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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 녀석들] 고종과 대원군의 천륜마저 끊어놓은 비정한 정치 그리고 권력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0. 9. 21.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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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예능 선을 넘는 녀석들에서는 2주에 걸쳐 고종과 흥선대원군을 중심으로 조선말의 근현대사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고종과 흥선대원군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부자관계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아버지로 젊은 시절 당시 왕권을 능가하는 세도가인 안동 김씨 세력의 눈을 속이기 위해 방탕한 생활을 자초하는 등의 방법으로 자신의 능력과 야망을 숨겼고 기어이 아들을 왕위에 올려 그 섭정으로 10여 년간 권력의 정점에 있었다. 

고종으로서는 자신을 왕위에 올린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한없이 고마운 인물이었지만, 정치는 이들 부자간의 관계를 권력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하게 하는 정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프로그램에서는 권력을 놓고 벌인 부자간의 정치적 대결과 그 과정에서 조선과 대한제국, 일제에 의한 패망까지의 과정을 함께 살폈다. 

흥선대원군은 말 그대로 풍운아였다. 그는 어린 시절 비범한 능력을 인정받고 조선 후가 대학자이자 예술가인 추가 김정희의 사사를 받을 정도로 총명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왕을 세울 수 있고 권력에 위협이 되는 인물은 왕족이라고 해도 거침없이 제거할 수 있는 안동 김씨 세력에 눌려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겉 보이기에는 전혀 왕족이라 할 수 없는 삶을 살았던 흥선대원군이었지만, 그 마음속에서 나라를 경영하고자 하는 큰 야망이 있었다. 그는 사전 정지작업으로 순조의 아들이었던 효명세자의 세자빈이었던 신정왕후 조씨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궁궐의 가장 큰 어른인 대왕대비가 된 조씨는 후사가 없었던 임금 철종의 후계를 지명할 권한이 있었다. 마침 철종이 승하하면서 비어있던 왕위에 조대비는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을 왕으로 지명했고 그는 조선 26대 왕 고종이었다. 그때까지 흥선군으로 불리던 흥선대원군은 왕의 아버지로 흥선대원군으로 불리게 됐다.  

 

 



당시 고종은 12살의 나이로 조대비가 섭정에 나섰지만, 얼마 안가 섭정의 권한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 돌아갔다. 흥선대원군으로서는 긴 세월 안동 김씨 세력의 핍박을 이겨내고 권력의 중심에 선 순간이었다. 이후 10여 년간 흥선대원군은 실질적인 왕으로 절대 권력을 행사했다. 

흥선대원군은 그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던 정책을 과감히 추진했다. 수십 년간의 세도정치 기간 무너진 조선의 국가운영 시스템을 복원했다. 중요 정책 결정기관인 비변사가 사라지고 의정부가 제 기능을 찾았다. 군제는 삼군부를 부활시키며 왕권을 뒷받침할 친위대 역할을 하게 했다. 그 외에도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리는 정책이 추진됐다. 또한 백성들에게는 최악의 지역 수탈 기관으로 전락한 서원을 47개소만 남기도 철폐하는 가 하면 양반들에게도 세금을 걷어들이는 호포제를 실시했다. 이는 조선왕조 기간 누구도 하지 못한 개혁 정책으로 일반 백성들의 큰 지지를 받았다, 이런 여론의 지지는 그의 권력기반을 더 공고히 하는 요소가 됐다. 

하지만 그의 집권기가 빛으로만 채워진 건 아니었다. 그는 왕권의 권위와 나라의 권위를 되살리기 위해 긴 세월 폐허로 방치되어 있던 경복궁 중건을 강력한 추진했다. 당시 빈약한 국가 재정으로는 무리한 공사였지만, 흥선대원군은 각종 세금을 징수하고 자금 조달을 위하 화폐 발행을 강행하는 등의 방법으로 공사를 지속했다. 그 과정에서 상당수 민심이 돌아섰고 이는 그가 추후 실각하는 원인이 됐다. 

이에 더해 흥선대원군은 안으로는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면서도 외교적으로는 일체의 수교와 통상을 거부하는 쇄국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웃나라 일본이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급속히 근대화를 추진하고 국력을 키우고 청나라가 서구 열강의 힘에 밀려 몰락하는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 조선 역시 새로운 외교정책을 만들어갈 필요가 있었지만, 흥선대원군은 나라의 문을 굳게 잠그는 쇄국정책으로 일관했다. 

그 과정에서 조선에 급속히 세력을 확산하던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강행하여 다수의 교인들의 희생되기도 했다. 이는 이후 프랑스군이 침략하는 병인양요를 불러왔고 미국의 침략한 신미양요로 이어졌다. 대원군은 두 차례 서구 세력의 침략을 막아낸 이후 더 강력히 쇄국정책을 시행했다. 이는 당시 다수 여론의 뜻이기도 했다. 이렇게 대원군은 쇠락한 조선을 다시 일으켜 세울 개혁가로 여론을 권력 강화에 이용할 수 있는 능수능란한 정치가의 면모를 함께 보여주었다. 

