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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대 역사에 있어 고구려, 백제, 신라는 치열하게 대결하며 고대 역사를 써 내려갔다. 삼국은 상호 대결과 함께 교류하기도 했고 강해진 나라를 두 나라가 연합해 맞서는 등의 방법으로 균형을 이루며 적대적인 공생을 했다. 그 관계 속에 고구려, 백제, 신라는 각각의 지형적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다른 색깔로 발전했고 민족 문화의 다양성을 가져올 수 있었다. 하지만 삼국시대는 대결의 역사였다. 누군가는 최후의 승자와 나와야 끝나는 대결이었다. 마지막 승자는 신라였고 그 북쪽으로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등장과 함께 남북국 시대로 변화를 겪었다. 

이런 삼국시대의 역사에서 대결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은 한강유역이었다. 한강은 드넓은 토지가 비옥한 농토를 형성해 농업이 산업의 중요한 기반이었던 고대 국가에서 중요한 생산기지였다. 또한, 상류에서 하류까지 풍부한 유량은 교통로로 유용했고 대중국 교역을 하기에도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한강유역은 경제적으로 대외 교류에서 중요한 요충지로 삼국의 주목을 받았다.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불가피했고 한강 유역을 차지한 나라는 삼국 경쟁에서 주도권을 잡았다.

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315회에서는 한강유역을 둘러싼 삼국의 대결과 그 의미, 숨겨진 이야기들을 다뤘다. 

한강유역의 첫 번째 주인인 백제였다. 고구려에서 분리되어 남하한 부여계 세력은 지금의 서울 송파구 일대를 도읍으로 정하고 백제를 건국했다. 한성백제 시대의 시작이었다. 백제는 한강 유역을 중심을 나라의 힘을 키웠고 가장 먼저 전성기를 구가했다. 백제 전성기를 이끌었던 근초고왕은 마한을 대부분 병합하여 백제의 영역은 호남지역까지 이르게 했고 활발한 대외 활동을 통해 중국과 일본에도 그 세력을 떨쳤다. 

 

 

 

근초고왕의 백제가 그 영역을 북쪽으로 넓히면서 고구려와 충동했다. 고구려는 압록강 유역을 도읍으로 정하고 그 세력을 키웠다. 고구려는 북방의 이민족과 중국 각 나라들과 대결하며 동북아의 강국으로 발전했지만, 남쪽으로도 그 세력을 확장했다. 특히, 평양성은 고구려의 남진에 있어 중요한 거점이었다. 백제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공격하며 고구려에 강하게 도전했다. 그 과정에서 고구려 고국원왕이 전투 중 전사하는 일도 발생했다.  이를 통해 백제는 삼국의 경쟁에서 가장 먼저 주도권을 잡았다. 백제에 밀린 고구려는 국가적 위기에 직면했다. 

이 위기에서 고구려 소수림왕은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이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 국가의 운영 시스템을 선진화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소수림왕의 개혁을 기반으로 고구려는 나라를 정비하고 국력을 강화했다. 그 시점에 등장한 정복 군주 광개토대왕은 고구려를 전성기를 이끌었다. 광개토 대왕은 우선 북쪽 변방에서 고구려를 괴롭히던 거란족과 돌궐 등 이민족들을 몰아냈고 여러 나라가 난립하며 혼돈 속에 빠져있던 중국 북쪽 지역의 나라들에도 밀리지 않았다. 이를 바탕으로 고구려는 요동 일대를 그들의 영역으로 만들었다.

북쪽 변방의 문제를 해결한 광개토대왕은 백제로 눈을 돌렸다. 광개토대왕은 백제 공격에 나서 그들의 영역을 고구려 영토로 편입했다. 급기에 백제의 수도 한성을 포위 공격했다. 열세를 절감한 백제 아신왕은 광개토대왕에 항복하며 신하를 자처했다. 백제와의 관계를 새롭게 한 광개토대왕은 신라에 침입한 왜의 군대를 섬멸했고 그 과정에서 그들과 우호관계에 있던 가야까지 공격했다. 고구려 군은 공격으로 가여 연맹을 주도하던 금관가야는 급속히 쇠퇴했고 고대 왕국 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국가 연맹 체제의 가야 신라에 병합되는 계기가 됐다.

