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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현대사의 사건들을 따라가고 있는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1970년대 고도성장기 중요한 사건이었던 강남 개발, 새마을 운동에 이어 283회에서 전태일의 삶을 따라가 보았다. 전태일은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을 했다. 그의 죽음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산업화 과정에서 열악하기만 우리 노동여건을 인식하게 하고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하는 시발점이 됐다. 

1970년 대한민국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대표하는 정부 주도의 수출 중심의 성장 정책으로 빠르게 산업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었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어 전국 1일 생활권이라는 개념이 생겨났고 각종 산업이 발전했다. 그 과정에서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며 우리 사회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수출은 우리 경제를 부흥시키는 중요한 방법이었고 정부는 매년 수출 목표를 향상 조정하며 이를 독려하고 지원했다. 

1970년대 대표적 수출산업은 노동집약형 산업이 섬유, 봉제산업이었다. 노동집약형 산업은 말 그대로 최소한의 인건비로 최대한의 사람들을 고용해 제품을 생산하는 구조로 자본과 기반 시설이 부족했던 우리에게는 최단기간 수출 성과를 낼 수 있는 산업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노동자들의 희생을 전제로 했다. 그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시골에서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온 젊은이들이었다. 

도시화의 급속한 진행은 도시와 농어촌의 소득 불균형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물가 억제를 위해 저곡가 정책을 지속하면서 농촌은 농사로 수익을 내고 삶을 영위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자신의 땅이 없거나 소규모인 빈농들의 삶은 더 힘들어졌다. 이에 젊은이들은 10대 때부터 고향을 등지고 일자리를 찾아 돈벌이를 위해 도시로 도시로 모여들었다. 풍부해진 노동력을 자연스럽게 저임금 구조를 불러왔다. 

 

 



당시 섬유산업의 대표적 장소는 지금의 동대문 시장 일대였다. 그곳 중 지금도 성업 중인 평화시장은 우리 섬유산업의 70% 이상을 담당하는 관련 산업의 메카였다. 그곳에는 500여 개의 소규모 봉제 공장에서 2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일했다. 극히 부족한 공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일하는 환경은 열악하기만 했다. 소위 벌집 공장이라 불리는 공장들은 수직으로 일할 공간을 나누었고 환풍기 시설은 물론이고 수도나 화장실 시설도 없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노동자들은 허리조차 피기 힘든 자신의 자리에서 하루 15시간 이상의 노동을 했다. 그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10대의 어린 여공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일당은 하루에 50원 남짓으로 당시 한 끼 식사가 70원 정도였을 고려하면 최소한의 삶조차 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 일자리라도 지키기 위해 노동자들은 힘든 노동을 매일매일 이어갔다. 당연히 건강상 문제가 발생하는 건 다반사였다. 당시 평화시장의 고용주들은 그런 노동자들의 근로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근로 환경 개선에는 무관심했다. 그들은 한 끼 식사로 당시로는 큰돈인 200원을 지출하는 부유한 삶을 살았지만, 그들에게 노동자는 제품 생산의 수단 그 이상이 아니었다. 심지어 어린 여공들의 야근을 위해 각성제를 주사하는 등의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러 착취 구조는 그 시대 평화시장은 물론이고 수출역군이고 산업 전사로 칭송받았던 노동자들에게는 공통된 일이었다. 22살

가족과 함께 서울로 상경한 전태일은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초등학교조차 마칠 수 없었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렇게 그는 평화시장에서 견습공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하루 일당 50원을 받았지만, 당시 그의 숙소였던 여관의 하루 숙박비 120원에 턱없이 부족했다. 

전태일은 공장일 외에 구두닦이 등 닥치는 대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의 성실했고 일에도 재주가 있었다. 그는 몇 년 후 미싱사가 되어 보다 많은 급여를 받았고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지만, 그의 열악한 노동 현장을 몸소 경험하면서 어려운 처지의 노동자들 특히, 나이 어린 여공들의 어려움을 돕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전태일은 자신의 식사 비용을 더 어른 여공들의 식사를 위해 사용하거나 어른 여공들의 간식거리를 사주면서 차비가 없어 걸어서 평화시장에서 도봉구의 자신의 숙소까지 걸어서 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만큼 전태일은 마음이 따뜻하고 주변의 어려움을 돌볼 줄 아는 인물이었다. 

이런 전태일에게 함께 공장에서 일하던 여공이 각혈을 하는 등 건강 이상에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공장에서 쫓겨나야 하는 현실은 큰 충격이었다. 전태일은 이들을 도울 방법을 찾았다. 그는 미싱사보다 공장에서 보다 더 높은 지위와 권한을 가질 수 있는 재단사가 되기 위해 급여가 반 이상이 깎이는 불이익에도 재단사 보조부터 다시 일을 배워 재단사가 됐다. 당시 재단사는 공장장으로서 공장의 주요 의사결정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그가 일하는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근로환경은 변함이 없었다.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된 건 그에게 큰 구원의 손길 같았다. 대한민국의 근로 기준법은 1950년대 이미 제정되고 있었고 그 조항은 지금의 근로기준법에 유사할 정도로 현대적이었다. 근로기준법에는 근로자들의 근로시간이나 보수, 연령 제한 등 기본적인 사항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법이 있음에도 당시 우리 사회는 그 법의 존재를 모르거나 애써 외면했다. 근로기준법의 준수를 감시 감독해야 할 노동관계 기관들 역시 사업자들과 결탁되어 있었다. 

