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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시작된 민족의 비극 6.25 한국전쟁은 수많은 사상자와 함께 인적, 물적 피해를 남기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통해 비극의 시간을 멈췄다. 하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종전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당시 휴전 협정은 종전이 아닌 잠시 전쟁을 멈추는 휴전이었다. 이후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은 엄청난 군사력으로 대치중이고 크고 작은 군사적 충돌이 지속됐다. 같은 민족이지만, 우리 민족은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를 적대시하며 살아가고 있다.

6.25 한국전쟁의 중요한 원인이었던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의 냉전체제는 그중 하나인 소련의 붕괴와 공산주의 붕괴로 사라졌지만,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여전히 철 지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 논쟁이 우리 사회 상당 부분을 지배하고 있고 이는 국민적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이런 남북의 극단적인 대치 상황을 남북의 권력자들은 그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는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갈등을 더 부추기도 강화하는 과오를 범하기도 했다. 그 과정 속에서 민족의 동질성 회복이라는 중요한 가치는 희미해지고 남과 북으로 우리 민족은 몸과 함께 마음도 멀어지고 있다. 

이는 전쟁이 불러온 큰 상처로 여전히 치유되지 않고 있다. 또한, 수십 년을 이어온 상처를 간직하고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전쟁 과정에서 헤어진 혈육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수많은 이산가족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우리 민족의 과제다. 생과 사가 갈리는 극한의 상황에서 부모, 형제, 자매가 헤어지는 일은 수없이 많았다. 그들은 전쟁이 끝나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 속에서 살아왔지만, 기다림의 시간은 하염없이 길어졌다. 천만 이산가족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전쟁 중 발생한 이산가족들은 아픔을 속으로 달래며 긴 세월을 견뎌야 했다. 그 기다림이 길어지면서 상당수 이산가족들은 그 삶을 다했다. 현재 이산가족 상봉을 기다리며 관계 기관에 등록한 인원은 5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하지만 이산가족들의 상봉에 대한 열의와 의지는 여전히 남북의 대치 속에 막혀있다.

 



이런 이산가족의 아픔을 온 국민이 함께했던 시간이 있었다. 1983년 6월 30일 종전 50주년을 맞이하여 기획된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전쟁 중 헤어진 가족을 찾으려는 이들의 엄청난 호응과 참여가 있었고 방송국이 이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방문과 문의, 관심이 이어졌다. 이에 1회 성 방송으로 기획된 이 방송은 당일 16시간 35분의 생방송으로 이어졌다.

방송 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시작한 이산가족 찾기 방송은 138일간이나 이어졌고 만여 건의 상봉이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이산가족들의 가슴 아픈 사연이 국민들을 함께 울렸고 상봉의 장면 또한 국민들 모두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는 방송의 순기능이 제대로 작용한 결과이기도 했다. 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당시 KBS에서 했던 이산가족 찾기 특별 생방송을 중심으로 이산가족의 문제를 심도 있게 이야기했다.

이산가족 찾기 특별 생방송의 열기는 뜨거웠다. 당시 KBS와 그 일대의 모습을 담은 영상을 살피면 잃어버린 혈육을 찾으려는 이들의 인파와 방송국 벽면을 가득 메운 가족을 찾기 위한 사람들의 벽보로 채워져 있었다. 방송국은 이런 사람들의 열기와 간절함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는 세계 방송사에서도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최장기간 생방송으로 이어졌다. 이 방송은 이후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 있는 이산가족과의 상봉까지 이어지며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다. 해외 언론들도 한국의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을 보도하며 깊은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이런 생방송이 이어질 수 있었던 데에는 1980년 방송 기술의 발전과 함께 컬러티비의 보급이 큰 영향을 주었다. 컬러도 방송되는 화면은 이산가족들이 서로를 더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했고 다 분할 화면 기술은 화상 상봉을 가능토록 했다. 이를 통해 직접 만남이 없어도 헤어진 혈육의 존재를 인지하고 상봉의 기쁨을 함께 할 수 있었다. 벅찬 감동의 기억은 영상으로 고스란히 남았고 2015년 이산가족 찾기 특별 생방송의 자료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여담으로 이 프로그램에서 그의 노래 잃어버린 30년이 자주 소개되고 실제 현장에서 열창을 했던 가수 설운도는 그의 인지도를 높여 인기 가수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그만큼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의 파급력은 엄청났다. 실제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이 방송의 이면에는 전쟁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산가족들을 대부분 원치 않는 이별을 했다. 전쟁 과정에서 전쟁의 위험을 피하기 위한 피난 과정에서 엄청난 인파 속에서 이별을 하는 일이 상당수였다. 영화로도 소개된 흥남철수로 대표되는 1.4 후퇴 과정에서 다수의 이산가족이 발생하기도 했다. 또한, 전쟁 중 청년들에 대한 남과 북 양측의 징집 과정에서 원치 않는 이별이 다수 발생했다. 그중에는 형제 중 한 명은 남한의 국군으로 또 한 명은 북한의 인민군으로 징집되어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도 있었다. 빈곤이 일상화된 상황에서 식구를 다른 집의 수양딸 사실상 식모로 보내면서 이별을 하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이별의 아픔과 함께 피난민들은 생계의 문제에 직면하며 빈곤과도 싸워야 했다. 다수의 피난민들이 몰렸던 전쟁 중 임시수도 부산에서는 피난민들이 산비탈에 판자촌을 이루며 살았다. 삶의 터전을 버리고 남으로 온 피난민들은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그들의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배고픔은 또 다른 일상이었다. 어른들로 하루하루를 버티기 힘든 상황에서 다수의 고아들이 발생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이산가족 문제의 또 다른 단면이었다. 

