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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만주 요동지역을 장악했던 고구려에게 중국 세력과의 대결은 필연적이었다. 고구려는 건국 초기과 성장기에 만리장성 넘어 중국 북방의 여러 이민족과 맞서야 했다. 그 과정에서 국가적 위기도 있었지만, 광개토대왕와 장수왕 시대를 거치며 그들의 대결을 이겨내고 요동 지역의 맹주로 자리했다. 고구려는 그들의 왕을 태왕으로 지칭하며 독자적 천하관을 유지하는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굴림했다.

하지만 중국에 통일 왕조에 들어서면서 고구려는 한차원 높은 상대와 대결해야 했다.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 당나라는 당시로는 세계 최강국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는 그들에게 쉽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고 중화사상속으로 편입되지 않았다. 이런 고구려가 중국을 호시탐탐 노리는 북방 이미족들과 연결되면 더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수나라와 당나라에게 고구려는 꺽어야 할 상대였다. 중국 왕조와 고구려의 전쟁은 불가피했다. 

고구려는 수나라와의 거듭된 전쟁에 승리하며 그 위상을 드높였다. 을지문덕 장군이 이끈 살수대첩의 승전은 수나라의 100만 대군을 상대로 거둔 승리로 그 파급력이 엄청났다. 수나라의 이후 몇 차례 고구려 침략을 지속했지만, 승리하지 못했고 고구려 원정 실패의 여파는 수나라를 멸망으로 이끌었다.

 



이런 수나라에 이어 들어선 당나라 역시 고구려에 대한 정벌 의지를 강하게 가지고 있었지만, 급하게 전쟁을 단행하지 않았다. 당나라는 당장 내치를 단단히 하는 일이 우선했다. 고구려 역시 대 중국 강경책의 상징이었던 영양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영류왕 집권기에 당나라에 대한 우호책으로 전쟁을 피했다. 형식적이었지만, 사대 관계를 유지했다. 당나라 역시 이런 고구려와 교류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상대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당나라는 여전히 고구려 정벌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고구려 역시 이에 대비했다. 고구려는 당나라와 화친을 하면서도 요동방어선을 강화하는 천리장성을 축조하면서 침략에 대비했다. 두 나라의 긴장된 대립 관계는 양국의 집권세력이 변화하면서 강대강의 대결로 변모했다. 

당나라는 제2대 황제 당태종 이세민이 즉위하면서 고구려 침략을 본격화했다. 이세민은 왕자시절 차기 권력에서 앞자리에 있지 않았지만, 형제들과의 권력다툼에 승리하며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살육이 있었다. 즉위 초기 정통성 확립에 어려움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세민은 내치와 외치에서 모두 능력을 발휘하며 그에 대한 정통성 시비를 스스로 사라지게 했다.

다소 과장된 측면도 있지만, 중국 역사에서 정관의 치로 평가될 만큼 당태종 이세민 집권기 당나라는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국가 재정을 풍족했고 이민족과들을 힘으로 당태종은 동돌궐을 제압하며 최고 칸으로 추앙받기도 했다. 또한, 동양 서양을 잇는 교역 통로인 실크로드까지 장악한 당나라는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부강한 나라로 올라섰다. 이를 바탕으로 당태종은 고구려 정벌의지를 더 확고히 했다. 

그 시기 고구려 정국도 큰 변화를 맞이했다. 대 당 유화책을 펼치던 영류왕이 시해되고 그를 따르던 정치세력들 몰락하는 정변이 일어났다. 그 중심에는 연개소문이 있었다. 고구려 유력 가문 출신의 연개소문은 30대 나이에 권력의 실세가 됐다. 이미 그의 가문은 영류왕을 포함한 귀족 세력에 큰 견제를 받는 중이었다. 연개소문은 아버지의 직책을 물려받았지만, 반대파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는 천리장성 축조의 책임자로 변방에 나가 있다 자신을 축출하려는 움직임을 감지하고 무력으로 상황을 반전시켰다.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한 연개소문은 보장왕을 왕으로 옹립하고 그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국정을 총괄했다. 연개소문의 집권은 분명 명분이 약한 권력 찬탈이었다. 하지만 연개소문으로서는 자신과 자신의 세력이 축출될 수 있는 상황을 극복해야 했다. 연개소문의 등장은 내부 권력 투쟁의 산물이었다. 중국 등의 역사서에는 연개소문이 성격이 매우 포악하고 잔인한 인물로 묘사되곤 하는데 이런 정변의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들과 맞선 고구려 대표 인물에 대해 상당한 과장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연천의 고구려 흔적 호로고루 성 성벽



연개소문은 집권 초기 당나라의 도교를 받아들이는 등 교류를 지속했지만, 당태종으로서는 고구려의 급변 상황이 침략의 중요한 구실이 됐다. 당태종은 무력으로 권력을 찬탈한 연개소문을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645년 고구려 침략을 단행했다. 그 명분이 아니어도 당태종의 고구려 침략은 예정된 일이었다. 

