병력에 비해 무기체계가 크게 미흡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 정권은 북진 통일론을 주창하며 북한 위협에 대해 심각성을 느끼지 않는 모습이었다. 

국제정세도 김일성의 오판을 부추겼다. 중국의 국공 내전에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세력이 승리하면서 국민당 정부는 대만으로 피신하게 됐다. 미국인 국민당 장개석 정부를 지지했지만, 직접 지원은 하지 않았다. 당시 국민당 정부는 부정부패로 민심을 잃었고 군대의 충성도 또한 떨어져 있었다. 미국은 이런 국민당 정부를 외면했다. 이는 남침 시 미국의 개입하지 않을 수 있다는 판단을 하도록 했다. 또한, 미국 국방장관 애치슨이 공산세력의 남하를 저지할 극동 방어선에서 대만과 한반도를 제외하는 선언을 하면서 남침에 대한 야욕을 더 커지게 했다. 이는 군사적 저지선의 의미였지만, 당시에는 남한과 대만이 미국의 우선 방어선에서 제외되었다는 인식을 하게 했다. 

상황의 변화는 소련의 입장도 변화시켰다. 김일성은 중국 공산당의 최고 실력자 마오쩌둥과 소련의 스탈린을 함께 설득하며 지원 약속을 얻어냈다. 소련은 전쟁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대신 탱크, 장갑차를 포함한 중화기를 북한에 지원하기로 했고 미국이 참전할 경우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도록 했고 중국이 이를 수락하면서 남침은 더 구체화됐다. 

이러한 북한의 움직임에 미국과 남한 정부는 그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북한의 군사적 움직임이 감지되었지만, 국지전 준비나 군사훈련 정도로 인지하고 전면적 남침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에 군사경계태세를 유지하기도 했지만, 중도에 해제하는 실책을 범하기도 했다. 

김일성과 소련은 남침 개시를 얼마 남기기 않는 시점에 전쟁 시나리오를 전면 수정하는 등 단기간에 전쟁을 끝내고 한반도의 공산화를 위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이런 위협을 남한과 미국은 읽지 못했다. 이는 민족의 비극을 막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1948년 남한의 다수 지식인들은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면서 남북 분단이 내전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계했다. 하지만 남북 분단은 현실이 됐고 김일성은 오판은 한반도를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 전쟁은 미군과 유엔군이 참전으로 국제전이 됐고 장기화됐다. 이에 김일성의 야욕은 무산됐지만, 전쟁의 아픔은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 남아있다. 막아야 했고 막을 수 있었던 6.25 한국전쟁 직전의 상황들은 안타까움으로 마음을 가득 채웠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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