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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옛 모습을 가진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 서촌이 있다.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에 자리한 서촌은 행정동으로 효자동, 청운동, 사직동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곳은 과거 왕족들과 사대부, 중인들이 주로 거주했던 곳이었다. 일제 강점기 이후 문화, 예술인들의 거주지이자 외국인들의 거주지, 고관 대작들의 거주이기도 했다. 또한, 인왕산 계곡의 멋진 풍경도 함께 품고 있어 역사와 자연이 함께 하고 있다. 

유서 깊은 동네지만, 청와대와 인접한 탓에 1960년대 이후 보안상의 이유로 각종 규제에 묶이면서 개발이 제한되고 나날이 변해가는 서울에서 소외된 지역이 되고 말았다. 서울에서 은둔이 땅이었던 서촌은 최근 삼청동 일대 한옥촌이 북촌으로 지칭되며 유명 관광지로 자리 잡은 상황에서도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2010년 한옥밀집지구로 지정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다수의 한옥과 근대 건축물이 보존된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북촌과 다른 느낌이 사람들의 발걸음을 이끌면서 새로운 명소로 떠올랐다.

여기에 1968년 김신조를 포함한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청와대 습격을 위해 침투한 1.21 사태 이후 민간인의 접근이 통제되던 인왕산이 개방되면서 더 많은 이들이 서촌을 찾을 수 있게 됐다. 이제는 서울에서 옛 모습을 간직한 귀한 공간이 됐다. 도시 기행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14회에서는 이 서촌의 이모저모와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웃들을 만났다. 

 

 


인왕산의 산책로를 따라 오르며 시작된 여정은 과거 인왕산 일대 경비를 위해 설치되었던 경찰 초소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과거 긴장감 가득했을 이 초소는 이제 북 카페로 만들어져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다양한 책들과 함께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이곳은 서울 도심의 전경도 살필 수 있었다. 인왕산이 다시 시민 품으로 돌아왔음을 실감하게 하는 장소였다. 

인왕산에서 내려와 경복궁 옆 마을을 걸었다. 차가 들어갈 수 없는 좁은 골목을 따라 한옥들이 줄지어 자리하고 있었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한옥 골목에서 분주히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할머니를 만났다. 봄을 맞이해 화분에 씨를 뿌리고 나름의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40년 세월 이 한옥을 지키고 있는 할머니는 많은 이웃들이 마을을 떠나면서 생긴 허전함을 뒤늦게 배운 우쿨렐레 연주로 채워가고 있었다. 어설픔이 있지만, 할머니의 진심 가득한 연주가 정겨웠다. 

과거 조선시대 유명한 화가였던 겸제 정선의 그림에도 담겼던 인왕산 계곡의 멋진 풍경을 뒤로하고 찾은 한마을에서 서촌의 풍경을 벗 삼아 살아가는 주민을 만났다. 집 옥상에서 그는 동네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한해 두해 그려나간 서촌 마을의 풍경은 그의 작업실을 채우고 있었다. 과거 기자 일을 했었던 그 일을 그만둔 후 서촌의 매력에 빠져 그림을 그렸고 이제는 그의 인생과 함께 하는 일이 됐다. 언젠가는 옥상에서 마을 그림을 그리는 그를 보고 간첩으로 오인 신고를 당하는 해프닝도 있었고 했다. 인근에 청와대가 그 어느 곳보다 보안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의 일이었다. 지금은 자유롭게 매일매일 달라지는 마을 풍경을 화폭에 담을 수 있게 됐다. 이 그림들은 서촌의 역사를 기억하는 소중한 유산이 될 것 같았다. 

다시 마을 길을 걸었다. 수백 년은 족히 돼 보이는 은행나무에서 마을의 역사를 느낄 수 있었다. 마을 한편에서 근대식 서양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인도어로 이상향, 행복한 마음, 기쁨을 뜻하는 딜쿠샤라 불리는 이 건물은 1923년 미국인 사업가이자 특파원이었던 앨버트 테일러가 지었고 이름을 붙인 미국식 주택이었다.

