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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274회] 1995년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그 뒷 이야기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0. 8. 12.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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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광복절에는 우리 현대사에 남을 사건이 있었다. 광복 이후에도 수도 서울의 중심부에서 조선의 본궁이었던 경복궁을 가로막고 서있던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가 시작된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일제에 의한 강점기의 중요한 상징이었던 조선총독부는 해방 이후에도 존속되어 중앙청이라 불리며 정치, 행정의 중심지였고 이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며 그 명맥을 이어갔다. 하지만 1993년 길었던 군사독재의 시절을 끝내고 들어선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에 따라 광복 50주년이 되던 해 사라지게 됐다. 역사저널 그날 274회에서는 우리 근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에 관련한 이야기로 채워졌다. 

조선총독부 건물의 건립은 1대 총독이었던 데라우치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는 일본의 조선 강제병합 이전 설치된 통감부의 수장으로 일제의 조선 강제병합에 깊숙이 관여했고 이후 일본의 수상 자리까지 이른 일본 정계의 실력자이기도 했다. 그는 총독으로 부임 후 무력에 의한 강압적인 통치를 지속했다. 그의 부임 이후 일본의 헌병대가 공권력의 중심이 됐고 언론의 자유를 말살됐다. 각 학교의 일본이 교사들은 일본도를 허리에 차고 수업을 진행했고 전 근대적인 형벌인 태형을 유지하는 등 조선인에 대해 비 인권적인 대우를 일삼았다. 이런 강압통치로 인해 쌓인 민족적 울분과 불만은 강한 저항을 불러왔고 1919년 3.1 운동으로 이어졌다.

데라우치는 조선 총독으로서 강압통치를 자행할 수 있었던 건 행정, 입법, 사법을 모두 통괄하는 조선 총독의 무소불위의 권력이 있어 가능했다. 그는 일본군 대장 출신으로 매우 권위적이고 호전적인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는 조선의 수 많은 문화재를 수탈한 범죄행위도 일삼은 인물이었다. 데라우치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공고히 할 상징물로 조선총독부 건축이라는 대공사를 추진했다.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고 긴 건축 기간이 필요한 탓에 일본에서도 이에 대한 반대 여론이 있었지만, 데라우치는 이를 강력히 추진했다. 

 

 



그가 주도한 조선총독부 건물의 건축은 당시 서구 열강의 식민 지배에 사용되는 총독부 건물들을 모델로 삼았고 인도를 지배하던 영국의 총독부 건물과 흡사한 모양으로 건축이 결정됐다. 건축 장소는 지금의 경복궁 근정전 바로 앞이었다. 이는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국격을 철저히 떨어뜨리려는 불순한 의도가 가득한 일이었다. 총독부 건축 터를 마련하기 위해 경복궁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고 원형이 손상됐다. 

그 과정에서 광화문이 철거되기도 했고 5,000여 개에 이르는 경복궁 내 전각들 중 상당수가 사라졌다. 이후 경복궁의 전각 중 남아있는 건 100개가 채 되지 않았다. 어이없게도 일제는 경복궁 전각들을 경매의 매물로 내놓아 매각하면서 총독부 건물의 건축비로 충당하기도 했다. 그 전각들은 해체되어 전각을 매입한 일본인 부호들이 자국으로 가져가 자신의 정원을 꾸미는데 사용되기도 했고 국내의 요정집을 꾸미는 데 활용되기도 했다. 또한, 일제의 조선 강제병합에 앞장섰던 이토 히로부미의 추모 사당을 만드는 데도 일부 사용됐다. 

일제는 조선총독부 건축과 경복궁에 대한 파괴행위를 통해 우리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고 일제의 조선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했다. 경복궁 외에도 조선의 궁궐 중 창경궁은 해방 후 동물원으로 격하되었고 해방 후에도 상당 기간 창경원으로 불리며 동물원으로 사용됐다. 그 외에 상당수 궁궐들은 원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파괴되는 비운을 맞이했다. 그 궁궐들은 왕이 기거하는 곳 이전에 역사적 문화적으로 상당한 가치가 있는 건축물들이었지만, 일제는 자국의 궁궐은 철저히 보호 유지관리하면서도 조선의 궁궐에 대해서는 정 반대의 조치를 하는 등 야만적 행동으로 일관했다. 

