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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16회] 서울 한복판 공존의 공간 용산 이태원동, 한남동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1. 4. 7.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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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은 한강과 맞닿아 있고 위로를 서울 종로로 아래로는 강남과 연결되는 말 그대로 요지 중 하나다. 하지만 용산은 이런 지정학적 위치를 긴 세월 외국 군대가 이용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이를 진압하기 위해 조선 땅에 들어온 청나라 군이 주둔한 지역이 용산이었고 이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후 러. 일 전쟁까지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에 대하 식민 지배를 공고히 했고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식민 지배를 명확히 이렇게 일제에 의한 강점기 기간 용산은 일본군의 대륙 침략을 위한 후방기지로 기능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망으로 일제가 물러난 후에는 미군이 최근까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렇게 긴 우리 근현대사에서 용산은 외국 군대가 주둔한 역사로 채워졌다. 미군이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이제서야 용산은 서울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런 골곡의 근. 현대사를 품고 있는 용산, 그중에서 이태원동과 한남동을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16회에서 찾았다. 이 지역은 외국 군대가 오랜 세월 주둔하면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장소가 되었고 지금도 해외 공관들이 다수 위치하고 있다. 그 때문인지 이태원동과 한남동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함이 있다. 

여정은 시작은 거리의 외국 간판들로 가득한 이태원 거리였다. 이태원은 과거 미군들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장소로 이국적인 느낌이 가득한 곳이다. 지금도 그 풍경은 여전했다. 그곳에서 대형 사이즈의 옷을 파는 가게에 들렀다. 다른 곳에서는 구입하기 어려운 옷들이 이채로웠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세계 각국을 상징하는 동판들이 거리 바닥 곳곳에 있었다. 그 동판들을 찾는 재미도 쏠쏠했다. 

 

 


도로와 접한 보행로를 벗어나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그곳에서 오래된 수제화 가게가 있었다. 50년 넘는 경력의 구두 장인이 운영하는 가게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카우보이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웨스턴 부츠와 개성 가득한 구두가 즐비했다. 이 가게의 실력은 과거 미국의 유명 컨트리 가수 케니 로저스와 클린턴 전 대통령까지 이 가게에서 구두를 구입했을 정도였다. 지금도 자신만의 구두를 제작하고자 하는 단골들이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어느 곳 보다 외국의 문화를 먼저 접하고 그 문화와 일상이 공존했던 이태원의 특색이 드러나는 가게였다. 

문화가 공존하는 현장은 또 다른 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후미진 골목에 자리한 외국어 서적 전문 책방이 그곳이었다. 이곳에서는 다양한 언어의 외국어 중고 서적을 보유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구하기 어려운 자국 언어의 서적을 구입하기 위한 외국인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있었다.

1970년대부터 책방을 운영한 사장님은 초창기 미군부대에서 버려지는 잡지를 모아 이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미군들에게는 금방 읽히고 버려지는 잡지는 그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세계적인 트렌드를 알 수 있는 소중한 정보지였다. 또한, 사장님은 구하기 힘들었던 외국어 서적을 복사본을 제작해 판매하기도 했고 미군부대 등에서 나오는 카탈로그까지 모아 판매했다. 한때는 미국 서적의 만화를 모아 책으로 엮어 판매하기도 했었다. 지금은 인터넷의 발달이 급속히 이루어지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많지만,  당시에는 다양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 외국 서적이었다. 이 책방의 사장님은 이 책방이 생계를 위한 수단이었지만, 자신의 인생을 바친 문화교류의 창구이기도 했다. 

책방을 벗어나 이태원을 걷다 이슬람 사원이 있는 거리에 도달했다.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모스크 건물과 함께 이슬람 문화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거리 풍경이 특별했다. 그 거리에서 우즈베키스탄 식당으로 식재료를 가지고 가는 이슬람 청년을 만났다. 그를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의 사장님은 2009년 경 사업체 한국에 왔다. 그는 보다 나은 교육 환경이 있는 한국에서 자녀들이 공부하기를 소망했고 한국에 정착했고 자국의 요리를 판매하는 식당을 열었다.  식당 안은 우즈베키스탄의 전통과 문화가 함께 하는 공간이었다. 그는 자국의 요리와 함께 문화를 전달하는 메신저였다. 이 식당에서는 그 일환으로 우즈베키스탄의 요리를 소개하는 요리교실도 운영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접하기 힘든 우즈베키스탄의 맛을 전하고 있었다. 그 역시 이태원동을 지키는 우리의 이웃이었다. 

이런 이국적인 풍경과 함께 이태원동에는 우리의 전통이 함께 하는 곳도 있었다. 용산의 전경을 살필 수 있는 부군당 공원에서는 마을의 수호신들이 모시는 사당이 있었다. 서구의 문물이 그 어느 곳보다 빠르게 들어오고 다양한 문화로 채워진 이태원에서 토속 신앙에 근거한 사당이 있다는 게 신기하고 반가웠다. 

다시 길을 나섰다. 미군부대의 높은 담장을 따라 걷다 항아리 옹기가 가득 세워진 장면을 마주했다. 그 옹기들을 따라가니 서울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옹기 가게가 있었다. 큰 항아리부터 작은 장식용품까지 다양한 옹기가 가게를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게를 지키고 있는 할머니를 만났다. 그는 남편과 함께 6남매의 생계를 위하 옹기 장사를 시작했다고 했다. 하지만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온전히 홀로 삶의 무게를 지탱해야 했다.