나름 대비를 한 고구려였지만, 당태종 이세민이 이끄는 당나라군은 이전의 수나라 군과 질적으로 다른 강군이었다. 병력수는 크게 줄었지만, 그들은 정예부대였다. 당나라는 그들의 정별한 이민족 군대까지 포함해 전투력을 끌어올렸고 한층 발전된 공성무기 등을 동원했다. 당나라의 국력을 결집한 당나라 군을 직접 이끌고 고구려로 향한 이세민은 자신감이 넘쳤다. 그는 고구려 국경을 향하는 길에 넘어야 하는 늪지대 요택을 지나며 부설한 다리를 불사르며 스스로 퇴로를 편안한 퇴로를 끊었다. 평양성까지 단숨에 점령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당나라군은 육군과 수군의 합동작전으로 요동의 고구려 성을 점령해나갔다. 특히, 고구려 요동 방어선의 핵심인 요동성을 15일만에 점령하며 고구려를 충격에 빠뜨렸다. 요동성은 과거 수나라의 백만 대군이 수개월의 걸친 공격에서 넘기 못한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이세민은 과거 수나라의 실패를 연구하고 효과적인 공성전을 펼쳤다. 당나라군은 요동성 인근의 성들이 당나라 배후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해 요동성을 고립시켰고 바람의 방향을 이용한 화공으로 공략했다. 요동성의 고구려 군사들과 백성들을 결사 항전했지만, 당나라군에 요동성이 함락되는 상황을 막지 못했다. 막대한 인명 피해가 있었고 수십만석의 군량미가 당나라 군 수중으로 들어갔다. 

고구려로서는 큰 위기였다. 당나라군은 요동의 또 다른 요충지 안시성으로 향했다. 안시성이 무너진다면 고구려는 그들의 수도 평양성이 그대로 위협받을 수 있었다. 이에 연개소문은 안시성을 지원하기 위한 지원군을 대거 파견했지만, 그 지원군마저 당나라군에 궤멸되고 군사를 이끌던 지휘관들이 투항하면서 더 큰 위기에 빠졌다. 안시성은 그들과 함께 싸울 수 있는 인근 성들마저 함락되는 상황에서 사실상 고립무원의 처지였다. 

하지만 안시성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성주 양만춘을 중심으로 뭉쳐 당나라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또 막아냈다. 그 공방전은 3개월을 넘어섰다. 고구려 최고 요충시 요동성도 15일만에 점령했던 당나라군으로서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이에 당태종은 안시성을 지나 평양성으로 직접 공략하는 방안도 고려했지만, 안시성을 포함해 장악하지 못한 요동의 고구려 군이 보급선을 끊고 후방을 공격하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당태종은 다시 안시성 공략에 힘을 집중했다. 그럴수록 안시성은 강하게 저항했다. 험준한 산을 기반으로 한 산성인 안시성은 당나라가 자랑하는 첨단 공성기기의 위력이 반감되면서 당나라군이 효과적인 공격을 할 수 없었다. 

이에 당태종은 안시성 성벽보다 높은 토산을 쌓아 안시성을 공격하는 전략을 시행했다. 이는 총 인원 50만명을 동원해 당나라군은 안시성을 위에서 공격할 수 있는 토산을 쌓는데 성공했다. 수개월에 걸친 대 공사였고 당나라군으로서는 마지막 승부수였다. 안시성에는 큰 위기였다. 이 상황에서 토산이 붕괴되고 안시성 성벽 일부도 무너지는 일이 발생했다. 더 큰 위기가 될 수 있었지만, 고구려 군은 성문을 열고 나와 그 토산을 점령했다. 그들의 필살기가 무력화된 당나라군은 심하게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수 개월에 걸친 접전을 거치면서 당나라군은 막대한 피해가 이미 누적됐고 추위가 닥쳐오는 계절이 다가왔다. 고구려와의 전쟁이 길어지는 돌궐 등 북방 이민족들의 이상 움직임도 보였다. 더는 전쟁 수행이 어려운 상황에서 당태종은 철군을 결정했다.

 

멀리서 바라본 호로고루 성



중국 역사서에는 당태종이 철군을 하면서 안시성 성주에 경의를 표하며 비단을 선물했고 안시성 성주는 떠나는 당태종에게 역시 경의를 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당태종의 패전을 희석하기 위한 목적이 다분히 보인다. 사실상 패전한 당나라군위 귀환길은 험난했다. 늪지대인 요택을 건너는 일부터 난제였다. 그들이 부설한 다리를 모두 불태운 탓에 다시 다리를 건설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고구려 군은 수성에서 반격으로 태세를 전환하며 그들을 압박했다. 철군 과정에서 당나라군은 더 큰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중국 역사서에는 당태종이 다리 부설을 함께 했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만큼 험난한 여정이었다.

또 다른 야사에는 고구려 군이 당나라군을 추격해 요서 지역까지 장악했고 당나라군이 전멸의 위기까지 몰렸다고 전하고 있다. 고구려 군의 추격을 피하던 당태종이 우물에 숨어 추격을 따돌렸고 그 자리에 탑을 건립했다는 중국 지역의 설화도 전해지고 있다. 그만큼 고구려의 반격은 매서웠고 그 중심에는 연개소문이 있었다. 중국의 전통 경극에서 연개소문은 매우 공포스러운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그만큼 당나라에게 연개소문은 두려운 존재였고 안시성 전투를 포함한 1차 고당 전쟁은 당나라의 패전이었다. 

