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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의 여러 사건들을 재조명했던 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이 다시 고대사의 각 장면들을 되짚어가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만주 벌판을 호령했던 고대 왕국 고구려였다. 그 시작은 광개토대왕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대왕이라는 칭호를 붙이는 왕은 얼마 없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과 함께 광개토대왕이 그중 한 명이다. 그만큼 광개토대왕의 업적은 우리 고대사에서 중요했다. 

광개토대왕이 재위했던 391년 ~ 413년은 국내외로 격변의 시기였다. 멀리 유럽에서는 로마가 395년 동. 서로마로 분열되면서 절대 왕국이었던 로마제국이 사라졌고 중국은 위 진 남북조, 5호 16국의 혼란기에 있었다. 그 과정에서 북방의 이민족들이 세운 5호 16국의 왕조는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며 수시로 충돌했다. 여기에 고구려는 남쪽에 백제라는 강력한 적이 자리하고 있었다. 광개토대왕의 선조인 고국원왕은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사하기도 했다. 또한, 고국원왕 시기에는 전연의 침략을 받아 수도가 함락되고 그의 아버지 미천왕의 시신을 도굴되어 탈취되는 일도 있었다. 여기에 그의 모후까지 끌려가 볼모로 고초를 겪었다. 고국원왕은 전연과 사대 관계를 유지하며 막대한 공물을 바치고 미천왕의 시신과 모후를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었다. 

이렇게 고구려는 중국의 왕국과 남쪽의 백제까지 수많은 적들과 대치해야 했다. 압록강 중류에 자리한 고구려는 척박한 자연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주변국들에 대한 정복 전쟁이 불가피했고 이 과정에서 무력충돌은 필연적이었다. 나라의 힘이 강했을 때는 영토를 확장하며 위세를 떨칠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을 때는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운 위험이 항상 상존하고 있었다. 

광개토대왕이 즉위하던 시기는 고구려가 큰 위기에 빠져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런 위기 국면에 광개토대왕의 즉위 당시 나이는 18세에 불과했다. 외적인 위험과 함께 왕권에 대한 내부 견제와 도전도 강할 수밖에 없었다. 광개토대왕은 이 위기를 정복전쟁을 통해 극복했다. 이를 위한 기반은 그의 숙부인 소수림왕 치세에 만들어졌다.

 

 



소수림왕은 국사 교과서에도 자주 등장할 정도로 고구려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불교를 받아들여 국교화하면서 종교의 통합을 시도했다. 이는 나라의 힘을 하나로 모으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정치적인 고려도 다분했다. 국가가 지원하는 불교는 왕권 강화와 연결됐다.

각 지역 부족들의 세력이 여전히 강한 상황에서 민간에 불교를 전파하고 그 세력을 늘리는 건 나라와 일반 국민들의 거리를 좁히고 왕의 통제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이에 더해 소수림왕은 오늘날의 법령이라 할 수 있는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 통치 체제를 확립했다. 오늘날의 대학이라 할 수 있는 태학을 지방에는 경당이라는 교육 기관을 설립했다. 유교적 통치체제를 뒷받침할 수 있는 인재 양성과 함께 경당에서는 무예를 함께 교육하여 군사력 강화를 도모했다. 국가 주도의 교육기관은 중앙집권 체제 강화를 위한 친위세력 양성의 중요한 발판이 될 수 있었다. 이런 소수림왕의 조치는 고구려의 시스템을 바꾸는 큰 개혁이었다. 

소수림왕의 개혁은 그의 아우 고국양왕 그리고 그의 아들인 광개토대왕때 이르러 큰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물론, 주어진 여건을 활용하고 나라의 역량을 모을 수 있는 그의 리더십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왕위에 오른 광개토대왕은 오랜 세월 고구려 변방을 침략해온 거란족 계통의 패려 정벌에 나섰다. 광개토대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엄청난 전투력으로 패려와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뒀다. 고구려는 막대한 전리품과 함께 패려에 노예로 끌려갔던 다수의 고구려인들도 구출했다. 이 승리로 고구려는 당시로는 중요한 자원인 소금광산까지 차지하며 나라의 부를 더 축적할 기반까지 마련했다.

이후 고구려는 앞서 언급한 전연을 계승한 후연과 요동의 패권을 두고 전쟁을 지속했다. 고구려에는 오래된 숙적인 후연과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제위 기간 7번의 큰 전투를 치렀다. 결국, 고구려는 마지막 승자가 됐고 요동을 완전히 그들의 영역 안에 두게 됐다. 요동을 차지한 건 고구려에 큰 의미가 있었다. 랴오닝 반도가 포함된 요동은 중국과의 교통 요지이기도 했고 넓은 평야가 있었다. 또한, 철광석 산지로 군사력을 강화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고구려에 패한 후연은 멸망했고 고구려계 고운이 북연을 건국했다. 북연과 친교를 맺은 고구려는 서쪽 지역의 방비를 더 든든히 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광대토대왕은 동북으로는 숙신을 정벌하고 동부여까지 복속시키면서 영토를 더 확장했다. 이러한 고구려 승리의 중요한 원동력은 군사부터 그들이 타는 말까지 철갑으로 무장한 철갑기병이었다. 고구려의 철갑 갑옷은 철갑을 귀어 만든 갑옷으로 무게를 줄이고 방탄능력을 향상시켰다. 여기에 엄청난 길이의 긴 창으로 무장한 철갑기병은 상대 진영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이 철갑기병을 중심으로 보병이 함께 하는 특화된 진법은 고구려 군을 최강의 부대로 만들었다. 

