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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에서 연산군과 정조는 지금도 크게 주목받는 임금이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 드라마틱 한 삶을 살았고 재임 당시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이 때문에 사극 드라마에서 연산군과 정조는 그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대한 많은 관심에는 온도차가 있다. 연산군의 최악의 폭군으로 정조는 시대의 성군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극명하게 대조되는 인물은 연산군과 정조에 공통점은 없어 보이지만, 이들에게는 불행한 유년 시기를 보냈다. 왕의 자손으로 남부러울 것 없어 보였던 이들이지만, 정치적 상황과 사회 관습에 따라 연산군과 정조는 그의 모친과 부친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는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에 의해 중전 자리에서 폐서인 된 후 사약을 받았고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정조의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했다. 연산군과 정조 모두 유년 시절 자신과 가까운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가해자가 되어 어머니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상황 속에 있었다. 큰 충격이었지만, 이에 대처하는 방식은 크게 달랐다. 이는 그들의 치세를 크게 달라지게 했고 역사적 평가도 엇갈리게 했다. 

연산군은 조선 역대 임금 중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지고 왕위에 올랐다. 성리학이 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를 지배하던 시간 연산군은 왕위 계승에 있어 적장자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역대 조선 왕조에서 적장자의 지위로 왕위에 오른 왕은 극히 드물었다. 조선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왕위 계승의 그림이었지만, 정치적 상황과 왕실의 사정 등이 겹치며 가장 이상적인 왕위 계승 계단을 밟은 이가 많지 않았다. 



연산군은 적장자의 지위에 조선의 최 전성기에 있었던 성종은 부왕으로 하고 있었다. 성종은 조선의 각종 제도를 정비하고 국가 시스템을 확립한 임금이었다. 그는 세종대와 이루 조선의 전성기의 정점에 있었다. 왕권은 강했고 그 권위도 높았다. 이런 성종의 후광까지 등에 업은 연산군은 강력한 왕권을 집권기부터 가질 수 있었다. 다만, 그에게는 세조가 집권한 계기가 되는 계유정난 이후 공신 세력들이 여전히 강했고 성종의 어머니로 막후 실력자였던 연산군의 할머니 인수대비가 왕실의 큰 어른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이에 더해 연산군에게는 중요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연산군이 어린 시절 그의 모친이 사사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폐비 윤씨로 역사책에 기록되고 있는 연산군의 모친은 성종의 후궁이었지만, 중전이 승하한 이후 중전으로 간택됐고 연산군을 낳았다. 그대로 생존했다면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대비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연산군의 모친은 이런 흐름보다는 성종의 사랑을 더 갈망했다. 성종은 왕위에 있던 시기 중전 외에 수많은 후궁과 그들로부터 많은 자식들을 얻었다.

이런 성종에 연산군의 모친은 크게 실망했다. 왕위를 이을 아들을 낳았지만, 그는 한 여인으로는 불행했다. 성종은 그를 찾지 않았고 외로운 시간이 이어졌다. 이에 연산군의 모친은 성종의 후궁들과 갈등을 빚었다. 하지만 이는 당시 조선에 강조되던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당시 여성은 남편에 대한 절대 순종을 강요받았다. 고려 시대 여성의 지위는 상당 부분 남성과 동등함이 유지됐지만, 성리학이 기본 이념으로 자리하면서 남녀의 관계를 남성 우위로 기울었다.

마침 성종 시대 막후 정치 실세였던 그의 어머니 인수대비는 여성의 순종을 강요하는 성리학의 예법을 강조하는 책을 집필해 보급했다. 이는 왕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수대비는 그의 배우자가 요절한 이후 강력한 정치력을 막후에서 발휘해 그의 아들 성종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수렴청정을 하는 등 당시 여성으로는 보기 드물게 정치에서 큰 역할을 했고 숭유억불 정책이 근간이 조선에서 불교를 옹호하며 불교 억제 정책에 반발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지만, 정작 자신의 며느리들에게는 성리학의 불평등한 부부관을 강요했다. 아들의 왕위를 단단히 하는 게 그 목적이었다. 연산군의 모친은 이런 왕실과 사회의 불평한 관행에 반기를 들었다. 그 과정에서 성종과 충돌이 있었고 성종의 얼굴에 상처가 나는 일도 있었다. 

