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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철원은 서쪽으로는 경기도 연천과 접하고 동쪽으로는 강원도 화천과 양구와 접하고 있어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철원은 북한과 접하고 있는 최전방의 지리적 입지를 가지고 있다. 철원은 강원도 고성과 함께 그 영역의 일부가 북한과 비무장지대에 속해 있어 남북 분단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철원은 청정자연을 간직하고 있지만, 우리의 산업화 과정에서 다소 소외되는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철원은 오래전 화산 폭발과 그 용암이 분출해 형성된 넓은 평원이 기름진 농토가 있다. 한반도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화산지형은 철원을 강원도의 대표적인 곡창지대로 만들었다. 고대 철원은 넓고 광활한 농토로 인해 풍요의 고장이었다. 또한, 적의 침입에 대비할 수 있는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은 신라 말기 후 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태봉국을 건국하는 중요한 이유가 됐다. 궁예는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한반도를 넘어 옛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는 대제국을 꿈꿨지만, 거듭된 폭정으로 고려를 건국한 왕건에 의해 왕위에서 밀려난 후 생을 마감한 비운의 인물이기도 했다. 

궁예가 세운 태봉국의 이야기와 함께 철원은 남북 분단의 최전선에 자리하고 일제 강점기 철원은 국토의 중심부에 자리한 탓에 교통의 요지로 기능했다.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의 중간 기착지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해방 후 번성할 수 있는 입지였지만, 미국과 소련에 의해 38선이 그어지면서 철원은 북한 지역에 편입됐다. 6.25 전쟁 때에는 지리적의 중요성으로 인해 치열한 전쟁의 현장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철원의 상당 부분이 수복되어 대한민국의 영토로 편입됐다.

 



철원은 우리 고대와 현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중요한 장소였다.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25회에서는 철원을 찾아 지역을 대표하는 장소를 찾고 우리 이웃들을 만났다.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하기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독특한 지형을 관찰할 수 있는 철원 한탄강 계곡으로 향했다. 조선 시대 대표적인 의적이었던 임꺽정의 전설이 함께 하는 철원의 관광 명소 고석정에서 웅장한 한탄강 계곡을 살필 수 있었다. 한탄강 계곡은 오래전 화산 폭발과 함께 분출된 용암이 흐르다 식어 이루어진 주상절리가 강을 따라 긴 협곡을 이루고 있어 멋진 풍경과 함께 자연의 웅장함을 제대로 체험할 수 있었다. 고석정에서 타는 유람선은 한탄강을 따라가며 보다 가까이에서 그 모습을 살필 수 있었다. 

한탄강 계곡의 풍경을 뒤로하고 드넓은 철원 평야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에 올랐다. 철원의 평야는 험준한 산지 지형을 먼저 떠올리게 하는 강원도의 풍경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 비옥하고 넓은 철원평야와 청정자연의 조화는 이곳에서 생산하는 철원쌀을 명품쌀로 만들었다. 봄의 절정을 넘어 여름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철원 평야는 풍요로운 가을 수확을 위한 여정을 시작하고 있었다. 

철원의 자연을 벗어나 철원의 한 동네 골목길을 걸었다. 그 한편에 제분소가 보였다. 젊은 부부가 운영하는 제분소는 그 부부의 4자녀와 함께 노인 인구가 대부분인 마을에 활력소가 되고 있었다. 철원이 고향이 이 부부는 귀향을 결심하고 오래전부터 운영되던 제분소를 인수했다고 했다. 그들은 이 제분의 시설을 현대식으로 바꾸고 리모델링 했다. 남편은 물리학을 전공하며 과학자의 꿈을 키웠지만, 자녀들이 더 키울 수 있는 환경을 찾아 귀향을 결심했다. 그는 과학도답게 각정 시설과 장비는 자신만의 아이디어로 개선하고 새롭게 만들며 제분소를 매매일 새롭게 바꿔가고 있었다. 이런 젊은 부부의 제분소는 동네 주민들에게 사랑받는 공간으로 주민들의 방문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제분소의 부부는 이곳에서 삶의 새로운 희망과 행복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철원의 번화한 길을 걷다 한 빨래방에 들렀다. 이 빨래방은 일반적인 세탁과 함께 옷 수선을 전문으로 하고 있었다. 그 고객의 대부분은 군인들이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북한과 접해있는 접경지 철원은 많은 군부대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철원 경기의 상당 부분은 군인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 이 마을에도 군인들을 위한 공간이 곳곳에 있었다. 

이 빨래방은 달라진 군 문화를 보여주는 곳이기도 했다. 최근 입대한 신세대 군인들을 군 생활 속에서도 자신의 멋과 개성을 표출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군인들은 자신의 체형에 맞게 군복을 수선하기도 한다고 했다. 군하면 폐쇄적이고 조직의 문화가 강한 곳이라는 인식이 여전하지만, 철원에서 만난 빨래방은 그런 군이 변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다시 길을 걷다가 강원도 명물 막국수 식당을 만났다. 예쁜 꽃들이 가득한 화분들로 채워진 입구가 특징인 이 식당은 60여 년에 걸쳐 3대째 그 역사를 이어가는 곳이었다. 6.25 전쟁 직후 8남매가 있는 가정의 생계를 위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시작한 막국수 식당은 그 딸들과 사위, 다시 그들의 아들로 바통을 넘기는 중이었다. 식당 한 편에 자리한 오래된 밤나무는 식당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과거의 모습을 최대한 유지하려 하는 탓에 손이 가는 부분이 많고 힘든 일도 있지만, 식당을 운영하는 가족들은 서로를 위하는 마음으로 일을 나누며 행복한 일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런 가족들의 사랑으로 이 식당의 맛은 지켜지고 역사는 쌓여가고 있었다. 

