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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은 조선 역사상 가장 큰 비운의 삶을 살다가 임금입니다. 우리 역사상 최고의 군주로 칭송받는 세종대왕의 손자로 1452년 제5대 임금인 그의 아버지 문종이 승하한 이후 조선 제6대 임금에 올랐지만, 계유정난을 일으킨 그의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1455년 짧은 재위를 마치고 상왕으로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후 사육신으로 대표되는 이들의 단종 복위 계획이 실패하면서 상왕의 자리에서도 밀려나 1457년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유배길에 오르게 됩니다. 영월의 청령포로 유배된 단종은 이후 그의 또 다른 숙부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시도가 발각되어 사사된 이후 서인으로 강등되고 영월 관아의 관풍헌에서 사사됩니다. 그의 17세의 일로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사약을 내려 사사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교살을 당했다는 설도 있지만, 원통한 죽음이었던 건 변하지 않습니다.

10대 어른 소년이었던 단종은 그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도 못하고 정치적 격변에 휘말렸고 그의 의지가 상관없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후 단종은 그의 사후 수백 년이 흘러 숙종 임금 때 복위가 되어 단종으로 추존되었고 영조 때 이르러 성역화되어 왕으로서의 예우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후 이런 일들이 그의 원통함을 대신할 수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비운의 임금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이는 권력에 눈먼 이들에 의한 일로 단종을 비운의 임금으로 만든 이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냉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단종의 흔적이 남아있는 영월 청령포는 그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큰 곳이었습니다.

 

 

화창한 하늘이 좋았던 어느 날 청령포 매표소로 가는 길

 

매표소를 나와 선착장으로 향하는 길에

청령포는 굽이쳐 굽이쳐 흐르는 남한강 상류의 가운데 섬과 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육지와 단절된 곳으로 유배지로 최적의 장소로 보였습니다.멋진 전경 탓에 이곳은 국가지정 명승지 제5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단종에서 이곳은 현실과 단절된 장소였습니다.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된 이후 영월로 유배길을 떠났고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그의 왕위를 찬탈한 숙부에 대한 원망과 원통함을 안고 청령포로 가는 강을 건넜을 단종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강을 오가는 배를 타야 합니다.

 

배에서 내려 섬의 한 가운데 들어가는 길, 울창한 소나무 숲이 방문자를 반기고 있었습니다. 청령포 수림지로 명령된 이 숲은 2004년 산림청에서 천년의 숲으로 지정되고 보호 관리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명성대로 하늘을 가리고도 남을 오래된 소나무들이 일품이었습니다.

 

숲길을 지나 만난 단종어소

이곳은 과거 단종이 유배 시 거주했던 건물을 재현한 것입니다. 그의 거처와 그를 시중들었던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했던 행랑채가 있었습니다. 작고 초라한 건물의 모습은 그의 처지를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특이하게 단종어소를 재현한 건물로 소나무 한 그루가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해설사의 말로는 이 소나무가 이 건물을 건축한 이후 기울어져 지금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 소나무가 임금을 향해 경의를 표하기 위함이라고 하는데 90도 이상으로 기울어진 이 소나무는 밀랍인형으로 만들어진 단종을 향해 고개를 숙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마 이 소나무도 단종 임금의 원통함을 알 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 단종의 거처가 있었던 건물 터에 자리한 단묘재본부시유비는 1763년 영조 임금 때 세워졌습니다.

영조는 친필로 단종 임금이 이곳에 있었던 옛 터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영조 임금은 그의 성역화를 실행했던 임금입니다. 숙종 임금 이후 왕위를 이은 영조는 탕평책으로 대표되는 당쟁의 완화를 위한 정치력을 발 위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피폐해진 조선의

상황을 개선하고 부흥을 위한 초석을 다진 임금입니다. 단종에 대한 성역화 역시 탕평책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과거와의 단절이 아닌 연결을 통해 피로 얼룩진 과거를 조금이나마 지워가길 그는 원했을 지도 모릅니다.

 

과거 청령포를 오가던 나루터 흔적과 멀리 않은 곳에 금표비가 있었습니다.

단종이 사사된 이후 청령포는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영조 임금 시대 한 관리가 이곳에 금표비를 세워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습니다. 이후 단종의 흔적이 남은 이 공간은 보호되 수 있었습니다. 금표비의 뒷면에는 향후 진흙이 쌓여 넓어지는 곳까지 출입을 금한다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강의 흐름 속에 흙이 퇴적되어 넓어지는 이곳의 지형까지 고려한 조치였습니다.

이 금표비를 세운 이후 지속적인 관리로 청령포는 그 모습을 유지하고 멋진 경관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600년 수령이 넘은 것으로 추정되는 관음송이 우뚝 서있었습니다.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제349화로 지정되어 있는 이 관음송은 철제 기둥에 의지하고 있지만, 그 도도한 자태를 잃지 않았습니다. 과거 단종의 이곳에 머물 때부터 자리했을 이 관음송에는 단종의 원통함과 설움을 깊숙이 간직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청령포의 전망대에 올랐습니다.

굽이쳐 흐르는 강물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단종 역시 이곳에서 답답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랬을 것으로 보입니다.

 

숲길을 지나 단종 어소를 다시 지나칩니다.

고개 숙인 소나무와 함께 단종 임금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습니다.  만약 그가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는 비운의 임금이 되지 않기를 기원하면서...

 

청령포를 건너와 그 모습을 다시 담았습니다. 작은 배는 방문객들을 쉼 없이 오가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평화롭기만 합니다.

단종 임금은 이런 평화롭고 멋진 풍경을 제대로 즐기기 못했습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낯설고 단절된 공간에서 그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잠시나마 복잡하고 냉정한 정치의 세계에서 벗어난 게 작은 위안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청령포에서의 삶도 몇 달 만에 끝납니다. 홍수로 물이 범남하면서 이곳에서 귀거할 수 없게 된 단종은 이후 영월 관아가 있던 관풍헌으로 거쳐를 옮겨야 했습니다. 관아가 지척인 곳에서 그는 그 심한 감시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연과 함게 하며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던 청령포보다 못한 곳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관풍헌에서 짧은 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유배길에 오른 그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단종도 이를 모르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청령포에서의 짧은 몇 달간의 시간이 단종에게는 마음이 더 편안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단종의 슬픈 삶이 함께 하는 청령포는 그 때문인지 멋진 풍경을 마음껏 즐기기 어려웠습니다. 그의 한이 조금 덜어지면 조금 나아질 수 있을지 단종의 한이 서린 청령포는 역사의 현장으로 가치가 큰 곳이었습니다. 언젠가 단종이 비운의 임금이 아닌 조선 역사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되길 기대해 봅니다.

사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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