일련의 상황은 연산군 모친의 입지를 더 불안하게 했다. 그녀는 둘러싼 억압에서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그녀를 더 옥좨는 상황이 발생했고 급기야 중전의 자리를 내준 데 이어 사약을 받고 마음 가득 큰 한을 간직한 채 세상을 떠나야 했다. 그녀는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성종은 그의 사후에도 폐비 윤 씨, 연산군 모친과 관련한 일을 언급하지 말도록 하는 유훈을 남기기도 했다. 

이런 배경에서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마음 가득 분노를 간직하고 있었다. 연산군의 주변 상황도 그를 위협하는 요인이었다. 완벽한 왕이었지만, 냉혹한 아버지였던 성종, 그 성종의 막후에서 권력을 행사하던 할머니 인수대비, 연산군을 둘러싸고 있는 세조의 공신 세력은 훈구세력, 중종 이후 중앙 정계로 진출해 정치적 영향력을 높이고 있었던 사림세력까지 연산군은 적장자의 지위로 강력한 왕이 될 수 있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위치였다. 당연히 왕권 강화를 위한 시도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왕권 강화책은 자신만을 위한 일이었다. 연산군은 2차례 사화를 일으켜 사림과 훈구세력에 대한 
대규모 숙청을 단행했다. 첫 번째 사화에서 숙청당한 사림세력은 그 이전에도 수차례 사화를 겪었지만, 중앙 정계로 꾸준히 진출했고 성종 때 와서는 사간원과 사헌부, 홍문관 등 삼사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왕을 견제하는 기능이 있었다. 성종은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상호 소통하는 왕이었지만, 연산군은 달랐다. 연산군에게 삼사를 장악한 사람 세력을 눈에 가시 같았다. 이는 훈구세력들도 다르지 않았다. 이에 연산군과 훈구세력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고 만들어진 명분으로 사림세력에 대한 사화가 일어났다. 이렇게 사림 세력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왕권 강화에 탄력을 받은 연산군은 그 기세를 몰아 또 한 번의 사화를 일으켰다. 그 대상은 사림 세력만이 아니었다. 연산군은 세조 때 이후 주류 정치세력을 차지하고 있던 훈구세력에도 칼날을 들이됐다. 그 저변에는 자신 모친의 죽음에 대한 원한도 함께 했다. 연산군은 모친의 죽음과 관련한 인사들에 대한 무차별 숙청을 단행했고 왕실 인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대규모 살육이 이어졌다. 각종 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등장하는 연산군의 폭정을 대표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연산군은 대규모 살육이 동반된 숙청작업을 통해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되는 세력을 제거했다. 막후 실력자인 할머니 인수대비도 그 과정에서 세상을 떠났다. 연산군에 대항할 세력이 완전히 사라졌다. 연산군은 그에게 주어진 무한 권력을 나라를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 연산군은 사치와 향락에 탐닉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사이 권력은 연산군을 추종하는 소수의 간신들이 장악했고 성종 때 완성된 국가 경영 시스템이 파괴됐다. 사치와 향락에 빠진 왕과 그 왕을 정점으로 사리사욕을 채우는 측근들의 정치에 나라의 살림은 어려워지고 백성들의 삶도 피폐해져갔다.

민심까지 잃어버린 연산군이 최후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연산군은 반정으로 왕위를 내려놓아야 했고 귀양지에서 쓸쓸히 삶을 마감했다. 30대 젊은 나이였다. 무엇보다 연산군은 역사에서 최악의 폭군으로 영원히 남았다. 그 평가는 시대가 변해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가 나라에 끼친 해악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연산군의 역사를 기록한 이들이 그를 왕위에서 끌어내린 세력들이라 해도 그의 악행은 상상을 초월했고 나라에 도움이 안 되는 자신만을 위한 일이었다. 연산군은 주어진 권력을 사적으로 남용했다. 불우한 유년기의 기억이 그를 망쳤다는 변명을 할 수도 있지만, 나라를 경영하는 제왕에게 그런 변명은 비겁한 변명일 뿐이었다. 그런 마음이었다면 그는 제왕의 자리에 오르지 말았어야 했다. 

