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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에서 조선 건국까지의 과정은 한 나라가 망하고 새로운 나라가 들어서는 전환기였던 탓에 여러 역사적 사건들로 가득했다. 그 사건들의 중심에는 정도전과 정몽주가 있었다. 이들은 고려 말 새로운 정치세력인 신진사대부의 주축을 이루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정도전은 조선 건국의 조력자와 설계자로 정몽주는 고려는 마지막까지 지킨 충절의 상징으로 상반된 길을 걸었다. 이 둘이 왜 이렇게 다른 삶을 살아야 했는지 역사 예능 선을 넘는 녀석들에서 2회에 걸쳐 다뤘다. 

정도전과 정몽주가 정치 일선에 등장한 건 고려 말 극심한 혼란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었다. 고려는 중기 무신정변 이후 긴 무신들의 집권기와 몽고 침입과 그들의 지배를 통해 국가 운영의 시스템이 파괴되고 권문세족이라는 몽고가 세운 원나라와 결탁한 소수의 귀족들의 나라의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구조가 됐다. 이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이해 백성들에 대한 수탈을 자행했고 백성들의 삶은 나날이 피폐해졌다. 이는 백성들 사이에 변화가 대한 갈망을 더 크게 했다. 

이런 시기 등장한 공민왕은 고려의 부흥을 위한 마지막 희망이었다. 공민왕은 원나라가 쇠약해지고 신흥국 명나라가 그 세력을 키워가는 국제정세의 변화를 읽었고 반원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그는 원나라에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는 한편 친원 세력들에 대한 대대적 숙청을 단행했다. 이와 동시에 원나라 지배 시기에 사라졌던 고려의 국가 시스템을 복원했다. 비 정상의 정상화를 위한 노력을 위해 공민왕은 권문세족들에 대항할 정치 세력이 필요했고 유학 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신진사대부 세력이 고려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했다. 

 

 



이들은 불교가 국교인 고려에서 유학을 이념적 기초로 삼았고 대지주가 대부분이었던 권문세족과 달리 지방의 중소 지주, 말단 관직인 향리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념적, 경제적 지역적으로 당시 고려의 정치 중심 세력인 권문세족과는 크게 대립되는 세력이었다. 신진 사대부 세력들은 외교적은 원나라를 배척하고 신흥 강국 명나라에 기운 친명 정책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리고 이 신진사대부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정몽주와 정도전이었다. 이들은 신흥 정치 세력을 이끌며 고려를 개혁하고자 하는데 뜻을 모았고 정치적 경로를 함께했다. 하지만 공민왕의 개혁이 내부적으로 권문세족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의 반발과 외부적으로 북쪽의 홍건적과 남쪽의 왜구들의 거듭된 침략 속에 좌초되고 공민왕이 암살되면서 권문세족의 세력을 크게 위축됐다. 다시 권력을 잡게 된 권문세족 세력은 신진사대부에 대한 대대적 숙청과 함께 친명에서 친원으로 외교정책을 수정했다. 이 과정에서 정몽주와 정도전 역시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이들의 행보는 점점 엇갈리기 시작했다. 정몽주는 온건 개혁 노선을 지속하고 다시 중앙 정계로 돌아갔지만, 정도전은 급진 개혁 노선을 더 공고히 했다. 권문세족과 상대적으로 더 강한 대립각을 세웠던 정도전은 쉽게 정계로 복귀하지 못했다. 큰 좌절의 시간이 될 수 있었지만, 정도전은 긴 유배생활을 통해 일반 백성들의 비참한 삶을 몸소 체험하고 이해하게 됐고 그의 개혁 사상은 고려 왕조를 뒤엎는 역성혁명의 구상까지 이르렀다. 정도전의 유배 기간에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우정을 이어가던 두 절친의 정치 노선이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혁명 계획을 구체화한 정도전은 이를 위해 강한 힘을 필요함을 깨달았고 당시 고려 백성들의 신망을 얻고 있었던 신흥 무장세력 최영과 이성계에 주목했다. 정도전의 선택은 이성계였다. 이성계는 수많은 전투에서 전공을 세우며 신망을 얻었지만, 수도 개경에서 먼 함경도 지방 출신으로 정치적 기반이 취약했다. 반면 최영은 명문가 출신으로 정관계의 지지를 함께 받고 있었다. 정도전은 비주류 이성계가 혁명을 함께 도모할 인물로 더 적당하다 여겼다. 

정도전은 함경도 지방에 머물던 이성계의 군 진영을 찾아 이성계를 만났고 긴 시간 그와 함께 했다. 그 과정에서 정도전은 이성계가 혁명을 위한 중요한 칼이 될 수 있음을 확신한 것으로 보인다. 정도전은 이후 이성계의 추천으로 정계에 복귀했고 정치적으로 입지를 다졌다. 이미 이성계와 교분이 있던 정몽주도 정도전 개혁에 초기에는 동참했을 가능성이 크다. 정도전으로서는 그의 역성혁명 계획을 드러내기보다는 세력을 강화하는 것이 우선이었고 때를 기다렸을 가능성이 크다. 중요 무장세력인 이성계와 정도전, 정도전의 신진 사대부 세력의 조합은 상당한 힘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신진사대부 세력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 명나라의 무리한 요구에 대응해 고려는 우왕과 최영을 중심으로 군사적 대응을 모색했고 요동정벌을 시행에 옮겼다. 대규모 정벌군이 구성됐다. 요동지역이 명나라와 원나라의 다툼 속에 무주공산 상태에 있는 틈을 노린 담대한 군사작전었다. 하지만 당시 고려의 국력으로는 이를 실행하기 버거운 일이기도 했다. 정벌군의 지휘관이 된 이성계는 요동정벌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이에 반대했다. 하지만, 우왕과 최영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영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정벌군은 조민수와 이성계가 정벌군을 이끌고 압록강에 있는 섬 위화도에 이르렀다. 