이런 고구려의 군사적 지원을 받은 신라는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치러야 했다. 신라의 왕이 친 고구려 성향의 인물로 교체되고 고구려 군이 상당 기간 신라에 머물려 신라 내정에 관여했다. 신라는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놓인 국가가 됐다. 이는 독자적인 국가 발전에 큰 장애물이 됐다. 

이런 삼국의 역학관계가 고구려가 주도하는 흐름으로 변했지만, 한강 유역의 주인은 여전히 백제였다. 광개토대왕은 백제 왕조의 붕괴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신라에 대해서는 그들에 우호적인 정권을 세우는데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왕조를 무너뜨리지는 않았다. 일정 상호 존중과 공존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고구려 장수왕이 즉위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장수왕은 중국 왕조들과 친교 관계를 유지하며 북방의 위험 요소를 완전히 제거했다. 북방의 안정을 찾자 장수왕은 본격적인 남진정책을 실행에 옮겼다. 472년 평양 천도가 장수왕의 남진 정책을 상징하는 일이었다. 이미 광개토대왕 시대에서 평양에 다수의 사찰을 건립하고 중요한 도시로 발전시키긴 했다. 장수왕은 이를 더 발전시켜 수도를 옮겼다. 귀족 세력들을 견제하는 의미도 있었지만, 중요한 건 고구려 대외 정책의 중심축을 흔드는 일이었다. 이후 고구려는 본격적인 백제와 신라를 군사적으로 압박했다. 

 

고구려 호로고루 성





475년 장수왕은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점령했고 백제의 개로왕을 처형했다. 과거 백제 근초고왕과의 전쟁 중 전사한 고국원왕의 원한을 직접적으로 복수한 일이었다. 고구려의 백제에 대한 원한은 광개토대왕 비에서 백제를 백잔으로 비하하는 방법으로 광범위하게 유지 중이었다. 광개토대왕은 자비를 베풀었지만, 장수왕은 달랐다.

장수왕은 백제 공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돈독히 하며 사전 외교전을 전개했다. 백제 역시 개로왕이 중국 왕조들과 교류하며 함께 고구려 공격을 모색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북아의 강국이 된 고구려의 역량을 극복할 수 없었다. 중국 왕조들은 강국인 고구려와의 교류와 협력이 그들에게 더 큰 이익이었다. 개로왕의 외교전은 고구려의 백제 공격 명분만을 더 키우는 일이 됐다.

이에 더해 장수왕은 승려 도림을 백제에 파견해 개로왕의 측근 인사가 되도록 하는 첩보전을 전개했다. 도림은 고구려에서 죄를 짓고 도망 온 승려로 위장했다. 당시 불교가 융성한 고구려와 백제에서 승려는 높은 신분이었다. 백제 개로왕으로서는 의심을 하기 어려웠다. 또한, 도림은 뛰어난 바둑 실력으로 바둑에 대한 열의가 컸던 개로왕과 개인적인 친밀감을 조성할 수 있었다.

이렇게 개로왕의 신임을 얻은 도림은 백제 국정에도 관여했다. 도림은 개로왕을 현혹해 궁궐과 성곽 등의 대규모 건설 공사를 시행토록 했다. 개로왕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이를 강행했다. 이는 국력을 더 쇠퇴시키고 민심을 이반 시키는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신하들이 이탈해 고구려로 이탈하는 일도 발생했다. 고구려의 위협이 눈앞에 다가온 백제였지만, 백제는 스스로 힘을 소진하고 말았다. 장수왕의 첩보전은 그만큼 효과적이었다. 사전 작업을 완료한 장수왕은 육군과 해군을 포함한 공격으로 한성을 포위하고 단시간에 점령했다. 개로왕은 미쳐 피하지도 못하고 사로잡혀 처형되는 비운을 맞이했다. 개로왕의 처형으로 삼국의 관계는 상호 공존이 아닌 극과 극의 대립으로 변했다. 