연산군과 달리 정조는 불우했던 유년의 기역을 성공적인 국가 경영과 업적을 쌓으며 상쇄했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사사되는 과정을 그대로 지켜봤다. 아버지 사후 세손의 자리에 오르긴 했지만,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이끈 노론을 중심으로 한 집권세력들이 그의 안위를 항상 위협했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다면 노론에는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붕당 정치가 자리를 잡은 조신 후기 왕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존재가 아니었고 반대당에는 정적과 같은 존재였다. 더군다나 노론은 오랜 세월 정치 중심 세력으로 자리하고 있어 그 힘이 막강했다. 이제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그 입지가 불안했고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정조는 이에 굴하지 않고 제왕의 능력을 키워나갔다. 비록 아들을 스스로 사사하는 비정함을 보였지만, 할아버지 영조는 정조에 든든한 후원자였다. 영조는 후계자로 정도의 입지를 확고히 하도록 했다. 영조는 뛰어난 정치가였다. 그는 탕평책을 앞세워 일당 독재를 견제했고 오랜 연륜으로 정치세력들의 대립을 이용해 정국의 주도권을 유지했다. 이런 영조가 장수하면서 세손 정조는 큰 고비를 넘기고 후계자의 자리를 지켜낼 수 있었다. 

정조는 영조 이후 왕위를 이어받으면서 영조의 유산을 계승했다. 연산군이 성종의 유산을 스스로 거부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이는 정치적 입지가 단단하지 않았던 정조에게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하지만 정조는 자신의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표명하는 등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대신 정도는 시력을 키우고 민심을 헤아리는 정치로 입지를 점점 넓혀나갔다. 

 



정조는 그 스스로가 다방면의 전문가였다. 그 누구보다 뛰어난 학식과 지식이 있었고 무예에도 능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대신들과 논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정조는 통치기반을 든든히 하는 이론적 기반을 다지기 위한 학문 연구기관이 규장각을 설치하고 그 안에 다양한 인재들을 연구관으로 등용했다. 이들 중에는 당시에는 벼슬길에 오를 수 없었던 서얼 출신도 포함됐다. 기존 정치세력과 거리가 있는 인사들을 등용하면서 정조는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삼았다. 그 안에서 다양한 실학자들이 나오기도 했다. 이들은 조선 후기 마지막 중흥기를 이끄는 세력이 됐다. 또한, 정조는 자신의 친위 부대는 장용영을 설치해 그들의 최정예 부대로 육성했다. 이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발판이 됐다. 

이에 더해 정조는 지금의 수원에 수원 화성으로 대표되는 신도시를 건설하고 이를 통해 또 다른 정치적 기반으로 삼았다. 정조는 수원 화성에서 사도세자의 능을 만들고 추모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했다. 또한, 지금도 방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화성 행차를 통해 그의 힘을 과시하고 이를 통해 백성들과 소통했다. 백성들이 함께 하는 그의 화성 행차는 그의 자신감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이후 정조는 반대 세력까지 포함한 포용의 정치로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하는 정치를 했고 조선 중흥의 역사를 만들 수 있었다. 

정조는 자신의 불우했던 유년기를 자신을 더 강하게 하는 시간으로 삼았고 권력을 장악한 후 그 복수를 하기보다는 큰 정치로 반대세력들을 자신의 영역 안에 두도록 했다. 최근 당시 노론의 영수에게 그의 편지는 반대당과도 수수로 소통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그만큼 강력한 권력과 이를 통한 자신감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정조는 영조의 유산을 지키고 새롭게 창조하면서 성군의 면모를 보였고 지금도 칭송받고 있다. 

이렇게 연산군과 정조는 힘든 유년기 이후 판이한 대처로 그 운명을 바꿨다. 연산군은 복수에 집착해 성군이 될 기회를 스스로 날렸고 정조는 인고의 세월을 버티며 큰 업적을 남기는 왕이 됐다. 시대에 따라 그 평가가 달라질 수 있지만, 이들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각종 역사 프로그램,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두 인물의 상반된 모습은 자신의 운명에 대처하는 방법에 따라 그 운명이 변할 수 있음을, 그런 개인의 운명이 나라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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