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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백제, 신라가 대립했던 고대 삼국시대는 치열한 전쟁의 역사였다. 삼국은 각각의 전성기에서 대결의 주도권을 잡았지만, 통일에는 이르지 못했다. 한 국가의 세력이 커지면 나머지 두 국가가 연합해 이를 견제하면서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연합과 배신이 혼재하는 냉혹한 국제 정세의 모습도 있었다.

이런 삼국의 대결은 대립을 정리하고 삼국을 통일해야 끝날 수밖에 없는 숙명이 있었다. 그 삼국 통일을 이룬 국가는 신라였다. 신라는 지리적 불리함으로 삼국 중 고대국가로의 발전이 가장 늦었고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데도 어려움이 있었다. 고대 국가의 중요한 요소인 왕권 강화, 불교, 율령 등 체제 정비 역시 가증 늦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차례로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그 세력이 밀려 어려움을 겪었고 낙동강 일원을 차지하고 있는 가야와 바다 건너 왜 역시 큰 위협이었다.

삼국 중 가장 뒤처진 신라였지만, 6세기 지증왕과 법흥왕 시대를 거치며 고대 국가로의 기틀을 마련했고 국가 시스템이 대외 확장의 계기를 마련했다. 진흥왕 시대에 와서는 가야를 병합해 낙동강 지역까지 세력을 넓히는 한편, 백제와의 연합으로 한강유역으로 진출했다. 이후 신라는 긴 세월 이어진 나제동맹을 파기하고 고구려와의 밀약을 통해 한강유역을 지배권을 확보했다. 신라는 한강유역을 놓고 벌인 대결에서 승리했고 백제 성왕을 전사시켰다. 성왕의 전사와 함께 백제는 그들의 나라를 세웠던 고토 한강유역을 다시는 차지할 수 없었다. 반대로 신라는 한강유역의 막대한 농업생산력과 함께 중국과의 원활한 교역으로 나리를 더 부강하게 만들었다.

 



이는 삼국 통일을 위한 중요한 기반이 됐다. 이후 신라는 고구려, 백제의 동시 압박을 받으며 국가적 위기를 겪었지만, 김유신, 김춘추라는 두 영웅이 등장하며 이를 극복했다. 오히려 신라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본격적인 통일 전정에 나섰다. 이를 위해 신라는 고구려와 강하게 대결하고 있던 중국의 통일 왕조 당나라와 손을 잡고 나당 연합을 결성했다. 대신 신라는 일종의 사대주의라 할 수 있는 대외적으로 친당정책을 노골화했다. 지증왕 이후 자주성을 상징하던 독자적 연호를 당나라 연호로 바꾸고 당나라의 제도를 수용했다. 삼국통일을 위한 조치였다. 대신 신라는 삼국 통일 후 대동강 이남의 한반도 지역의 지배권을 당나라에게서 인정받았다. 

이후 나당 연합군은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데 이어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며 삼국시대는 통일 신라시대로 이어지게 됐다. 신라는 강하게 압박하던 고구려와 백제는 계속되는 전쟁으로 국력이 쇠퇴했다. 고구려는 대외 정책에서 강경책을 따르는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나라의 실권을 잡고 대당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지만, 연개소문의 독재는 내부의 불만세력을 키우고 분열로 이어졌다. 연개소문이 세상을 떠난 후 남생, 남건, 남산 3형제가 그의 권한을 이어받았지만, 이들이 대립하면서 고구려의 국운은 급격히 기울었다. 장남 남생은 남건, 남산에 의해 실각한 이후 당나라로 투항해 당나라의 고구려 정벌의 선봉장에 서는 역사상 최악의 배신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의 공세를 막아내긴 어려웠다. 

백제는 한때 신라의 40여성을 빼앗으며 신라에 강하게 맞섰던 의자왕이 초심을 잃으면서 나라가 흔들렸고 나당 연합군의 공격에 대한 사전 대응이 미약했다. 뒤늦게 나당 연합군의 침공에 맞섰지만, 귀족들의 의자왕에 호응하지 않으면서 수도 사비성이 쉽게 함락되고 말았다. 의자왕은 웅진성에 반격을 모색했지만, 신하들의 배신으로 붙잡혀 항복하고 말았다. 이렇게 문화강국이라 불리던 백제는 허망하게 그 역사를 접었다. 

이렇게 고구려 백제는 차례대로 무너뜨린 신라였지만, 삼국 통일이 완성된 건 아니었다. 고구려, 백제 유민들의 부흥 운동이 강하게 일어났고 무엇보다 당나라가 딴마음을 품고 있었다. 백제가 멸망한 이후 661년 아버지 태종 무열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완성해야 하는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과정은 험난했다. 동아시아의 강국 고구려를 무너뜨린 당나라와의 전면전을 펼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신라는 당나라와의 밀약을 믿었지만, 당나라는 한반도 전체를 그들의 영역에 두려 했다. 

백제 멸망 후 당나라는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했고 항복한 백제의 왕 부여융을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에 더해 당나라는 신라 땅에도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여 문무왕을 책임자로 임명했다. 당나라는 신라는 자주 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들의 행정구역에 포함시키려는 의도를 분명히 했다. 신라로서는 그들의 멸망시킨 백제의 땅을 그들의 영역으로 포함시키지도 못했고 망한 백제의 왕자를 대등한 입장에서 예우해야 했다. 665년 당나라는 신라 문무왕과 백제 왕자 부여융을 지역의 도독으로 하여 상호 동맹의 맹약식 하도록 했다. 신라에는 분명 굴욕적인 일이었지만, 고구려와의 전쟁을 앞둔 시점에 거절할 수 없었다. 

