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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과거 삼국시대 고구려에서 분리되어 내려온 세력이 터전을 잡았던 한강유역과 함께 백제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었습니다. 이후 인천은 백제의 영토에 있었지만, 고구려의 남하로 고구려 영토에 속해있다 신라 진흥왕 시기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면서 신라의 영토가 됐습니다. 삼국시대 치열했던 대결의 역사를 안고 있는 인천이지만, 고대와 중세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중요 사건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런 인천은 1876년 조선이 굳데 닫았던 나라의 빗장을 열고 개화정책을 추진하면서 근대사의 중요한 장소가 됐습니다. 그 해 있었던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 체결 후 3개 항이 개항을 하게 되면서 인천은 부산, 원산에 이어 3번째로 외국에 문을 열고 서구의 신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는 곳이 됐습니다. 이후 서울과 가까운 지리적 위치로 인천은 서구 열강의 이권다툼의 장이 되기도 했고 일제의 조선 침략 역사에서 그 이름이 자주 등장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도 인천은 경제 수탈과 전쟁의 전초 기지로 일제가 활용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느 곳보다 빠른 변화를 겪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 나라의 산업화 과정에서도 인천은 그 선봉에 있었습니다. 현재는 나라의 관문인 인천공항을 품고 있는 도시로 그 역할이 매우 큽니다.

 

우리 근현대사의 중요한 장소였던 인천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장소가 인천 송도에 있습니다. 인천 도시역사관이 그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 역사 속 인천의 모습을 살필 수 있었습니다.

 

 

들어가는 입구, 입장료 없이 관람이 가능했습니다.

 

 

방역조치를 마치고 관람을 시작, 개항이후 인천을 거점으로 활동한 외국인들과 체결한 문서들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후 3개의 개항 장소에 속했던 인천, 부산과 원산에 이어 1883년 세 번째로 외국에 문을 연 항구가 됐습니다. 서구의 문물이 밀려들었고 이전에 겪지 못했던 일들은 인천의 주민들은 가장 먼저 경험해야 했습니다.

 

각종 근대 문물과 시스템이 도입되고 인천은 그 어느 곳보다 빠른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을 보다 부강한 나라로 더 발전시킬 것으로 기대했던 개항은 일본의 침략 야욕을 보다 구체화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과의 근대 조약인 강화도조약은 조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우월한 군사력을 앞세운 일본의 압력 속에 불평등 조약으로 체결됐습니다.

 

신문물의 도입

 

개화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조선에는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각종 제도가 정비되고 전화, 전기, 전차, 경인선 철도 등이 놓였습니다. 인천에는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선 철도가 개설되어 인천이 수도권에 편입됐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와 발전은 조선들을 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열강들의 이권 다툼의 장이 된 조선 그리고 인천

 

인천은 지리적 이점으로 청나라와 일본의 대 조선 무역항으로 활용됐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치외법권 지역인 조계지를 설정하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했습니다. 그에 따른 조약도 조선에 불리하게 체결됐습니다. 눈에 보이는 근대화는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준비되지 않았던 개화는 열강의 경제침탈에 조선이 좀먹어 들어가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런 열강의 이권다툼 속에 일본은 그들에게 유리한 국제환경을 만들었고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청나라, 러시아와의 전쟁에 각각 승리하며 조선을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일천은 일제에 의해 도시계획이 이루어지지고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일본은 발전에 따른 과실을 식민지 조선에 남겨주지 않았습니다. 인천은 일제의 식량수탈 기지로 활용됐습니다. 이를 위해 다수의 정미소가 인천에 들어섰습니다. 또한, 인천에 조선인들은 크 차별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인천은 도시가 점점 확대됐지만, 조선인들의 삶이 함께 나아지지는 않았습니다.

 

일제에 의해 변화되는 인천의 모습

 

일제 강점기 인천은 서양식 건물과 공장이 곳곳에 들어서고 항구는 많은 배들도 북적였습니다. 서울과 인천을 오가는 기차 역시 사람들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변화의 물결이 가득했지만, 그 풍요는 그들 것이 아니었습니다.

 

 

1930년대 일제의 병참기지와 군수기지로 전락한 인천

 

중국 침략과 함께 동남아까지 아시아 침략을 노골화한 일본은 조선을 침략전쟁의 중요한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인적, 물적 수탈이 본격화됐고 1919년 3. 1 운동이후 잠시나마 보였던 문화통치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전쟁 수행을 위한 민족말살 정책과 병참기지화 정책으로 변했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원하지 않는 전쟁 속에 빨려 들어가야 했습니다. 조선에서 생산되는 생산품은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해 사용됐고 일사에서 사용하던 놋그릇이나 생활용품과 전쟁물자로 활용할 수 있으면 공출됐습니다. 더 참을 수 없는 일은 일제의 황국신민화라를 허울 속에 우리 한글을 사용하지 못하고 이름도 일본식으로 창씨개명해야 했습니다.

 

인천은 우리 민족 시련의 역사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해방후 사업화 여정 속 인천

 

1945년 8월 15일 일제 강점기를 벗어난 대한민국은 6.25 한국전쟁의 아픔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험난한 여정을 이겨내며 빠르게 발전을 거듭했고 선진국 대열에 올라섰습니다. 국민들의 희생과 역량이 집약된 결과였습니다. 인천은 산업단지로서 수출항으로서 큰 역할을 했고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인천국제공항은 대한민국 발전을 상징하는 장소이자 세계와 우리를 이어주는 중요한 관문이 됐습니다. 인천은 대한민국의 발전의 중요한 상징과도 같은 도시가 됐습니다.

 

산업화 시대를 살아냈던 이들의 유품들을 모은 작은 전시회 누구에게는 소중했던 물품들이 근현대사의 흔적을 품고 있었습니다.

 

전시관 입구 자동차 산업 초창기 자동차 모습

 

인천의 역사와 함께 한 시간이었지만, 우리 근.현대사의 장면들도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 어느 곳보다 빠르게 근대화의 과정을 거쳤던 인천이 더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사진,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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