이 건물의 주인이었던 테일러는 1919년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입수해 이를 몰래 미국으로 보내 세계에 알리도록 했고 3.1운동 기간 일제에 의해 자행된 제암리 학살사건을 취재하여 알리기도 했다. 이로 인해 그는 투옥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후 그는 1942년까지 일제 치하의 대한민국에 살았고 강제추방되어 1948년 미국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후 그는 그의 유언에 따라 서울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그는 우리 독립운동사에 남을 외국인이었고 우리나라에 대한 큰 애정이 있었다. 딜쿠샤 역시 독립운동에 일조한 외국인 베델이 주도한 신물 대한매일신보의 사옥이었을 거라 추정하기도 한다. 

그가 일제에 의해 추방된 후 주인 없는 건물이었던 딜쿠샤는 그의 행적이 알려지고 근대문화유산으로 가치를 인정받으면서 그 원형이 복원되고 테일러의 후손들이 기증한 그의 유품들이 더해져 문화재이자 전시관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근대문화, 독립운동사를 담은 소중한 건물이었다. 

이렇게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근대 서양식 건물을 포함해 오래된 건축물이 공존하고 있는 서촌은 콘크리트 숲으로 둘러싸인 서울에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색다름 가득한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이에 이곳에는 여러 카페들이 생겨나고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카페들이 밀집한 골목에서 프랑스식 디저트 카페를 찾았다. 그곳의 디저트는 독특한 모양과 맛이 있었다. 카페를 운영하는 청년 사장은 코로나 사태로 어려운 사황이지만, 희망을 가지고 자신의 꿈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새로운 바람이 밀려오는 서촌이지만, 대를 이어오는 맛과 추억을 지켜가는 곳도 있었다. 모녀가 함께 운영하는 식당에서는 수십 년 내공의 사찰음식을 맛을 지켜가는 연잎밥의 담백함을 마음 가득 느낄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즐겨 찼던 오락실을 인수해 가게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젊은 사장님도 만날 수 있었다. 이 오락실은 그 사장님과 마을을 떠나지 않은 이웃들이 추억의 공간이기도 했다. 레트로 감성 가득한 오락실에서 어른들의 어른 시절의 기억을 되살리고 그 자녀들은 색다른 추억을 쌓아가고 있었다. 

다시 골목을 걸었다. 골목 한편에서 작은 화원이 보였다. 자신의 집을 개조해 만든 화원은 아버지에서 딸로 그 가업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몸이 아픈 아버지를 대신해 화원을 운영하고 있는 사장님은 아버지의 일생의 노력이 가득한 화원을 접을 수 없었고 자신의 꿈을 내려놓고 가업을 지키고 있었다. 높은 임대료 부담으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과거 아버지의 별명인 뽀빠이 모양의 도장은 이 화원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었다. 사장님은 그 도장을 꽃다발 포장에 찍으며 화원을 지켜가고자 하는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봄꽃향기 가득한 화원은 그래서 더 특별해 보였다. 

여정의 막바지 한옥과 양옥이 공존하는 집 앞에 이르렀다. 이 집은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게스트하우스였다. 부부가 운영하고 있는 게스트하우스에는 긴 세월 이곳을 찾은 외국인들의 흔적들이 곳곳에 있었다. 그 흔적들은 이곳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곳의 방문자들은 우리나라의 문화를 몸소 체험하고 어디에서도 할 수 없는 추억을 쌓았다. 

애초 아파트에 살다 우연치 않게 이 집을 구입한 부부는 이전보다 불편하고 집 관리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이곳을 찾는 외국인 여행자들과의 만남과 함께 진솔한 마음을 나누며 힘을 얻고 있었다. 부부가 원하는 세계여행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이 게스트하우스에서 그들만의 세계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를 통해 이 부부는 행복 가득한 그들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서촌은 개발 광풍에 휩쓸리지 않았던 탓에 소중한 역사와 문화의 흔적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또한, 서촌은 변하지 않는 것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운 명소가 되면서 그 모습이 점점 변해가고 젠트리피케이션 진행되면서 오랜 세월 이곳을 지켜온 이들이 밀려나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이 서촌이 잘 보존되고 과거와 현재가 잘 공존하는 곳으로 남기를 기원해 본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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