이렇게 굴욕의 시간을 보낸 신라는 당나라를 상대로 한 본격적인 군사작전을 시작했다. 그 이전부터 신라는 옛 백제지역의 영토를 조금씩 잠식하면서 영토를 넓혀왔고 백제 유민들의 포용하며 백제지역에서 지배권을 공고히 하고 있었다. 당나라를 상대로 한 적극적인 외교전으로 신라의 주장을 관철하는 노력도 병행했다. 또한, 오랜 세월 신라와 대결 관계에 있었던 왜와도 외교적 소통을 하며 관계를 개선했다. 향후 당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한 일이었다. 당나라 역시 이를 알고 있었다. 당나라는 더 노골적으로 한반도 지역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려 했고 신라 사신을 통해 그들의 의도를 명확히 하는 문서를 보내기도 했다.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670년 신라는 고구려 유민들과 연합해 요동지역의 당나라 군을 공격했다. 나당 전쟁의 시작이었다. 신라는 공세적으로 작전으로 당나라의 시선을 요동으로 돌린 이후 백제 영토를 차지하며 당나라 군을 축출했다. 신라는 지금의 익산 지역에 고구려 유민들이 그들의 나라 보덕국을 세우는데 지원을 하면서 고구려 유민들과의 관계를 강화 하며 우군으로 삼았다. 고구려 유민들의 고구려 부흥을 위해 신라의 지원이 필요했고 신라는 한 명의 군사가 더 아쉬웠다. 

개전 초기 신라는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우위를 점했다. 신라군의 강한 저항에 당나라 군을 초반 밀렸다. 하지만 672년 석문 전투에서 신라의 주력군이 대패하면서 전세가 당나라 쪽으로 기울었다. 신라는 공세는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 시점에 신라군의 구심점이었던 김유신이 673년 세상을 떠났다. 국가적 위기였다. 이에 신라는 공세보다는 수성을 택했다. 신라는 당나라에 일종의 사죄단을 파견해 각종 진상품을 바치고 당나라의 선처를 구하는 식으로 당나라에 읍소를 하는 굴욕을 감수하는 등 저자세 외교로 당나라와의 전쟁을 피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전쟁 대비에 나섰다. 우선 여러 요충지에 성을 축조해 전력 거점을 확보하고 당나라의 남하를 막았다. 여기에 신라 내부의 친당 세력들을 숙청하며서 내부를 결속을 다졌다. 또한, 고구려, 백제 유민을 적극적으로 포용했다. 군사적으로는 당나라 군에 맞설 특화된 부대를 육성하고 무기를 개발했다. 특히, 당나라의 주력인 기마병에 대응할 무기 배치와 함께 맞춤형 전술을 만들어 대비했다. 

 

 신라 첨성대



신라는 이후 거듭된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전쟁의 승기를 잡았다. 675년 지금의 동두천 지역에서 벌어진 매소성 전투에서는 3만의 병력으로 20만의 당나라 군을 격파했고 서해바다 기벌포에서 당나라 해군과의 전투에서도 승리하며 당나라의 침약 의지를 꺾었다. 이후 크고 작은 전투에서 거듭 승리한 신라는 마침내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676년 7년여의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당나라는 거듭된 공격에 성과를 내지 못했고 그들에게 복속했던 돌궐과 거란족들이 세력을 규합해 당나라 변방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신라와의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웠다. 또한, 고구려 멸망 이후 20만 명의 고구려 유민들을 당나라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킬 만큼 경계했던 고구려를 계승하는 나라 발해의 건국도 세력 확장을 어렵게 했다. 이는 신라와의 전쟁을 단념하게 하는 이유였다. 신라는 나당 전쟁에서 승리한 문무왕 이후 성덕왕 때에 이르러 대동강 이남의 영토를 신라의 영역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나당연합 당시 약속이 뒤늦게 이행됐다고 할 수 있다.

문무왕은 뛰어난 리더십으로 신라를 단결시켰고 상황에 맞는 유연한 외교를 병행하며 삼국통일의 업적을 남겼다. 그는 죽어서도 바다에 묻혀 나라 사랑의 의지를 보여준 왕이기도 했다. 문무왕은 그의 아버지 김춘추, 외숙부 김유신이 품고 시작했던 삼국통일의 꿈을 완성했다. 

이렇게 삼국통일의 꿈을 이룬 신라지만, 그 평가는 엇갈린다. 특히, 비판적 입장에서는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상실했고 고구려 유민들 상당수가 포함되지 못한 삼국통일의 한계점을 지적하고 있다. 최근 역사 기록은 통일신라시대가 아닌 고구려를 계승해 요동지역을 수복한 발해가 포함된 남북국 시대라는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신라의 삼국통일은 통일 과정에서 당나라라는 외부 세력과 함께 했지만, 당나라와의 전쟁을 통해 그들의 침략 야욕을 이겨냈고 민족적 자부심을 지켜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는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일이기도 했다. 완벽하다 할 수 없지만, 민족을 하나로 묶었다는 건 분명한 일이다. 또한 신라는 국가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통일 전쟁의 원동력을 삼았다. 이를 통해 신라는 승자의 기록인 역사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신라는 살아남는 자가 진정한 승자임을 보여주었다 할 수 있다. 이점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은 여러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진 : 프로그램 / 지후니,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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