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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년 중국과 맞섰던 동아시아의 강국 고구려가 멸망했다. 고구려는 중국 통일 왕조였던 수나라와 당나라와의 계속된 전쟁에서 승리하며 굳건함을 보였지만, 그 전쟁으로 국력은 나날이 쇠퇴했다. 여기에 신라와 당나라가 군사 동맹을 체결하며 고구려는 남쪽과 북쪽에서 동시에 적을 상대해야 했다. 신라를 견제하는 역할을 했던 백제가 660년 나. 당 연합군에 멸망하면서 고구려는 외교적 고립에 빠졌다. 또한 절대 권력자가 연개소문의 사망 이후 권력층의 내분이 겹쳤다. 고구려의 내분은 나. 당 연합군에 큰 호재였다. 결국, 고구려는 그 운명을 다하고 말았다. 

고구려의 멸망으로 고구려가 장악했던 만주, 요동지역은 힘의 공백이 발생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대동강 이남으로 그들의 영토를 한정했다. 당나라는 옛 백제지역과 고구려 지역에 도호부를 설치하고 영향을 행사하려 했지만, 백제지역의 도호부는 신라에 의해 축출됐고 평양성에 설치됐던 도호부 역시 고구려 유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밀려 요동으로 옮겨야 했다. 그마저도 유지가 어려웠다. 요동에는 여전히 고구려 세력이 남아있었고 당나라에 저항했다. 말갈과 거란 등 다른 민족들도 있었다.

이에 당나라는 요동지역의 고구려 유민들과 여타 민족들을 대거 요서 지역인 영주로 이주시켰다. 당나라는 그들의 영역 내에서 이민족을 관리하고 요동지역에 그들의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의도였다. 당나라의 유민 이주정책과 지속적인 압박으로 요동지역의 고구려 세력을 점차 힘을 잃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정신마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이런 사황에서 고구려 유민들의 다수 거주하던 영주지역에 거란족의 반란이 일어났고 극도의 혼란 상황이 발생했다. 이에 고구려 유민들의 지도자 걸걸중상과 말갈족의 지도자 걸사비우는 함께 그들의 무리를 이끌고 당나라 세력이 미치지 않는 요동지역으로 대거 이주했다. 이 과정에서 드 그룹의 지도자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사망했지만, 걸걸중상의 아들 대조영이 이들을 대신해 세력을 이끌었다. 대조영이 이끄는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족 세력은 당나라의 추격을 뿌리치고 요동을 지나 연해주 가까운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 세력은 698년 동모산 자락에 터를 잡고 나라를 세웠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30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발해는 여러 민족들이 함께 하는 연합국가의 형태였지만, 고구려 계승을 분명히 했다. 이는 내부적으로 국가 통합을 위한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이었지만, 당나라와의 대립을 불가피하게 했다. 당나라는 강성했던 고구려를 멸망시킨 강국이었고 실크로드를 통한 동. 서양 교역로를 장악한 당시로는 세계 최강국이었다. 발해는 당나라에 맞서는 한편, 고구려가 그랬던 것처럼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그들 중심으로 세계관을 유지했다. 이는 군사적 충돌을 불가피하게 했다. 

특히, 발해의 2대 왕 대무예 무왕 시절 발해와 당나라 간 수차례 전쟁이 발생했다. 특이한 건 발해는 수세적인 입장에만 있지 않았고 적극 공세로 당나라와 맞섰다는 점이었다. 이에는 발해의 대내외적 변수가 있었다. 발해는 당나라와 멀리 떨어진 지역에 도읍했고 두 나라 사이에는 돌궐과 거란족이 위치해 있었다. 일종의 완충 지제가 존재했다. 돌궐과 거란은 전통적으로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발해가 건국할 당시도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당나라는 발해를 직접 공격하기 위해서는 돌궐과 거란의 세력을 꺾어야 했다. 이는 발해가 당나라에 강경책으로 맞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발해는 거란, 돌궐과 교류하며 그들의 당나라와 유착하지 않도록 관리했다. 이를 통해 발해는 당나라와 현상 유지를 할 수 있었다.

이에 당나라는 발해 북쪽 지역에 자리했던 흑수 말갈과 우호관계를 맺으며 발해를 압박했다. 발해를 통해 당나라와 교류하던 흑수 말갈은 당나라와 직접 교역을 하면서 경제적 이익을 더 취할 수 있었고 이는 두 나라 간 관계를 가깝게 했다. 당나라는 흑수 말갈을 관리하는 관청을 두기도 했다. 이는 발해에 큰 위협이었다. 자칫 당나라와 흑수말갈의 협공을 당할 수 있었고 나라의 존망을 위협하는 일이었다.

발해는 흑수말갈과 당나라의 관계를 끊어야 했다 흑수말갈에 대한 정벌을 실행에 옮겼다. 당나라의 전면전을 각오한 일이었다. 이에 대해 내부의 의견이 엇갈렸다. 대조영의 아들이었던 대무예와 대문예가 그 중심에 있었다. 대조영의 장남으로 2대 왕에 오른 대무예는 당나라에 대한 강경책을 주도했다. 그의 동생 대문예는 어려서부터 당나라에서 공부를 했고 당나라에 거주하면서 당나라 지도층과 교류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당나라의 국력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다. 대문예는 그 당나라와 대결하는 건 무리라는 판단을 할 수 있었다.  대문예는 흑수 말갈 공격을 이끌어야 했지만, 미온적으로 대처했다. 이에 대무예는 흑수 말갈 정벌 군의 장수를 교체하고 정벌을 강행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대문예는 당나라로 망명했다. 