수도가 점령당하고 왕까지 사망한 상황에서 백제의 잔존 세력은 남으로 이동했고 웅진, 지금의 공주에 새롭게 도읍을 정했다. 한성백제 시대의 종말이었다. 그들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었던 한강 유역을 상실한 백제로서는 사실상 멸망에 준하는 사태였다. 이는 고구려에 대한 백제의 원한을 더 키우게 됐다. 같은 부여계 국가였던 고구려와 백제였지만, 각자의 왕을 죽음에 이르게 하면서 그 관계가 회복 불능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장수왕은 이에 그치지 않고 남진을 지속해 서울 지역을 물론이고 북한강 상류지역과 남한강 지역까지 장악하며 그 세력을 확대했다. 이런 고구려의 압박에 백제와 신라는 나제동맹을 결성해 대항했다. 국가 존립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후 나제동맹은 100년 넘게 지속됐다. 그만큼 고구려는 강성했다. 이렇게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백제에서 고구려로 넘어왔다. 


고구려 절대 우위의 삼국 관계는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의 등장으로 큰 변화를 맞이했다. 백제 성왕은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됐던 백제를 새롭게 부흥하고 국력을 회복했다. 성왕은 안으로는 왕권을 강화하고 나라의 힘을 키웠고 왜와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그들과 연합했다. 성왕 시대 백제는 선진 문물을 왜에 전했다. 성왕은 좁은 웅진을 벗어나 넓은 평야가 있는 사비, 지금의 부여로 천도하며 나라 재도약의 계기를 마련했다.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하며 대내외에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백제 금제 사리보관함



이를 바탕으로 성왕은 신라와 연합해 고구려의 침공을 막는 것에서 벗어나 과거 영토를 수복하는 전쟁을 실행에 옮겼다. 당시 고구려는 북방의 이민족들의 침략에 맞서야 했고 권력층의 내분으로 국력이 쇠퇴하는 시점이었다. 성왕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신리 역시 진흥왕 시기에 이르러 국력을 강화해 과거 경주지역에만 머물던 왜소한 나라가 아니었다. 

551년 나제 동맹군은 북진을 감행했다. 이들은 고구려를 밀어내고 한강 유역을 탈환했다. 특히, 백제는 100년 가까이 갈 수 없었던 과거 수도 한성을 수복했다. 긴 비극의 역사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고토를  회복한 백제였지만, 한강유역은 그들의 땅이 될 수 없었다. 신라의 배신이 있었다. 

553년 신라는 비밀리에 고구려와 밀약을 체결했다. 고구려는 신라가 점령한 지역의 지배권을 인정했고 이후 상호 불가침 협정을 맺었다. 신라는 고구려의 북쪽 영토보다는 한강 유역의 지배권이 더 이익이라는 판단을 했다. 또한, 신라는 나제동맹군의 공격으로 한강 상류지역을 얻긴 했지만, 비옥하고 광활한 평야가 있는 한강 하류가 더 절실했다. 또한, 한강 하류지역의 장악은 중국으로 가는 교역로 확보 차원에서 매우 유용했다. 신라는 건국 이후 동쪽에 치우친 지리적 특성으로 중국과의 교류가 극히 제한됐다.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려 해도 백제 또는 고구려의 양해가 필요했다.

하지만 한강 하류를 장악한다면 독자적인 중국과의 교류가 가능했고 이는 중국의 선진 문물을 보다 쉽게 받아들이고 국가 발전의 전환점이 될 수 있었다. 신라 진흥왕으로서는 100년 넘게 지속한 나제동맹의 가치보다는 국인이 우선이었다. 신라는 고구려에 겨둔 칼날을 백제로 돌렸다. 신라의 배신과 공세에 백제는 어렵게 되찾은 한강 유역을 내주고 말았다.

물론, 이에 대해 다른 시각도 존재한다. 백제가 한강 하류지역의 경영을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백제는 한강 하류의 점령지에 행정적 군사적 조치를 하지 않았고 철군했다는 기록도 있다. 백제가 머뭇거리는 사이 한강 하류는 힘의 공백이 발생했고 신라가 그 공간을 차지했다. 신라가 한강 하류를 차지하고 그 지역을 그들의 영역으로 선포하는 과정에서 백제와의 강한 군사적 충돌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이 이를 방증하고 있다. 그런 부분이 있다 해도 동맹국인 신라가 그들의 영토를 협의 없이 차지하는 모습을 동맹의 파기라 할 수 있었다. 백제로서는 고구려와의 밀약을 체결한 신라를 동맹국으로 볼 수 없었다. 