이런 대원군의 강력한 권력은 그의 아들 고종에 의해 무너졌다. 12살에 왕위에 올라 성인이 된 이후에도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영향력 아래 놓여있었던 고종은 중전 민씨의 세력과 흥선대원군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세력과 손을 잡고 친정을 발표하며 아버지를 실각시켰다. 이렇게 정치 상황에 따라 갈라진 부자간의 관계는 흥선대원군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회복되지 않았다. 흥선대원군은 실각 이후에도 권력에 대한 마음을 접지 않았고 정치 일선 복귀를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고종과 중전 민씨와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중전을 비교적 그 힘이 크지 않은 민씨 세력을 선택했지만, 그 선택은 결과적으로 큰 실책이 됐다. 

이렇게 정적 관계가 된 고종과 흥선대원군은 계속 대립했다. 고종은 사실상 흥선대원군을 가택연금하며 정치 일선에 복귀하지 못하도록 했고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세력을 규합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이런 정치적 대립 속에 고종은 쇄국정책을 버리고 개화정책과 근대화 정책을 과감히 추진했다. 하지만 고질적인 권력층의 부정부패는 민심을 잃게 했다. 특히, 새롭게 집권세력이 된 민씨 정권은 과거 세도정치시대와 다를 것이 없는 부정과 비리로 얼룩진 정권이었다. 중전 민씨 역시 개인적인 일에 국고를 탕진하는 등 비난 여론을 받고 있었다. 

이런 백성들의 불만은 1882년 구식 군대의 무력 봉기인 임오군란으로 폭발했고 흥선대원군이 사태 해결을 명분을 권력을 다시 잡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정치 복귀는 청나라에 그가 납치 구금되면서 1 달여 만에 막을 내렸고 고종은 다시 권력을 되찾았다. 이후 흥선대원군이 조선으로 돌아왔지만, 고종은 흥선대원군을 더 강하게 압박하며 정치 일선 복귀를 막았다. 그 과정에서 흥선대원군과 민씨 세력은 서로를 겨냥한 테러 사건에 연루되는 등 극한 대립을 멈추지 않았다. 서구 열강과 일본의 조선 침탈이 본격화되는 과정에서 이런 집권층의 대립은 적전 분열의 모습이었고 나라를 더 기울게 했다. 

이런 고종과 흥선대원군의 극한 대립은 동학혁명과 청일전쟁, 1895년 훗날 명성황후로 추종된 중전 민씨의 일본 낭인들에 의한 피격 사건인 을미사변과 이어진 아관파천 등 커다란 역사적 사건 속에서도 계속됐다. 을미사변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흥선대원군은 이후 남아있던 민심마저 잃고 칩거 생활에 들어갔고 가장 중요한 정치적 파트너라 할 수 있는 중전 민씨를 잃은 고종은 홀로 외롭게 흔들리는 조선을 이끌어야 했다. 

이 위기에서 고종은 나름의 정치력을 발휘하며 홀로서기를 하려 했다. 그는 을미사변 이후 심각해진 일본의 내정간섭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한 아관파천을 감행한 이후 친일 내각을 친러 내각으로 교체한 이후 환궁하였고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며 초대 황제 자리에 올랐다.

1897년 대한 제국을 선포하는 기일에 고종은 과거 청나라 사신들을 접대하던 장소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환구단을 만들고 성대한 황제 즉위식을 열었다. 지금도 상당 부분이 호텔로 바뀌었지만, 그 환구단의 흔적은 서울 도심에 남아있다. 이를 통해 고종은 길었던 중국과의 사대 관계를 청산하는 한편 대한제국의 자주성과 존재감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이후 고종은 을미사변 이후 미뤄왔던 중전 민씨의 장례를 성대히 열어 비명에 간 민비를 명성황후로 예우하며 나라의 근간을 다시 세우려 했다. 

이런 눈에 보이는 것 외에 고종은 대한제국 수립과 함께 근대적인 법과 제도를 과감히 도입하는가 하면 근대 문물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 대한제국 시기 전기가 수도 서울에 보급되었고 전차가 주요 교통수단으로 보급되었다. 이에 당시 대한제국의 수도 서울은 매우 발전된 도시의 면모를 보였다. 