여기서 정벌군은 긴 장마로 인해 도강을 하지 못하고 발이 묶이고 말았다. 이성계는 더 이상의 정벌이 부당함을 주장하며 상소를 올렸지만, 우왕과 최영은 이을 묵살했다. 마침 최영은 우왕의 요청으로 직접 군사를 이끌지 못하고 개경에 머물고 있었다. 이는 이성계가 주도한 위화도 회군의 빌미를 주었다. 철군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이성계는 전쟁의 무모함을 주장하며 정벌군을 설득했고 말머리를 돌려 개경으로 향했다. 대부분의 군대를 정벌군에 투입한 고려는 이성계 군대를 막을 수 없었다. 

결국,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는 우왕과 최영을 숙청하고 고려 정계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이는 정도전의 혁명을 더 강하게 실행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이후 고려 정계는 역성혁명을 꿈꾸는 개혁파와 고려의 존속을 주장하는 보수파로 나뉘어 대립했다. 보수파는 우왕의 아들 창왕을 옹립하며 개혁파의 구상을 흔들리고 했지만, 이내 힘을 열세 속에 창왕이 폐위되고 이성계가 옹립한 공양왕이 고려 왕이 되면서 힘의 균형이 무너졌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는 권문세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과감한 토지개혁을 통해 민심까지 그들 편으로 만들었다. 백성들의 지지까지 등에엎은 개혁파는 반대파를 숙청하면서 권력을 더 공고히 했다. 고려의 운명은 점점 바람앞에 등불신세로 변해갔다.

이런 대립 속에서 정몽주는 고려를 지키려는 보수파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정도전은 역성혁명을 주도하는 개혁파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분명한 정적 관계가 되고 말았다. 정도전은 당시 고려 정계와 학계에서 존경받는 정몽주를 혁명 세력에 포함시키려 했지만, 정몽주는 온건 개혁을 지속 주장했다. 이런 대립은 점차 심화됐고 극한 대립을 불러왔다. 고려 왕조를 존속시키려는 정몽주와 이성계를 왕으로 한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 했던 두 정치가의 싸움은 정몽주가 이성계와 정도전을 제거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선죽교에서 이방원에 피살되면서 막을 내렸다. 이 사건은 이방원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는 계기가 됐다. 고려의 마지막 버팀목 정몽주가 피살된 이후 몇 개월 안돼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은 폐위되었고 새로운 나라 조선의 왕이 됐다. 

이성계의 킹 메이커가 된 정도전은 조선의 정치, 경제 등 전반적인 건국을 주도하고 설계하며 최고 실력자가 됐다. 정도전은 왕이 아닌 신하들의 중심이 된 오늘날의 입헌군주제외 비교할 수 있는 통치 시스템을 만들고 이를 적용하려 했다. 그만큼 정도전의 위세는 대단했다. 이성계 역시 정도 전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렇게 정도전은 역사의 승자로 남는 듯 보였지만, 정도전의 정치 이상은 강력한 왕권을 주창하는 세력과의 충돌을 불러왔고 이방원은 기습 공격으로 정도전과 그의 추종 세력을 제거하고 실권을 잡았다.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이었던 정도전은 졸지에 간신과 역적이 됐고 이후 조선 역사에서 언급조차 할 수 없는 인물로 긴 세월을 보내야 했다. 정도전으로서는 자신의 혁명을 완성하지 못하고 자신의 주도해 만든 나라에서 잊히고 말았다. 

반대로 마지막까지 고려를 지키려 했던 정몽주는 그를 제거한 이방원에 의해 복권되어 충절과 충신의 상징으로 조선왕조 내내 칭송을 받았다. 살아서 정치적 패배자였던 정몽주가 죽어서 진짜 승자가 된 셈이었다. 이렇게 역전된 관계는 조선말 고종이 즉위하고 대원군에 의해 정도전이 복권되면서 비로소 대등한 관계로 복원됐다. 이들은 모두 유학을 이념을 한 사대부가 지배하는 나라를 꿈꾸는 공통점이 있었고 정치적 이상도 같았지만, 방법론에서 차이를 보이며 대립했고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과정에서 희비가 엇갈렸다.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나 고려말과 조선초를 대표하는 중요한 인물로 함께 주목받고 있다. 

선을 넘는 녀석들에서는 이 두 인물의 삶의 궤적을 함께 따라가며 왜 이들이 다른 길을 가야했는지 당시 시대적 배경과 사건을 따라가며 알기 쉽게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누가 선이고 악인지 누가 옳고 그른지를 따지는 이분법적 시각에서 벗어나 각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이해시켜 주었다. 중요한 건 이들 모두 백성들이 보다 잘 살수 있는 새로운 나라를 꿈꾸는 인물들이었고 그 나라가 조선으로 구현되었다는 점이다. 그 점에서 이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누구에게 기울 수 없어 보인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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