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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홍성군은 천수만의 바다를 앞에 두고 있고  삽교천변의  넓은 평야를 품고 있다. 또한 광천 우시장으로 대표되는 한우와 충남지역 한돈 농가가 밀집한 대표적인 축산 단지도 있어 농수축산물 산지가 함께 모여있는 지역이다. 또한, 바다와 접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온화한 기후 조건이다. 이에 중요한 농산물과 축산물의 생산지이기도 한 홍성은 삼국시대 백제의 영토에 속했고 오랜 지역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홍성군에는 군은 최근 이 지역에 내포 신도시가 들어서고 충남도청과 관련 기관이 이전하면서 지역의 행정중심지로도 새롭게 자리하고 있다. 도시 기행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20회에서는 홍성군의 다양한 봄 풍경과 함께 그 안에 살고 있는 이웃들과 만났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성곽길을 따라 걸으며 시작한 여정, 이 성곽은 과거 홍성의 옛 이름인 홍주의 이름을 담고 있는 홍주읍성이었다. 과거 농업이 주 산업이었던 시절 어업까지 흥했던 홍주, 지금의 홍성은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에 고려 시대 지역에 홍주목이 설치되고 성곽이 조성되었다. 삼국시대로부터 세월의 흐름 속에 홍주읍성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그 원형이 상당 부분  파괴되고 사라졌다. 하지만 홍화문을 포함한 아직 남아있는 성곽은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홍주읍성은 과거 현재가 공존하고 홍성의 역사를 상징하는 특별함이 있었다.

홍성의 유적을 지나 넓은 평야가 펼쳐진 시골을 따라 걸었다. 그 길에 옹기 만들기가 한창인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과거 이 마을은 옹기마을로 유명했지만, 옹기 수요가 줄어들면서 옹기 장인들이 하나 둘 마을을 떠나며 과거의 기억이 사라졌다. 하지만 5대째 옹기가마를 지키고 있는 장인과 그 아들에 의해서 전통 옹기의 기술이 전해지고 있었다. 도자기를 굽듯 장인의 손길이 처음부터 끝까지 닿아야 하는 전통옹기는 마지막 5일간 가마에서 구워지며 비로소 세상에 그 모습을 보일 수 있다. 팔순의 장인은 지금도 그 일을 아들과 함께 하고 있었다. 여전히 옹기를 찾는 이들을 위해 이 부자는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렇게 지켜지는 우리 전통이 더 오랜 세월 이어지기를 마음 가득 소망해 보았다. 

 

 


홍성의 전통시장으로 향했다. 지역에서는 오랜 역사를 가진 전통 5일장이 열렸다. 시장의 활기찬 모습과 함께 시장의 역사를 보여주는 흔적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 시장에서 시장의 역사를 이어가는 장소가 있어 찾아보았다. 필순의 노부부가 만들어내는 호떡인 기존 호떡과 달리 기름기를 싹 뺀 독특함이 있었다. 5일장이 열리는 날에만 맛볼 수 있는 호떡은 홍성 5일 장의 명물로 많은 이들이 찾고 있었다. 그 단골들을 위해 노부부는 분주히 호떡을 만들고 있었다.

다른 한편에 100년 전통의 대장간이 있었다. 과거 많은 대장간이 경쟁하던 대장간 거리에서 유일하게 남은 시장의 대장간은 함께 나이를 먹어 빛바랜 각종 도구들과 함께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 역사와 함께하는 각종 농기구는 이 대장간의 대표 상품으로 그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는 하나의 작품이었다. 이 대장간은 3대째 대장간을 지켜온 사장님과 그 아내가 함께 운영 중이었는데 어깨너머로 배운 아내분의 실력은 대장간에서 그를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로 만들었다. 부부의 내공이 함께 하는 대장간이 그래서 더 정겨워 보였다. 

장날의 시끌벅적함을 뒤로하고 한적한 한마을에 들렀다. 그곳에서 홍성 출신 인물의 삶을 만날 수 있었다. 현대미술의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응노 화백의 생가가 그곳에 있었다. 이응노 화백은 1904년 홍성에서 태어나 17세에 그림을 배우기 위해 가출했고 그림을 배우면서 화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초기 그는 수묵화 등 동양화를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스스로 만들었다. 그는 기존 미술계의 관행을 거부하고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한국화를 추구했다. 그의 작품은 유럽에서 크게 인정받았고 그의 주 활동 무대는 프랑스가 됐다. 

하지만 화가 이응노의 분단된 조국 현실 속에서 이념 대결에 희생되어 큰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67년 박정희 정권 시절 이응노 화백은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된 해외 간첩단 사건인 동베를린 사건,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간첩 혐의로 고국으로 납치되어 2년의 기간 옥고를 치렀다. 당시  이 사건은 프랑스와 당시 서독에 유학생과 교민 등이 북한에 포섭되어 간첩교육을 받고 대남적화통일을 위한 활동을 하였다고 했지만, 실체적인 증거는 없었다. 이응노 화백은 북한에 있은 아들의 생사 확인과 상봉을 위해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의 접촉한 것이 문제가 됐다. 혈육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그에게 간첩이라는 누명을 씌우고 말았다. 감옥에서 풀려난 이응노 화백은 프랑스로 건너가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프랑스에서 생을 마무리했다. 