힘없고 의지할 곳 없는 고아들은 전쟁 상황에서 그 우선순위가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돌볼 수 있는 고아원 등의 상황도 좋을 리 없었다. 심지어 전쟁 중 그들이 버림받는 일도 있었다. 전쟁 중 미군 공군 중령 블레이즈델은 지휘부의 명령을 거부하면서까지 다수의 고아들을 제주도로 피난 시키는 일명 유모차 구출작전을 펼치며 전쟁 중 큰 미담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물론, 이런 미담이 대상이 되는 건 극히 일부였다. 일부 고아들은 미군들의 허드렛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이들은 슈샤인 보이로 불렸다. 그마저도 어려운 아이들은 다수 해외입양의 길을 가야 했다. 전쟁 후에도 우리나라는 세계 최대 고아 수출국이라는 오명을 지우지 못했다. 그만큼 전쟁 일반 국민들의 삶은 처절하고 고통의 시간이 이어졌다. 

생계의 어려움과 함께 북한 지역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은 반공의 기운이 큰 상황에서 북한에서 왔다는 이유로 배척되거나 적대시되는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는 또 다른 고통이었다. 이들은 이산의 아픔과 생계의 어려움, 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그들의 정체성을 숨겨야 하는 또 다른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렇게 이산가족의 아픔은 전쟁의 야만성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전후 복구와 재건의 과정에서 이산가족의 문제는 큰 이슈가 되지 못했다. 당장의 삶이 급한 상황에서 이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도 없었고 이산가족들이 그 목소리를 내기도 어려웠다. 전후 남과 북의 정권은 전쟁의 아픔을 치유하기보다는 그들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더 집중했다. 상대를 적으로 돌리며 강하게 대립하는 것이 이에 유리했다. 남과 북의 극한 대치는 이산가족 문제를 더 어렵게 했다.

KBS의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은 이산가족의 문제를 온 국민에서 제대로 인식시키는 계기가 됐다. 국민들은 그동안 모르거나 외면했던 이산가족의 아픔에 공감하고 함께 기뻐하고 울었다. 이산가족의 아픔은 전쟁의 상처를 마음 한편에 가지고 있었던 온 국민의 아픔으로 자리했다.

온 국민의 공감을 얻었던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은 당시 정권에는 호재였다. 전두환의 신군부 정권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전두환은 방송국을 수차례 찾아 방송국 관계자들을 격려하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이산가족의 아픔에 공감하는 모습은 당연해 보였지만, 수차례 방문은  또 다른 의도를 내포했다. 추후 공개된 관계 기관의 보고서에는 이를 정권과 체제 홍보, 반공의식 고취 등에 활용할 것으로 명시하기도 했다. 이 방송은 1988년 올림픽 유치와 함께 정권에 대한 호감 이미지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정말 이산가족의 아픔에 공감했다면 진작에 이를 위한 노력을 했어야 했다. 오히려 정권은 방송에 편승하는 모습이었다.

어두운 그림자도 있었지만,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은 이 문제는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전세적으로 공론화하고 관심을 키우도록 했고 국제적인 여론을 조성토록 했다. 이후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남북 당국의 회담이 열린 건 방송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이산가족 상봉은 몇 차례 이루어지긴 했지만, 그 대상이 크게 한정적이었고 남북 관계 속에서 지속되지도 못했다. 이산가족들이 원하는 서신교환과 전화 통화 등의 지속적인 소통의 길을 열리지 않았다. 이산가족들은 언제 올지 모르는 상봉의 기회를 기다려야 했고 세월의 흐름 속에 이산의 아픔을 간직한 채 세상을 떠나야 했다. 대기 명단에 있는 이산가족들 대부분이 고령자임을 고려하면 기다림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할 수 있다. 

이에 이산가족의 문제는 더는 지체할 수 없는 문제다. 혈육에 대한 정을 나누지 못하는 건 인간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일이기도 하고 인류 보편적 가치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또한, 이산가족들은 전쟁이라는 그들의 원치 않는 상황 속에서 그 상황에 놓였다. 전쟁은 보통의 국민들의 뜻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전쟁의 큰 상처를 우리 국민들 이산가족들이 안고 있다는 건 가혹한 일이다.

이산가족의 문제는 결코 정치적 유불리나 이념 등 다른 요소를 고려할 문제가 아니다. 이는 민족의 동질성 회복이라는 대의도 있다. 전쟁의 아픔을 치유하는 의미에서도 이산가족의 문제는 가장 우선순위에 있어야 한다. 역사저널 그날의 방송은 희미해질 수 있었던 이 문제가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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