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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중부에 위치한 안양시는 관악산과 삼성산이 주변을 감싸는 분지 지형으로 도시에는 안양천을 포함한 하천이 흐른다. 마치 서울과 흡사한 지형의 안양은 북쪽으로는 서울 금천구와 관악구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시흥과 광명, 동쪽으로는 과천과 의왕, 남쪽으로는 군포, 안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또한, 일산, 분당과 함께 1기 신도시로 조성된 평촌 신도시가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안양의 지명은 고려 태조 왕건이 이곳에 안양사라는 사찰을 건립한 데서 유래됐다. 안양이 도시로서의 독자적 발전을 하게 된 건 1905년 경부선 철도가 놓이고 안양역이 생기면서부터다. 이후 철도역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고 도심이 형성됐고 안양은 지역의 이름으로 자리를 잡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안양시는 근현대사의 흐름과 함께 한 도시였다. 과 도시 기행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에서는 이 안양을 찾아 지역의 명소에 그 속에 담겨있는 이웃들의 이야기를 함께 했다. 

여정의 시작은 안양시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안양역이었다. 기차역의 분주함을 벗어나 주변을 따라 걸었다. 그 길을 따라 안양 중앙시장의 북적임 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만난 노점에서 추억을 가득 담아 내주는 떡볶이가 인상적이었다. 장년층들에게 노점의 떡볶이는 학창 시절 중요한 간식거리였다. 그 양이 많던 적던 친구들과 나눠먹는 떡볶이는 특별했다. 안양 중앙시장의 떡볶이는 과거의 향수를 느끼게 해주었다. 

활기찬 시장을 벗어난 여정은 고려 태조 왕건의 이야기와 함께 하는 안양의 대표적 사찰인 안양사를 지나 안양의 명소 안양예술공원으로 이어졌다. 맑고 시원한 계곡물이 청량감으로 다가오는 공원은 초록의 신록으로 채워져있었다. 그 신록 사이로 다양한 예술 작품들이 보였다. 공원을 예술작품의 공간으로 만든 이곳만의 독특함이 있었다.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은 물과 숲이 있는 자연과 함께 멋진 예술로 함께 즐길 수 있었다. 

 

 


공원의 산책로를 걷다 노년의 기타 연주자들을 만났다. 이들은 70살이 넘은 나이에도 음악적 열정을 버리지 않고 기타 실력을 키우고 여러 곳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고 했다. 코로나로 인해 공연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공원에서 버스킹을 하며 공연에 대한 갈증을 풀고 있었다. 비록, 많은 이들이 보는 공연은 아니지만, 그들의 흥겨운 연주는 지친 일상에 큰 활력소가 되고 있었다. 

공원에서 나와 안양의 역사 유적인 만안교를 잠시 찾았다. 조선 후기 부흥기를 이끌었던 임금 정조가 건립했다고 전해지는 만안교는 당시로는 서울과 연결되는 중요한 통로였다. 지금은 여러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교통로로서의 용도는 다했지만,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유산으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여정은 이웃들과의 본격적인 만남으로 이어졌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주택들로 이루어진 마을을 찾았다. 그 마을 길을 걷다 보니 이채로운 장면이 보였다. 집집마다 텃밭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텃밭은 집 앞은 물론이고 각 가정의 지붕에도 있었다. 각 가정의 텃밭은 마을 주민들이 함께 가꾸며 수확의 기쁨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 텃밭은 마을 주민들의 중요한 소통의 통로였고 마을의 풍경을 색다르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아파트가 중요한 주거 형태가 되면서 사라진 이웃 간의 정겨움이 이곳에는 있었다. 

그 마을 길을 걷다가 파라솔 아래에서 여유로운 일상을 즐기고 있는 노부부가 보였다. 그 노부부 역시 옥상에 그들만의 텃밭을 일구고 있었다. 이 부부가 자리한 파라솔 아래 공간은 그들만의 세상이 아닌 주민들과의 만남을 가지는 공간이었다. 부부는 집 앞을 지나는 주민들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부부는 아내의 투병 이후 서로에 대한 마음이 더 각별해졌다고 했다. 서로에 대한 이 마음은 삶을 더 여유롭게 바라보게 하고 열린 마음을 가지게 했다. 그 때문인지 파라솔 아래 그 부부의 공간은 의미 있게 보였다. 