그가 머문 덕수궁은 동양과 서양의 건축 기술이 결합한 궁궐이라는 독특함이 있었다. 고종은 외국 공사관들이 밀집한 덕수궁을 황궁으로 하면서 자신에 대한 신변 위협을 덜어내고 외교활동을 활발히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하지만 고종은 황제 즉위 이후 끊임없이 신변의 위협을 느껴야 했다. 그는 식사를 함에 있어서도 외국인 고문이 조리 과정을 감시하고 그 음식을 잠금장치가 된 가방으로 이동해 식사하였다. 그럼에도 고종은 그가 즐기던 커피에 독약을 탄 독살 미수 사건을 겪기도 했다. 미수에 그쳤지만, 훗날 조선의 마지막 임금이 된 아들 순종이 그 커피를 마시고 중독되어 평생 후유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지속한 그의 근대화 정책도 나라의 재정을 고려하지 않는 무리한 정책으로 나라 살림을 더 궁핍하게 했다. 대표적으로 덕수궁에 건축된 석조전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건축물이었지만, 지금 가치로 수천억 원이 소요되는 공사였다. 고종은 부족한 공사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국가예산은 황실 예산으로 전용하는 무리수를 두기도 했다. 또한, 대한제국 최초의 군함이었던 양무호 도입도 시대에 뒤떨어진 군함을 비싼 가격에 매입하면서 대표적 예산 낭비의 사례가 되고 말았다. 이 외에도 고종은 황실의 권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호화로운 궁중 행사를 수차례 여는 등 사치스러운 생활을 지속하면서 큰 오점을 남겼다. 

그가 야심 차게 추진하던 외교적 노력도 그에 소요된 국가 예산 대비 그 효과는 미미했다. 고종은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얼마 전 미국 대통령 딸의 대한제국 방문을 적극 추진하고 그를 미국 대통령의 공주로 극진히 대접했지만, 국제적 망신만 당하고 말았다. 당시 미국은 이미 일본과 필리핀과 대한제국의 지배권을 상호 인정하는 밀약을 한 상황이었다. 고종은 외교로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지켜내려 했지만,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국제정세의 냉혹함을 알지 못했다. 냉정히 고종의 대한제국은 빈 껍데기뿐인 나라에 불과했다. 그는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최초의 황제로서 변하는 시대상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전제군주적 성향을 버리지 못했고 권력을 독점하려 했다. 그는 자신을 중심으로 대한제국이 하나가 되길 바랐겠지만, 민주주의적 사고가 점차 국민들에게 퍼져가는 시대적 흐름에 역행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고종은 마지막까지 나라를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 임금이었다. 그 과정에서 잘못된 부분도 다수 있었지만, 고종은 대한제국의 상징이었다. 그는 을사늑약 이후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까지 나름의 방법으로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키려는 시도를 지속했고 강제 퇴위된 이후에도 독립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일설에는 고종을 중국으로 망명시켜 망명정부를 세우려는 시도도 있었다 전해진다. 

이런 고종은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어도 일제에 있어 요주의 인물이었다. 1919년 고종이 갑작스럽게 승하하자 그에 대한 독살설이 널리 퍼진 이유이기도 하다. 고종의 독살설을 강력히 뒷받침하는 기록들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고종은 아들 순종보다 더 건강했고 강한 삶의 의지가 있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승하는 국가적으로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의 승하는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등 독립운동을 촉진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의 공과를 떠나 고종은 조선과 대한제국,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우리 근현대사를 이어주는 인물이었다. 

이렇게 고종과 흥선대원군은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는 권력의 냉혹한 현실 속에서 천륜까지 저버리는 관계로 역사에 남았다. 고종은 흥선대원군이 사망하고 그의 장례에도 참석하지 않을 정도로 그를 외면했다. 일설에는 장례식 당일 크게 통곡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고종이 장성한 이후 흥선대원군과 고종은 서로에 대한 미움과 원한 극한 대결이 시간이었다. 

이는 조선, 그리고 대한제국으로 이어지는 시기 나라에도 큰 불행이었다. 두 사람이 원활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정치 파트너로 서로를 인정했다면, 조선의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들의 극한 대립은 외부의 위협 속에 쇠약해지는 나라를 더 기울게 했다. 결과적으로 고종과 흥선대원군은 책임 있는 집권층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결국, 고종과 흥선대원군의 역사는 우리 근현대사의 어두운 단면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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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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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21 14:45 신고
    한 사람의 삶에도 수 없이 많은 사연과 갈등, 사건들이 있는데,
    그 시기에 살았던 최고 권력자들에 붙어 있는 이야기들은 어마어마하겠지요.
    우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들.
    천천히 읽어보면서 배워보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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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21 14:58 신고
    둘이 화합했다면 국운이 좀 달라졌을까요...부모 자식간에도 참 관계가 쉽지 않은 거 같아요. 잘 보고 갑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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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21 15:01 신고
    정치의 비정함, 권력의 무서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즐거운 한 주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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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21 17:24 신고
    부자간의 대립으로 조선말기 역사가 핏빛으로 변하기도 했는데요.
    흥선대원군이 없었다면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지 자뭇 궁금해지는 시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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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21 17:33 신고
    저도 방송을 보았는데 고종의 생일 부분에서는 어이가 없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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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21 17:49 신고
    권력의 맛을 한번 들이면 애미 애비도 몰라보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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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21 21:28 신고
    잘 보고 공감하고 갑니다^^
    좋은 한주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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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22 06:30 신고
    참 아쉬운 역사이기도 합니다
    되돌릴수 있다면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