전태일은 독학으로 근로기준법을 수년간 독학하고 공부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평화시장 재단사들의 모임은 바보회를 만들었고 근로환경 개선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설문들의 방법으로 지역 노동자들의 근무여건을 파악했고 이를 자료화하여 당시 지역 노동청에 이를 진정했다. 그의 순수한 열정은 자본과 권력이 결탁한 거대한 힘에 그대로 그대로 무시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이 그리고 권력이 노동자들의 편이 아님을 알게 됐다. 그가 원하는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더 권력과 자본이 결합한 거대한 카르텔과 맞서야 함을 깨닫게 됐다. 

이런 일련의 활동으로 전태일을 다니던 공장에서 해고됐다. 당시로서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나선다는 건 무모한 일이었다. 그가 이일에 앞장선 건 가시밭길을 자초한 일이었다. 전태일은 재단사로서 보다 편한 근무여건과 보다 많은 급여를 받았지만, 노동 현장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고 큰 불이익을 받아야 했다. 공장에서 해고된 후 전태일은 지금도 전해지는 그의 노트에 깨알같이 적힌 사업계획서를 통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사업 구상을 하며 이를 위해 노력했지만, 현실의 벽에 막혀 좌절하고 말았다. 

다시 평화시장의 재단사로 일하게 된 전태일은 열악한 근로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다시 이어갔다. 그는 뜻을 같이하는 노동자들과 조직을 만들었다. 그는 평화시장 근로환경을 외부에 알리기 위한 노력을 했고 한 신문사에서 관련 보도가 나가면서 변화의 가능성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 보도가 나간 1970년은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 이후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이었다. 이는 정부의 노동정책에 대한 비난 여론을 들끓게 했다. 정권으로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고용주들과 지역 노동청은 국정감사 기간까지만 기다려 달라는 제안을 했다. 전태일과 그와 함께 하는 노동자들에게는 한 줄기 빛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바람은 다시 허물어졌다. 국정감사 후 여론이 잠잠해진 시점에 노동자들과의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고 상황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에 전태일은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현실에 큰 좌절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노동자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근로기준법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준비하며 또 한 번 세상을 향해 근로조건 개선의 외침을 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공권력에 의해 막히고 탄압을 당했다. 이에 전태일은 그가 화형식을 거행하려던 근로기준법 책과 함께 그의 몸에 불을 붙였다. 그는 자신의 몸이 타들어가는 순간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쳤다. 그리고 그는 온몸에 화상을 입고 병원에서 22살 짧은 생을 마무리했다. 

그는 그를 찾아온 어머니를 향해 자신이 하늘에 작은 구멍을 만들었고 그 구멍을 조금만 더 열어달라고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대신 이뤄달라고 하며 마지막 유언을 했다. 그렇게 숨이 멈출 때까지 전태일은 노동환경 개선과 근로기준법이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적용되기를 소망했다. 전태일의 어머니와 그의 형제들은 그의 유언을 받들어 이후 노동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전태일은 분신과 죽음은 개인의 일이 아니었다. 그의 분신은 이후 열악한 노동환경 등 노동자들의 문제에 대해 사회에 큰 관심을 불러왔다. 이는 대학생을 비롯한 사회 지식층에게도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민주화 운동 이전에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됐다. 이후 많은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이 노동 현장에 뛰어들었고 노동운동에 헌신했다. 전태일이 생전에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면서 자신에게 가르침을 줄 대학생 친구 한 명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의 바람이 사후 이루어진 셈이었다. 

전태일의 분신은 1970 년대 산업화의 어두운 일면을 그대로 반영하는 일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노동자들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전태일의 분신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이 본격화되는 하나의 중요한 시발점이 됐다. 이후 노동자들은 노조를 결성하거나 부당한 대우에 맞서 함께 투쟁하는 일이 늘었다. 당시 야당과 종교계를 중심으로 이런 움직임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의 분신은 이후 노동운동의 중요한 횃불이 됐다. 지금도 매년 11월 13일 그가 분신한 날에는 그를 추모하는 기념식이 열리고 있다. 

이렇게 시작한 우리 노동운동은 민주화를 거치면서 근로환경개선과 처우 개선 등의 성과를 냈다. 근로기준법과 사회 전반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열악한 환경 속에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노동자들이 여전히 많다. 이제는 기득권층이라는 비난을 받는 대기업 근로자들 등 상층부의 근로자들 외에 하층 노동자들의 삶은 여전히 힘들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유래없는 단기간의 경제발전을 이루고 부강한 나라가 되었지만, 그 과실은 함께 노력한 이들에게 고루 배분되지 못했다. 이는 전태일이 살았던 시대에도 현재도 여전한 문제다. 

한편에서 노동운동에 대해 이념의 잣대로 이를 재단하는 시선도 여전하다. 전태일의 일대기를 다룬 서적 전태일 평전이 오랜 세월 금서로 지정된 것도 이런 이유였다. 전태일은 정치 이념과 무관한 사람이었다. 그는 반공주의자였고 그가 남긴 일기에도 그런 기록이 있다. 또한, 그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하려던 탄원서에서 대통령을 칭송하고 그의 선처를 구하는 내용을 적었다. 그는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과 근로기준법 준수를 호소했을 뿐이다. 안타깝게도 그의 탄원서는 전해지지 못했다. 

전태일의 삶은 고단했고 힘들었다. 계속된 좌절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분투했다. 전태일의 분신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전태일은 이런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사회가 지켜주기를 한 번 더 노동자들을 돌아봐주기를 바랐던 것뿐이었다.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가 근로환경 개선 등의 일은 이념과 정치적 이해로 판단될 문제가 아닌 인간 기본권의 문제다. 그는 50년전에 이를 이해하고 노력했인물이었다. 이는 그의 삶은 그만큼 가치가 있었고 오랜 기간 기억되어야 하는 이유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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