남북 분단의 현실을 눈앞에서 살필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북한과의 접경지 비무장지대를 살필 수 있는 전망대에서 북녘땅을 살폈다. 마침 그곳은 궁예가 세운 태봉국의 도입지가 있었다. 궁예의 궁궐과 성곽은 남과 북의 경계 비무장지대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이 때문에 궁예 궁궐에 대한 발굴과 연구는 오랜 세월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한때 남북 관계가 개선되면서 남북 공동 발굴과 연구 가능성도 있었지만, 남북 관계 경색과 함께 실현되지 않았다. 수풀로 뒤덮여 있는 궁예의 궁궐은 지금도 사람의 발길이 닿기 힘든 곳에서 숨겨져 있었다. 역사적을 큰 가치고 있는 궁예 궁궐과 그 일대가 베일을 벗고 사람들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날이 오기를 소망해 봤다. 

비무장지대의 긴장된 풍경을 벗어나 개울물이 흐르는 농촌마을 길을 걸었다. 그 길에서 다양한 종류의 말들이 뛰어오는 말농장이 보였다. 그 말농장에서 남매가 말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이 말농장은 마장마술 등 승마용 말을 키우고 훈련시키고 있었다. 그 수는 30여 마리에 이른다고 했다. 목장을 운영하는 부모님의 권유로 말농장을 시작한 남매는 우리나라 최고의 승용마 생산지를 꿈꾸며 하루하루를 알차게 보내고 있었다. 그들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며 다시 길을 나섰다. 

넓은 차로가 함께 하는 마을 길을 걸었다. 그 길에 잘 가꿔진 넓은 정원이 있는 집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이 집의 주인은 매일매일 이 정원을 보살피고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정원은 마을 주민들의 쉼터였다. 그는 자신의 정원을 남과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다고 했다. 이 마을은 이 정원 외에도 집집마다 자신만의 정원이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담 대신 정원을 가꾸며 이웃들과 소통하고 마음을 벽도 허물었다. 사연이 있었다.

6.25 전쟁 후 폐허였던 이 마을에 돌아온 주민들은 그 폐허 속에서 좌절하기보다는 서로 힘을 합쳐 마을을 재건하고 일상을 되찾았다. 그 과정에서 한집 두 집 정원을 조성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각 집마다 정원이 조성되고 이 마을을 특징하는 상징이 됐다. 폐허 속에서 희망을 만들어낸 현장이었다. 그 마을 길을 따라가다 유서 깊은 철원향교에서 멋진 한옥의 멋도 즐길 수 있었다. 

그곳에서 돌미나리 농사를 함께 하는 가족을 만났다. 애초 가족은 사과 과수원 농사를 지으려 했지만, 토질이 이에 맞지 않아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 위기에서 돌미나리 농사로 방향을 전환했고 이는 가족들의 노력으로 자리를 잡았다. 항무지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고 더 큰 꿈을 키워가는 가족의 모습이 훈훈하게 다가왔다. 직접 수확한 돌미나리에  철원에서 나는 각종 산나물을 더한 철원의 맛 가득한 이 집의 나물 밥상은 매우 특별했다. 

여정의 후반부 남북 분단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장소를 찾았다. 남한에도 최북단에 자리한 간이역 월정리 역이 그곳이었다. 과거 경원선 열차가 지나던 이 간이역은 전쟁으로 그 기능을 잃었다. 철로변의 잡초와 역 한 편의 전쟁 중에 부서지고 녹슨 열차만이 이곳이 기차역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앞서 살폈던 정원 마을과 돌미나리 가족들의 모습처럼 폐허와 같은 이 역에서 기차가 오가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하며 또 다른 만남을 위해 길을 나섰다. 

 

철원의 명소 한탄강 은하수교



어느 산 아랫마을에서 텃밭을 가꾸고 있는 모자를 만났다. 아직 정정한 어머니와 그 아들은 농사일에 한창이었다. 어머니는 6.25 전쟁 중에 고향인 평안도를 떠나 월남해 이곳에 정착했다. 가능하면 고향과 가까운 곳에 살고 싶은 마음과 함께 통일이 되면 조금이라도 빨리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이 더해져 철원에 정착했다.

하지만 고향을 가고 싶은 희망의 세월은 70여 년에 이르렀다. 역시 실향민인 남편을 일찍 여의고 어머니는 3남매를 키우며 모진 세월을 견디고 또 견뎠다. 언젠가 북녘의 고향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은 어머니가 힘든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했다. 하지만 그 바람은 여전히 실현되지 않았고 어머니는 인생의 황혼에서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아들은 그 어머니가 살아온 세월을 시로 적어 기록했다. 

어머니는 북한 땅이 보이는 곳을 수시로 오가며 어머니는 망향의 설움을 달레도 귀향의 희망을 이어가고 있었다. 또한, 고향에서 먹었던 요리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그 어머니가 만든 음식은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이 함께 하고 있었다. 이런 어머니를 비롯해 전쟁으로 인해 원하지 않게 실향민과 이산가족이 된 이들의 아픔이 더 늦기 전에 치유되었면 하는 마음을 가져본다.

이렇게 강원도 철원은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살고 있는 이들은 그 아픈 역사에 머물러 있지 않고 새 희망과 밝은 미래를 만들어 기고 있었다. 철원 또한 국토의 중심으로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곳이다. 이런 이웃들을 감싸고 있는 접경 지역의 불안감이 사라지고 철원의 미래 가치가 실현되는 날이 하루빨리 찾아오기를 기대해 본다.


사진 : 프로그램 홈페이지 / 지후니,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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