특히, 경복궁은 조선의 건국 이후 정도전에 의해 축조된 본궁으로 당대의 건축기술이 망라된 건축물이었다. 정도전은 경복궁 건립에 있어 풍수지리적 요소까지 모두 고려하였고 경복궁을 중심으로 수도 한양의 도시 계획을 실행하였다. 실제 경복궁의 주요 건축물들은 정남향으로 배치되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당시 불타고 파괴되어 상당 기간 폐허로 남기도 했지만, 조선 후기 대원군에 의해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중건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이렇게 세워지고 지켜지던 경복궁이 일제에 의해 파괴되는 모습은 당시 국민들에게는 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일제는 경복궁 자리에서도 각종 행사를 하는가 하면 여흥의 공간으로 활용하는 등 신성시되어야 할 공간을 격하시키는 일을 지속했다. 또한, 총독부 건물의 축을 정남향에서 살짝 돌려 남산에 건축된 일본 신궁을 바라보게 하는 등 풍수지리적으로도 조선의 국운을 끊으려는 치밀함도 보였다.  

이렇게 건립이 시작된 조선총독부 건축은 1916년 시작되어 1926년까지 10년에 걸린 대 공사 끝에 완공됐다. 그 기간 무려 200만 명의 인원이 동원되고 막대한 자금이 소요된 공사였다. 건축물의 규모는 당시로서는 동양 최대 규모였고 외부와 내부 모두 화려했다. 일제는 그 조선총독부 건물이 자랑스러웠겠지만, 그 조선 총독부 건물은 우리 민족의 아픔과 치욕을 고스란히 담은 상징물이었다. 

그렇게 유지되던 조선총독부 건물은 해방 이후 마땅히 철거되어야 했지만, 이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 등의 문제로 실행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 건물은 제헌의회가 열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행사가 열리는 등 우리 현대사의 중요한 장면에 배경이 됐다. 조선총독부 건물은 이후 중앙청으로 불리며 행정의 중심 건물로 활용됐다. 일제 침략의 상징물이 정부의 중요 건물로 사용되는 현실은 일제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해방 후 철거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을 감당할 여력이 없기도 했고 당시로는 조선총독부 건물만 한 규모의 청사가 없기도 했다. 

이후 경제발전이 가속화되고 민주화가 촉진되면서 조선총독부 건물에 대한 철거 여론이 본격화됐다. 이에 1986년 중앙청에 소속된 정부 기관이 광화문과 과천으로 이전되면서 조선총독부 건물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경복궁 한복판에 자리한 일제의 상징물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는 것 또한 환영할만한 일은 아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던 시절 이 건물의 방문자 중 상당수는 일본인들이었다. 

그들에게 우리의 국립중앙박물관은 과거 영광을 상징하는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일본인들에게 그들의 과거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나치에 의한 유대인의 대량 학살이 있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보전되어 과거 전쟁범죄를 기억하게 하고 반성토록 하는 교육의 장으로 사용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국립 중앙 박물관을 방문한 일본 관광객의 소회가 담긴 과거 인터뷰 장면은 이러한 일본의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렇게 우리 민족에게 목에 걸린 가시와 같았던 조선총독부 건물은 김영삼 정부의 들어선 이후 철거가 본격적으로 논의되었고 1995년 가장 위 첨탑의 제거를 시작으로 철거가 시작됐다. 이 건물에 대해 역사적 가치를 고려해 보존하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국민적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다. 

또한, 김영삼 정부는 국민적 지지를 바탕으로 과거사 청산과 함께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을 강력히 추진하는 중이었다. 일제의 중요한 흔적이었던 국민학교라는 명칭도 초등학교로 바뀐 것도 그 일환이었다. 또한, 과거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 세력의 수장으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던 전두환, 노태우 두 인물이 법적인 단죄를 받기도 했고 군내 중요 사조직인 하나회가 척결되기도 했다.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는 대한민국의 경제발전과 민주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사라져야 할 유산이었다. 당시 철거된 조선총독부 건물의 잔해 중 첨탑을 포함한 일부는 현재 독립기념관 한편의 공원에서 대한민국의 해방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남아 전시되고 있다. 

이렇게 긴 과정을 거쳐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된 이후 경복궁은 장기간에 걸친 복원 작업이 시작됐다. 복원작업은 2045년까지 이어지는 대공사다. 그 과정에서 원형이 사라진 광화문이 복원되었고 다수의 전각들도 하나 둘 복원되고 있다. 하지만, 5,000여 개에 이르던 전각이 있었던 과거의 경복궁을 모두 복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는 여전히 우리 삶과 함께 하는 일제의 잔재와 여전한 과제로 남은 친일 청산의 문제와 맞물리며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 시작이었던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는 우리의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고 대한민국의 발전을 대내외에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고 우리 현대사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는 일이었음을 분명하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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