마을을 벗어나 안양의 대표적인 하천인 안양천변을 걸었다. 안양천은 한강으로 흘러가는 중요한 하천이지만,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과정에서 크게 오염되어 한때 죽음의 하천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민관이 합심해 안양천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고 지금은 생태하천으로 새롭게 변신했다. 이제 안양천은 시민들의 중요한 휴식처로 자리했다. 그 안양천을 지키고 보호하려는 시민들의 노력을 볼 수 있었다. 과거 안양천 살리기에 동참하기 위해 조직된 시민들의 조직은 지금도 안양천변의 쓰레기를 수거하는 등 지킴이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연을 되살리는데 얼마나 큰 노력과 정성이 필요한지 알고 있었다. 그들의 노력으로 안양천은 생태하천으로 지켜지고 있었다. 

다시 안양의 한 동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동네에서 가정집을 개조한 식당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 식당은 쉽게 접할 수 없는 칡 수제비가 주메뉴였다. 칡가루로 반죽하는 수제비는 반죽을 하는 데 있어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수제비는 칡 특유의 향과 맛을 담고 있었다. 

이 수제비는 남다른 사연이 담겨 있었다. 이 식당은 과거 남편의 사업 실패 후 가정의 생계를 위해 시작했다. 종갓집 며느리였던 식당의 사장님은 식당을 시작하는 데 있어 어르신들의 불편하고 안타까운 시선을 애써 외면하고 꿋꿋하게 식당을 운영했다. 그 사이 실의에 빠져있던 남편도 식당 일을 적극 도왔고 이제는 가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가정의 경제는 다시 일어섰고 남편 역시 제2의 인생을 열어가고 있었다. 이 수제비 식당은 한 이 가정에 희망의 장소였다. 

가족이 함께 가업을 이어가는 곳을 또 만났다. 옛날 과자를 파는 가게였는데 이 가게는 쉼 없이 과자를 만들고 포장하느라 분주했다. 이 가게의 사장님은 기존의 사업을 정리하고 10여 년 전부터 이 가게를  시작했다고 했다. 다양한 과자들이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옛날 과자를 보기 힘든 세상이 됐지만, 이 가게의 과자는 찾는 이들이 꾸준했다. 연중무휴 쉬지 않고 일하면서 이 가게의 규모도 커지고 장년층에는 추억의 맛을 젊은 층에는 색다른 맛을 파는 가게로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들 내외가 가게를 이어받아 대를 이어가는 가게로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근면함과 성실함이 만들어낸 결과물인 이 가게는 오늘도 특별한 맛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었다. 

여정의 막바지 기차역 근처의 오래된 마을을 찾았다. 골목길을 걷다 북메우기라는 특이한 문패가 걸린 집이 보였다. 호기심에 들어간 집은 전통 북을 만드는 공방이었다. 우리 전통 음악의 악기로 사용되는 북을 만드는 이곳을 아버지에서 아들로 기술이 전해지며 공방의 역사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아버지는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아 몸이 불편하고 청각장애까지 있어 소리를 내야 하는 북을 만드는 데 있어 큰 어려움이 있었지만, 섬세한 손 감각을 통해 북의 울림을 잡아가며 북을 만들고 있었다. 소리를 듣는데 제약이 있지만, 그의 치열한 노력은 이를 극복하게 했다. 지금도 그는 장인으로서 치열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아들은 한때 유도 선수의 꿈을 키웠지만 불가피한 사정으로  그 꿈을 접고 아버지의 기술을 전수받아 가업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이곳에서는 전통 방식과 함께 시대 변화에 맞게 제조방식을 개선하는 등 변화도 모색 중이었다. 인생에 있어 시련의 시간을 보냈던 부자가 만드는 북은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안양에서의 여정은 과거와의 만남과 함께 옛스러움을 간직하고 지키는 이들과의 만남이었다. 수도권 도시로 급격한 변화를 겪었고 겪고 있는 안양이었지만, 그 안에는 우리가 잃어버리거나 잊고 있었던 모습들이 남아있었다. 그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의 소중함을 느끼게 하는 시간이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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