광개토대왕의 정복 전쟁은 남으로도 향했다.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백제와의 악연을 끊기 위해 그들과의 대결은 불가피했다. 광개토대왕은 그들의 자랑하는 철갑기병을 앞세운 육군과 수군 병진 작전으로 백제의 수도 한성을 포위하며 백제의 왕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냈다. 백제의 아신왕은 광개토대왕에게 영원한 노객이 되겠다는 다짐을 하며 패배를 인정했다.

이에 더해 광개토대왕은 백제와 연결되어 있는 왜의 군대가 신라를 침공하자 5만의 군대를 보내 왜군을 물리치고 그들이 도망친 금관가야까지 쫓아가 왜군을 섬멸했다. 이 과정에게 금관가야는 큰 타격을 입었고 가야 연맹의 중심이 금관가야에서 고령의 대가야로 이동하게 됐다. 이후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으로 상당 기간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됐다. 

이렇게 광개토대왕의 정복전쟁은 만주 지역과 한반도 전역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전개됐다. 광개토대왕은 정복전쟁 중 백제와 신라, 동부에 대해서는 포용 정책으로 그들을 대했고 후연과 거란, 왜 등 이민족에 대해서는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프로그램에서는 이를 두고 광개토대왕, 고구려의 천하관이 반영된 대외 정책이라 했다. 민족의식이 강하게 인식되지 않았을 시기였지만, 동부여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의 출생지이고 백제는 동명성왕의 자손이 세운 나라다. 신라 역시 한반도에서 성장한 나라다. 모두 우리 역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고조선의 영역에 속한 나라들이다. 고구려는 백제, 신라, 부여를 하나의 나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위대한 정복 군주 광개토대왕이었지만, 그가 역사의 중요한 인물로 부상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유교적 사관으로 지어진 역사서에서는 고구려사가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았고 그나마 내용도 부실했다. 현존하는 최고 오래된 역사서인 삼국 사기에서도 광개토대왕의 기록은 많지 않다. 또한, 고구려의 주 활동지였던 만주지역은 고구려 멸망 이후 중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면서 지역에 대한 역사 연구가 원활하지 않았다. 

고구려 역사, 광대토대왕의 역사에 대한 갈증을 씻어준 건 광개토대왕비의 발견이었다. 그의 아들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광개토대왕비에는 광개토대왕의 정복 사업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동안 그 가치를 몰랐던 탓에 방치됐던 광개토대왕비는 1880년도에서 그 존재가 인식되었다.

하지만 중국 지안현에 소재한 광개터대왕비에 우리 역사 학자들의 접근은 쉽지 않았다. 이후 광개토대왕비의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알려지게 됐다. 고구려 특유의 태왕 칭호도 함께 알려졌다. 연구 과정에서 일제에 의한 비문 훼손 및 왜곡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만큼 광개토대왕비는 타국의 시각이 아닌 우리 시각이 고스란히 담긴 역사관이 투영된 유적이다. 그마저도 없었다면 광개토대왕의 역사는 상당 부분 가려졌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광개토대왕비에는 그의 정복 사업뿐만 아니라 치세에 대한 업적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 그의 정복전쟁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들을 보다 편안하게 하게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광개토대왕의 정복전쟁은 고대 역사에서 우리 민족의 우수성이 그대로 드러난 일이었다. 광개토대왕의 정복전쟁 이후 고구려는 그의 아들 장수왕 때 이르러 한강유역을 차지하는 한 편 충주 고구려비의 존재에도 알 수 있듯 한반도 깊숙이 그 세력을 공고히 했다. 장수왕의 아들 문자명왕 때는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며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이처럼 광개토대왕은 중국 왕조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동북아의 강국 고구려의 시작이었다. 그 점에서 광개토대왕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자랑스러운 고대사에 대해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미명 아래 고구려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역사까지 그들이 역사로 편입하려는 역사 왜곡을 서슴지 않고 있고 중국 내 다수 고구려 유적들이 훼손되고 변형되는 일이 생겨나고 있다. 일본 역시 광개토대왕비의 훼손, 왜곡 논란에서 보듯 고대사에 대한 왜곡을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그만큼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지속인 연구와 이에 필요한 지원이 있어야 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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