백제로서는 신라와의 전쟁이 불가피해 보였다. 이런 상황에 백제 성왕은 자신의 공주와 신라 진흥왕과의 혼례를 추진했다. 이에 성왕의 공주는 진흥왕의 두 번째 부인이 됐다. 군사적 대결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성왕은 양국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일종의 기만술이었다. 

성왕은 그 이면에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강한 우호관계에 있는 왜를 끌어들여 연합군을 결성했고 신라와 대립하던 대가야도 그들 편으로 끌어들여 군사력을 확충했다. 이미 크게 강해진 신라와의 전쟁에 반대하던 귀족들에 대해서는 왕의 권한으로 이를 제압했다. 성왕은 강경론을 주도한 태자의 의견을 전폭 수용했다. 백제 태자기 이끄는 정예군과 왜, 대가야의 연합군은 지금의 충북 옥천군에 있던 신라 관산성을 공격해 함락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에 신라는 한강유역의 군사들을 남하시켜 대응했다. 그 중심에는 진흥왕 시절 병합한 금관가야의 왕족 출신 장군 김무력이 있었다. 그는 훗날 신라 삼국 통일의 영웅 김유신의 할아버지이기도 했다. 

김무력이 이끄는 신라군이 전투에 참여하면서 전쟁의 양상은 치열한 접전으로 변했다. 이런 전쟁 중에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태자를 응원하기 위해 전쟁에 출전한 백제 성왕이 신리군에 생포되 처형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기록에 의하면 성왕은 5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전쟁터로 향하다 매복 중인 신리군에 생포됐고 참수를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쟁 중인 와중에 왕이 소수의 병사들만으로 전장에 나섰다는 건 분명 무모한 일이었다. 백제의 부흥을 이끌었고 성군으로 칭송받던 성왕의 허무한 죽음이었다. 

그렇게 잘린 성왕 머리는 이후 신라의 궁궐에 계단 밑에 매장되는 수난을 당했다. 백제로서는 치욕적인 일이었고 군사들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 이에 전쟁의 양상은 신라의 일방적인 우세로 변했고 백제는 중요 대신들과 군사 대부분이 몰살되는 치명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로써 백제는 그 세력이 더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관산성 전투를 주도한 태자는 아버지에 이어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전쟁의 패배로 그 위신이 크게 떨어졌고 왕권의 약화로 이어졌다. 이후 백제는 무왕 때까지 패배의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큰 침체기에 빠져들었다. 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김무력의 집안은 가야 출신이라는 약점에도 신라에서 가문의 세력을 확고히 할 수 있었고 훗날 김유신이 신라의 영웅이 되는 기반이 됐다. 

 

신라 첨성대 



백제와의 전쟁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둔 신라는 한강 유역을 완전히 그들의 영토에 포함했고 나라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었다. 이후 신라는 진흥왕 시기 한강 유역을 물론이고 함경도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삼국 경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진흥왕 시기의 이런 승리의 역사는 신라가 삼국 통일을 하는 데 있어 중요한 발판이 됐다. 

이렇게 한강 유역을 둘러싼 고구려, 백제, 신라의 대결은 길고 치열한 싸움이 연속이었고 그 속에서 배신과 또 다른 배신, 첩보전이 뒤섞여 있었다. 이런 대결 속에서 영원한 우방도 적도 없는 냉혹한 국가 관계가 그대로 적용됐다. 고구려 세력이 강성하던 시절 맺어진 나제동맹은 상호 혼인이 이어질 정도로 굳건했지만, 국익 앞에 허물어졌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삼국 대결의 주도권을 잡자 영원히 원수지간이 될 것 같아던 고구려와 백제가 손을 잡고 신라를 압박했다.

이런 압박에 신라는 당나라와 동맹을 강화했고 그렇게 결성된 나당 연합군은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며 삼국 통일로 이어졌다. 신라는 삼국 중에서 가장 늦게 고대국가가 되고 발전이 늦었지만, 최후의 승자가 되는 반전의 주인공이 됐다. 결국, 한강유역을 차지한 것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한강 유역을 둘러싼 삼국의 대결은 단순히 영토를 차지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 대결의 흐름과 함께 그 안에 숨겨진 여러 이야기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큰 교훈이 되고 있다. 역사는 현재와 미래의 거울이라는 말을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사진 : 프로그램 / 지후니,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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