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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277회] 근대화의 상징, 경부 고속도로의 빛과 그림자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0. 9. 4.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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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277회에서는 대한민국 현대사에 남은 대형 토목공사였던 경부고속도로 공사와 관련한 당시 시대상과 그 의미를 다시 한번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은 우리 일상의 한 부분인 고속도로지만, 경부 고속도로가 가져온 사회 경제적 파급효과는 실로 놀라웠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중요한 배경은 1960년대와 70년대 대한민국은 경제발전과 함께 한다. 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권 정권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강력히 추진하며 경제발전에 가속도를 붙였다. 경제발전은 정권의 불안전한 기반을 다지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여기에 당시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냉전 체제 속에미국은 자유 민주주의 진영의 최 전방에 있었던 대한민국의 발전이 체제 우위를 과시할 수 있는 방편이기도 했다. 이런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은 분명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남북의 극단적 대립은 양측 모두 절대 권력이 들어서면서 더 격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남과 북은 크고 작은 군사적 충돌을 지속했고 이는 경제는 물론이고 스포츠에서도 극한 경쟁 구도를 형성했다. 경쟁상대의 존재는 역설적으로 대한민국 경제 급속 성장의 또 다른 요인이었다. 

 

 



1960년까지 경제 부분에서 북한은 남한보다 앞서있었다. 전후 복구가 빨리 이루어졌고 상대적으로 풍부한 자원과 소련을 포함한 공산진영의 지원도 한몫을 했다. 이런 상황은 1960년대 남한이 급속한 경제 발전을 거듭하면서 역전됐다.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대기업 중심의 압축 경제성장은 정책은 여러 부작용이 있었지만, 경제성장을 이루는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산업의 중추가 되는 중. 화학 공업이 발전했다. 이를 바탕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다음 대통령 선거 재선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67년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그 이전에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경부 고속도로 건설을 공약했다. 서울에서 부산을 연결하는 400킬로가 넘는 고속도로의 건설은 당시 자동차의 수나 교통체제에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 구상은 박정희 대통령이 차관 도입을 위해 방문한 서독에서 본 아우토반이 큰 영감을 주었다. 

아우토반은 독일을 대표하는 고속도로로 흔히 속도 무제한 도로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아우토반은 1910년대에 구상되어 건설을 시작했고 히틀러에 의해 건설이 가속화되어 1930년 후반 독일 전역을 연결하는 도로망을 구축했다. 이는 독일의 번영의 상징물이었고 지금도 독일을 대표하고 있다. 이런 앞선 도로 시스템을 현지에서 본 박정희 대통령은 곧바로 이를 우리나라에 적용하려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위해 청와대 직속의 TF를 구성하는 한편, 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지식과 식견이 있는 인물을 건설부 장관에 임명하여 계획을 구체화했다. 

건국 이래 최대 토목사업인 만큼, 추진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지만, 당시 우리 경제 사정상 이를 충당하기 버거웠다. 여기에 만만치 않은 반대 여론이 있었다. 당시 야당에서 상당한 반대를 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고속도로 건설의 대의에는 대체로 동의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더 큰 문제는 기술력의 부족이었다. 이런 대규모 토목 공사를 한 경험이 우리에게는 없었다. 더군다나 고속도로의 개념조차 생소한 현실에서 토목공사를 진행할 역량이 부족했다. 

하지만 절대 권력을 행사하던 당시 박정희 정권을 이를 강력히 추진했고 반대 여론을 잠재웠다. 공사 재원은 세금 인상과 해외 차관 등으로 마련했고 공사계획과 실제 공사에는 군 병력을 대거 활용했다. 여기에 전 정부의 역량을 모다 사업을 추진했다. 고속도로 건설이 본격화되는 상황에서는 자신의 최측근 인사를 건설부 장관으로 임명하야 사업 추진에 더 큰 힘을 실었다. 이 과정에서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했던 공사에 민간기업으로 유일하게 참여한 현대건설은 국내 굴지의 재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는 건설과 자동차 및 조선 등 중공업을 위주로 한 고 정주영 회장의 현대그룹 신화의 시작이었다. 

절대 권력자의 강력한 사업 추진은 경제발전이라는 중요한 대의도 있었지만, 북한과의 체제 경쟁이라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경부 고속으로도 공사가 착공된 1968년은 1월 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특수부대가 대통령 저격을 위해 청와대 인근까지 침투한 사건이 있을 만큼 남북 긴장 국면이 최고조에 있었다. 

군사적 긴장관계 속에 군 병력이 대거 투입되는 토목공사는 부담이 될 수 있었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는 국민 모두가 모든 분야에서 전사가 되어야 하는 분위기였다. 당시 앞세웠던 "싸우면서 건설하자"의 구호는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경제 현장에서 일하는 국민은 산업 전사가 되어야 했고 나라는 대표하는 선수들도 전사가 되어야 했다. 경제발전과 반공이라는 목표에 온 국민은 하나가 되어야 했다. 이는 고속도로 건설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나라 발전이라는 대의에 건설, 토목 공사에서 가장 어려운 난제인 토지 보상도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68년 시작한 공사는 1970년 7월까지 2년 5개월이라는 초 단기 간에 완공됐다. 전 세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단기 간에 이뤄낸 대규모 토목 사업이었다. 

당연히 공사에 무리가 있었고 많은 근로자들이 공사 현장에서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그 수는 70명이 넘었다. 특히, 마지막 난 코스였던 옥천 터널 공사는 공기 단축을 위해 암반 지반이 아닌 약한 지반에서 공사가 강행되면서 발파 폭파 과정에서 사고가 잇따라 일어났고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지금도 이 부근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희생된 근로자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경제발전의 큰 상징물이나 중요한 성취물이었지만, 정권의 필요에 의해 졸속으로 건설이 추진 진행된 면이 있었다. 최소 비용으로 빠른 공사 완공을 목표로 한 탓에 곳곳에서 부실시공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 고속도로 건설에 400억여 원이 소요되었지만, 이후 보수를 위해 몇 배의 비용이 추가되어야 했다. 또한, 당시 교통 수요가 많지 않았던 탓에 경부고속도로의 효용성은 당시 크지 않았다. 

하지만 서울과 부산을 5시간 만에 갈 수 있는 고속도로의 건설은 사회 경제적으로 큰 변화를 불러왔다. 전국이 일일생활권이 되면서 경제, 문화적 교류가 활성화되었고 도시화가 촉진되는 계기가 됐다. 공간 이동의 편의성이 커지면서 관광산업과 레저산업이 발전할 수 있었다. 고속도로에서 승객을 수송할 고속버스도 생겨났고 고속도로 안내양이라는 새로운 직업이 인기 직종으로 자리했다. 

이렇게 경부고속도로는 전국의 공간적 거리감을 줄이고 접근성을 높이면서 그 파급력이 상당했다. 이런 순기능 이면에 경부고속도로는 영호남의 지역격차를 크게 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산업 시설이 밀집한 영남지역은 고속도로 건설도 더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었지만, 호남 지역은 상대적으로 낙후됐다. 이는 이전에 없었던 여전히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악습인 지역감정의 단초를 마련했다. 또한,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은 이후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과 유신까지 독재권력을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그럼에도 경부고속도로는 우리나라 근대화의 상징으로 그 의미가 크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경부고속도로는 수많은 국민들의 피와 땀이 함께 한 결정체이기도 했다. 즉, 경부고속도로의 역사는 누가 한 사람의 업적이 아닌 경제발전과 나라 근대화를 위해 온 힘을 다한 모든 국민들이 역사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경부고속도로의 가치는 이런 명암을 모두 알아야 그 의미를 더할 수 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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