무거운 옹기를 니어커에 싣고 이 동네 저 동네를 옮겨 다니며 하는 장사는 여성 홀로 하기에는 힘든 일이었지만, 자녀들을 위해 어머니는 힘든 일상을 견디고 또 견뎠다. 그 결과 지금은 용산에 자신의 집을 짓고 제법 큰 가게를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어머니의 힘이 이룬 결과였다. 할머니는 힘든 세월 속에서 자신을 도와준 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할머니는 동네 사람들을 늘 챙겨주고 따뜻한 마음으로 그들과 함께 했다. 그렇게 쌓은 덕은 이제 가게 일을 자신의 일처럼 도와주는 이웃들의 배려로 이어졌다. 그 때문이지 홀로 가게를 지키는 할머니의 모습이 전혀 외롭지 않아 보였다. 

이태원을 벗아나 한남동으로 향했다. 지금은 대표적인 부촌이 된 한남동이지만, 여전히 산비탈에 빽빽이 서있는 오래된 서민들의 집들도 함께 공존하는 곳이 한남동이었다. 또한, 변화하지 않는 것과 큰 변화가 공존하는 곳이 한남동이었다. 긴 세월 변하지 않았던 서민들이 거주지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오래된 골목 사이로 카페들이 하나둘 들어서면서 골목은 카페골목으로 변하고 있었고 젊은이들이 찾는 또 다른 명소로 바뀌어 가는 중이었다. 그렇게 젊은 거리로 변하는 한남동 어느 골목에서 한결같이 마을을 지키는 슈퍼가 보였다. 

50년 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은 슈퍼는 그 슈퍼와 함께 세월을 보낸 부부가 운영하고 있었다. 깔끔하고 잘 정리된 편의점이 우리 일상을 채우고 있는 현실에서 이 슈퍼는 그런 모습과는 거리고 있었지만, 사람 사는 느낌이 가득했다. 슈퍼를 운영하는 부부는 카페 골목을 방문하는 젊은 손님들이 이 슈퍼를 찾으면 커피 한 잔을 대접하며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멈칫하며 슈퍼를 방문했던 이들은 먼저 손을 내미는 부부의 성의에 마음을 문을 열었다. 이 부부는 이에 그치지 않고 새롭게 골목에 들어와 장사를 하는 이들에게도 동네 어른으로 이들과 소통하고 정을 나누며 공존하고 있었다. 이 부부는 동네의 변화를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이들이었고 그 변화가 두렵고 바뀐 일상이 짜증 날 수 있었지만, 그 변화를 즐기고 새로운 이들과의 만남을 일상의 즐거움으로 하고 있었다. 그 마음은 동네의 변화가 다양함이 공존하는 순기능으로 발전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여정의 막바지 한남동의 도로변 거리를 걸었다. 그 길에서 큰 액자가 즐비한 표구점을 만났다. 지금은 찾기 힘든 표구점이지만, 이곳에서는 다양한 서체와 수묵화나 산수화 등의 전통미 가득한 그림들로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이곳은 우리나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전통문화가 관심이 많은 외국인 공관이나 상사 주재원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했다. 방문 시에도 작품들을 액자에 넣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애초 아버지로 부터 시작된 이 가게는 아들과 딸로 이어지며 대를 이어가는 가업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들은 가게를 지키는 것 외에 이들이 보유하고 있는 각종 작품들을 모아 작은 박물관을 만드는 소망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아고 있었다. 그 소망은 가업이 이어지게 하는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이렇게 이태원동과 한남동에는 다양한 외국 문화가 공존하는 독특함이 있었지만, 그 안에서 우리 전통을 지키는 이들의 노력도 함께 하고 있었다. 또한, 우리 이웃들만의 이야기들로 숨겨져 있었다. 지금 용산이 개발과 관련한 이슈들로 가득하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문화적 다양성이 지켜지기를 기대해 본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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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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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7 13:58 신고
    이태원과 한남동 구석구석 돌아다녀 보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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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7 14:24 신고
    용산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서울시민은 덕을 보지만
    평택은 피해를 입은 것도 있지요. 그래도 오랫동안 외국군대가 주둔하던것을
    다시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은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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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7 14:53 신고
    서울에서 가자 ㅇ이국적이고 다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곳이죠.
    동네한바퀴 다녀갔군요.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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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7 20:27 신고
    이태원은 다문화라곤 해도 아무래도 미군들로 인한 색채가 더 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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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8 04:20 신고
    한남동이군요.
    정겨운 이웃이야기..
    잘 보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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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8 06:20 신고
    미군 부대가 이전하면서 이제 시민들의 휴식 공간도 생기고
    지역 발전도 좀 될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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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8 06:41 신고
    이태원에 추억이 많은 분들은 한 번 더가 볼만 하겠어요 덕분에 구경 잘 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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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8 11:08 신고
    이태원 한남동하면 힙한 동네라고만 생각하는데
    우리 이웃들이 오래 살고 있는 동네라는 것
    잊지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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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8 11:16 신고
    청나라, 일본, 그리고 미국
    참 오랜 시간 다른 이들을 위한 공간의 역할을 했던 곳이네요.
    앞으로는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더 멋지게 거듭나기를 바래봅니다.
    과거의 모습들을 모두 지워버리지는 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