최상위 지도층 인사의 당나라 망명은 발해에 큰 충격이었다. 발해 무왕은 당나라에 대문예의 송환을 강력히 요청했지만, 당나라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문예에게 높은 벼슬을 내리며 우대했다. 당나라는 향후 발해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대문예를 친 당나라 정권의 지도자로 활용할 수 있고 발해의 내분을 유도할 수도 있었다. 대 당 강경책을 펼치고 있는 무왕으로서는 온건파인 대문예의 당나라 망명으로 당나라와 발해 내 온건파가 연결된다면 온건파의 힘이 강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질 수 있어다. 이는 정권의 큰 위기이기도 했고 대외적으로도 국가의 위신이 크게 떨어지는 일이었다. 

이 시기 당나라는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자리한 거란을 강하게 압박했다. 발해 남쪽에는 당나라와 우호관계에 있는 신라가 있었다. 거란이 당나라에 굴복하고 신라가 당나라와 함께 발해를 공격한다면 발해는 고립될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당나라에서 있던 발해 무왕의 아들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차기 권력에 대한 불확실성마저 커졌다. 이렇게 안팎의 큰 위기 상황에서 발해 무왕은 당에 대한 선제공격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무왕은 거란과 함게 손을 잡고 당나라는 공격했다. 대표적인 사건은 발해군의 당나라 등주 공격이었다. 지금의 중국 산둥반도 지역에 자리한 등주는 당나라 동쪽의 국방 요지이자 해상 교통로로 중요한 거점이었다. 발해는 732년 등주를 기습공격했고 당나라 등주 지사가 전투에서 전사했다. 발해의 기습공격은 성공적이었다. 중국 역사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타국의 중국 본토 공격으로 당나라에는 큰 충격이었다.

그 여세를 몰아 발해는 당나라 국경의 요충지 마도산 지역을 공격해 승리하기도 했다. 발해는 선제 타격을 통해 당나라와의 전쟁에도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에 당나라는 당나라에 망명 중인 대문예를 발해 정벌 군의 사령관을 삼아 발해를 공략하고 신라가 남쪽에서 발해를 공격하도록 했다. 그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특히 신라는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했지만, 강추위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철군해야 했다. 

당나라의 군사적 대결에서 승리한 발해는 대외적으로 국가의 위상을 단단히 할 수 있었다. 발해 무왕은 영토를 확장하고 신생국 발해의 기틀을 확실히 다질 수 있었다. 이는 훗날 발해가 보다 대등한 위치에서 당나라와 외교관계와 교류를 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그들의 자주성을 지켜낸 발해는 이후 요동은 물론이고 연해주 지역까지 그들의 영토로 하며 과거 고구려 보다 더 넓은 영토를 가진 제국으로 성장했다. 전성기에는 해동성국이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의 문화,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이기도 했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는데 머물지 않고 그 영역을 더 확장한 또 다른 동아시아의 강국이었다. 

이렇게 강성한 국가였던 발해는 최전성기의 선왕 때를 지나 점점 쇠퇴하기 시작했고 926년 거란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발해는 거란의 전격적인 침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보름 만에 수도 상경이 함락됐다. 수백 년을 이어온 국가의 허망한 멸망이었다. 이를 두고 백두산의 대규모 폭발을 그 원인으로 하는 의견도 있지만, 백두산 폭발과 발해 멸망은 20년의 차이가 있어 직접적인 원인이라 하기 어렵다.

 

고구려 흔적, 연천 호로고루성



보다 합리적인 추론은 다민족 국가였던 발해가 시간이 흐르면서 지도층에 불열이 발생했고 국가적 통합의 느슨해지면서 이민족 침입에 대응하지 못했을 가능성이다. 또한, 당시 거란은 그들의 힘을 모아 요나라는 건국하고 중국을 위협하는 강국이었다. 발해 멸망 후 부흥 운동이 일어나고 발해를 계승하는 국가가 건국되기도 했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발해의 세력은 고려와 거란, 여진 등 세력으로 편입됐다. 발해가 멸망하면서 우리 민족 역사의 중요한 무대였던 만주, 요동 역시 역사에서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발해지만, 우리 역사에서 그 비중은 최근에서야 늘어나고 있다. 중국의 발해를 중국 지방정권으로 폄하면서 그들의 동북공정 틀에 가둬두려 하는 시도가 강하지만, 우리의 대응은 미약하기만 하다. 실제 발해사는 고구려사보다 그 사료가 극히 부족하다. 특히, 발해 후기 멸망까지 자료는 중국사에서도 그 흔적이 거의 없다. 발해 역사 연구도 조선 후기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발해의 영역이 중국과 연해주까지 우리가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이라는 점도 연구를 어렵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오랜 세월 발해는 우리에게 먼 막연한 위치의 고대국가였다. 발해를 포함한 남북국 시대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건 얼마 안 된다. 하지만 발해는 고구려 계승을 분명히 한 외교 문서 등 남겨진 역사 자료와 고구려 영향을 받은 각종 유물과 유적을 통해 우리 민족 역사에 편입될 수 있는 국가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우리가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고대 국가라 할 수 있다.

또한, 우리 민족의 역사 범위와 시야를 한반도에 국한하지 않고 대륙으로 넓힐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는 매우 크다. 보다 역동적이고 진취적인 사고를 가질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이는 고구려, 발해 역사를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앞으로 그 역사를 보다 체계적을 연구하고 우리 역사로 자리 잡도록 하는 노력이 지속될 필요가 있다. 이에 역사저널 그날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서태지의 히트곡 발해를 꿈꾸며가 더 의미 있고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 지후니,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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