원치 않았던 일도 이응노 화백은 몸은 고국과 멀어졌지만, 그의 작품에는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곳곳에 담겨 있다. 해외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그 가치를 인정받았던 그였지만, 그의 마음속에서 항상 고국과 고향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응노 화백의 생가와 그의 기념관에서 비운의 예술가의 삶을 살필 수 있었다. 

잠시 무거운 마음을 뒤로하고 한 시골길을 따라 걷다 항아리가 줄지어 있는 한 집 마당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곳에서 노모와 그 아들이 식초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들은 대기업에 일했지만, 전통 식초의 명백을 이어가기 위해 귀향을 결심했고 어머니와 함께 그 일을 하고 있었다. 전통 식초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그 기술이 사라지고 명백을 끊길 위기에 있었다. 이 모자는 전통 식초의 기술을 지키고 보존하고 있었다. 

전통 식초는 효모를 만드는 과정부터 섬세한 작업이 필요했다. 이후 장에서 발효를 시키는 과정도 3년이 시간이 필요하고 그 기간에도 수시로 사람의 손길을 거쳐야 한다고 했다. 힘든 작업이 연일 이어지지만 이 모자는 함께 힘을 모아 식초를 만들고 또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들의 정성이 모여 우리의 또 다른 전통이 사라지지 않고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전통 식초의 새콤함에서 벗어나 또 다른 마을로 향했다. 그곳에서 소로 밭은 갈고 있는 농부를 만났다. 이제는 농기구로 보편화된 우리 농촌에서 소로 농사를 하는 모습은 보기 힘든 광경이 됐다. 마치 과거 큰 반향을 일으켰던 영화 워낭소리의 노인과 평생을 그와 함께 한 일소의 모습이 떠올랐다. 홍성에서 만난 일소의 모습은 생소하면서 반가움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현장에서 만난 소는 아직 일이 서툴러 보였다. 사연이 있었다. 소의  주인은 어려서부터 소로 농사일을 배웠고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어서도 그 방식을 버리지 않았다. 불편하기도 하고 소를 먹이고 관리하는 일도 어렵지만, 보다 친환경적인 농법을 그는 버릴 수 없었다. 최근 그는 그와 동고동락했던 소를 떠나보내는 아픔이 있었다. 지금 소는 그 소를 이어갈 후계자로 교육 중이었다. 아직은 부족함이 있지만, 농부는 인내와 정성으로 소를 보살피고 함께 또 다른 수확을 위해 호흡을 맞춰가고 있었다. 농부의 우직함이 이번에도 소와 잘 조화되기를 기대하며 길을 나섰다. 

 

홍성 광천 우시장 풍경



한 농촌 마을 길에서 덤불 속에서 무엇인가를 캐고 있는 한 아주머니를 만났다. 그 아주머니는 풀과 같은 모습의 무릇을 캐고 있었다. 일상의 풀과 구분이 잘 안되는 모습의 무릇은 줄기 아래 뿌리가 마늘같이 생겼다. 아주머니는 어린 시절 봄이면 어머니와 함께 이 무릇을 캐고 손질해서 먹었던 기억을 잊지 않고 있었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돌아보며 무릇을 캐고 어머니가 가르쳐준 방법으로 손질하고 가마솥에 삶아 먹곤 한다고 했다. 이 무릇은 과거 먹을 것이 귀한 시절 이를 대체할 수 있는 먹거리였다. 다양한 음식이 많아진 요즘에 무릇은 먹거리로서 가치가 크게 떨어졌다. 그 맛도 결코 맛있다 할 수 없지만, 아주머니에게는 어머니와 자신을 연결해 주는 삶의 일부분과 같았다. 

여정의 막바지, 한 농촌 마을 길에서 머위를 캐고 있는 할머니들을 만났다. 봄나물로 먹는 머위가 이 마을에서는 지천에 있었다. 한 할머니를 따라 오래된 농가 주택을 찾았다. 18세에 이 마을에 시집온 할머니가 80살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살아온 이 주택은 세월의 흐름 속에 낡고 빛바랜 모습으로 가득했다. 이 집에서 할머니는 이제 90살을 넘긴 할아버지가 살아가고 있었다. 이 집에서 노부부는 자식들을 키워냈고 이 집과 함께 늙어갔다.

보통 사람들에는 불편하고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한 집이지만 자신들의 삶과 함께 한 집을 부부는 포기할 수 없었다. 부부는 손수 기둥을 만들거나 하면서 집을 수리하고 집을 지켜가고 있었다. 인생의 황혼기, 이 노부부는 서로를 의지하면서 하루하루 그들만의 행복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들에게 이 집은 불편하기보다는 그들의 삶 그 자체로 보였다. 

이렇게 충남 홍성에는 지역의 긴 역사와 닮아있는 시대의 조류에도 흔들리지 않고 한결같은 삶을 살아가는 이웃들이 곳곳에 있었다. 우리 전통을 지켜가고 삶을 행복을 만들어가는 이웃들의 모습에서 행복의 또 다른 일면을 살필 수 있었다. 그런 이웃들의 행복이 모인 홍성은 봄날의 따스함과 너무 닮아 있었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지후니,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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