이런 승리의 역사는 아쉽게도 우리 역사서가 아닌 중국 역사서에 의존해야 하는 현실이다. 상당 부분이 중국의 시각으로 쓰여져 있고 고구려 관련 기록을 부실할 수 밖에 없다. 당나라 패전의 상당 부분도 실제와 다를 수 있다. 안시성 전투와 관련한 기록도 상당 부분은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최근 큰 흥행을 기록했던 영화 안시성에서도 상당 두분은 작가적 상상력이 가미되어 있다. 단적으로 안시성 전투 당시 큰 활약을 했던 여성 부대의 존재는 관련 기록이 없고 전투의 장면도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었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안시성 성주의 알려진 인물도 사실은 가공의 인물이라는 점이다. 중국 역사서에도 안시성 성주의 이름을 나와있지 않는다. 훗날 중국 명나라 소설에서 안시성 성주의 이름을 양만춘이라 하면서 그 이름이 정설로 굳어졌다. 실제 양만춘의 존재 유무도 불투명하다. 빛나는 승리를 이끈 주인공의 존재조차 확실히 알 수 없다는 점은 우리 역사에서 너무 아픈 부분이다. 다만, 안시성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중국내 지역에 당나라군이 당시 쌓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토산이 흔적이 남아있어 당시 전투를 기억하게 하고 있다. 안시성 전투는 분명한 승리의 전쟁사라 할 수 있다. 

이런 저런 아쉬움이 있지만, 안시성 전투의 승전은 분명한 사실이다. 성주 양만춘이 가공의 인물이라 해도 그들보다 훨씬 강한 침략군을 상대로 안시성의 군인들과 백성들은 처절한 싸움을 했고 침략자들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 성주가 누구인지는 어쩌면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안시성의 승전은 성을 끝까지 지킨 병사들과 그들과 운명을 함께한 안시성의 백성들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승리의 진짜 주인공은 성주 양만춘이나 고구려의 권력자연개소문이 아닌 당시 고구려인 전체이기 때문이다. 

안시성 전투의 패전 이후에도 당태종 이세민은 고구려 정벌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고구려의 국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국지전을 지속했고 또 다른 대규모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세민은 그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고 지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안시성 전투이후 지병이 급격히 악화되었다고 전해진다. 일설에는 전투 중 고구려 군의 화살을 맞고 한쪽 눈을 잃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정설은 아니다. 결국, 이세민은 고구려 정벌의 꿈을 이루지 못한채 세상을 떠났다는 건 분명하다. 

 

연천 고루려 유적지 호로고루 성



이세민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지만, 당나라의 고구려 침략은 계속됐다.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면서 고구려는 남과 북의 적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연대소문을 중심으로 고구려는 그 침략을 막아냈지만, 오래 지속된 중국 왕조와의 전쟁은 고구려의 국력도 함께 약화시켰다. 그 사이 신라를 견제하던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멸망하면서 고구려의 외교적 고립이 더 심화됐다. 고구려를 이끌던 절대 권력자 연개소문이 세상을 떠나자 지도층의 권력 다툼이 거세지고 국론도 분열됐다. 강한 적을 앞에 두고 벌어진 내분은 고구려 멸망의 결정적 원인이 됐다. 결과적으로 연개소문은 대당 전쟁의 영웅이기도 했지만, 고구려의 멸망을 불러온 또 다른 이면을 가진 인물이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대립하던 삼국의 구도는 나당 연합군의 결성과 함께 균형이 무너졌고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신라가 마지막 승자가 됐다. 하지만, 신라의 삼국 통일은 대동강 이남의 고구려 영토 일부를 포함한 제한적인 통일로 진정한 삼국 통일로 보기 어렵다는 설이 다수다.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는 요동지역을 그들의 영향력 아래 두려했지만, 지속적인 저항에 직면해야 했다.

결국, 요동지역은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발해가 들어서며 고구려를 이은 새로운 국가가 그 주인이 됐다. 우리 역사는 발해가 성립된 이후 우리 역사를 남북국 시대로 부르고 있다. 즉, 고구려는 멸망했지만, 그 정신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 발해로 이어졌다. 수나라와 당나라와의 계속된 전쟁을 이겨낸 고구려의 투쟁의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점에서 안시성 전투는 중국 통일 왕조와의 전쟁사에서 가장 마지막 승전의 기록으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고구려는 먼 고대의 역사라고 하지만,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 역사다. 어려운 일이지만, 안시성 전투를 포함한 고구려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보다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중국 역사서에만 의존하지 않고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진실을 밝히는 노력을 지속할 필요가 있다. 이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한국 문화의 중국 기원설 등 역사 왜곡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다. 앞으로 자랑스러운 고구려의 역사가 더 많이 알려지기를 소망해 본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지후니,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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