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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주요 인물들과 사건들을 입체적 살피고 있는 역사 예능 프로그램 벌거벗은 세계사 얼마 전 다른 인물은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이 있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1789년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의 격변기에 혼란스러운 프랑스의 상황을 정리하고 프랑스가 유럽의 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인물이었다. 한편에서는 그가 황제 자리에 올라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훼손하는 반동의 정치를 했고 유럽 전역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침략자라는 부정적 평가도 존재한다.

나폴레옹에 대한 평가는 프랑스 대혁명과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프랑스 대혁명은 국민들의 봉기로 봉건체제를 해체하고 새로운 체제를 들어서게 한 사건이었다. 혁명 당시 프랑스는 극 소수의 귀족과 성직자들의 나라의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 있었다. 그 사이 부의 불균형 속에 국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민, 일반 국민들의 삶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기초적인 생계마저 위협받는 상황에서 국민들의 집권층에 불만을 크게 고조되고 있었다.

이런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집권 세력은 해법을 내놓지 못했다. 오히려 소모적인 전쟁을 지속하는가 하면 국고가 바닥나자 가혹한 세금으로 국민들을 더 억압했다. 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하면서 재정 부담이 막대해졌다.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 독립전쟁에 큰 지원을 했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프랑스는 경제적으로 이악을 갖지 못했다. 미국의 독립에 큰 지원세력이었던 프랑스지만, 국민들의 삶을 더 궁핍하게 하는 아이러니에 빠지고 만 셈이었다. 

이런 국정의 난맥상과 함께 상공업의 발달로 부를 축적한 자본가들을 중심으로 한 시민계급이 성장했고 중요한 정치 세력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보다 폭넓은 자유를 원했고 귀족들이 주도하는 정치에 점차 반기를 들었다. 당연히 일반 평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런 시민계급과 일반 국민들의 반정부 성향이 극대 달하는 상황에서 원활한 국정 운영을 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조세에 대한 저항이 극심했다.  당장 나라의 국고를 채우는 일이 시급했다. 이에 프랑스의 왕 루이 16세는 유명무실했던 귀족, 성직자, 시민계급이 함께 하는 지금의 의회와 비슷한 삼부회를 소집했다.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초상화, 실제는 나귀를 타고 넘었다고 한다. 



하지만, 투표 방식에 대한 이견차로 원활한 진행이 불가능했다. 기득권 층은 각 계급에 한 표를 주는 방식을 선호했고 시민 계급은 회의 참가자 전원의 투표권 보장을 주장했다. 상대적으로 많은 수의 시민계급이 유리한 구도가 형성될 수 있었다. 당연히 귀족세력들은 이에 반대했다. 삼부회는 성과 없이 종료됐지만, 시민계급들의 중심으로 별도의 의회 설립을 시도가 일어났다.

절대다수의 국민들의 대표하는 의회 설립은 일반 대중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지만, 루이 16세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이 시도는 국민적인 저항을 불러왔다. 이미 한계점에 다다른 국민들은 1789년 7월 14일 억압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해 무장을 시작했고 무력 투쟁에 나섰다. 이 투쟁은 전국적인 혁명의 물결을 일으켰다. 무력으로 이를 제어하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힘이었고 프랑스 전역을 휩쓸었다. 이 혁명에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참여했고 그렇게 절대왕정과 귀족들이 중심이 된 봉건체제가 붕괴됐다. 루이 16세와 그의 왕비 앙리 앙투아네트를 포함에 다수의 귀족들이 역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오랜 세월 이어진 절대 왕정은 공화정으로 변화했고 인권의 가치를 담은 인권선언이 발표되기도 했다. 권력의 중심도 세습체제를 유지하던 귀족들에게서 자본가 계급을 중심으로 변화했다. 성인 남성들에 국한된 한계점이 있었지만, 일반 국민들도 자유롭게 투표에 참여해 정권을 결정할 수 있는 보통선거제가 도입됐다. 

단기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의 여파는 엄청났다. 그 부작용도 뒤따랐다. 프랑스는 상당 기간 혼란기를 겪었다. 정치는 각 이념과 사상, 구체제제 대한 대응 등을 놓고 파벌별로 크게 대립했다. 초기 온건파 세력이 국정을 주도했지만, 이후 급진 개혁 세력이 집권하면서 피의 숙청이 단행되기도 했고 그 세력이 다시 실각하면서 또 다른 숙청이 단행되는 등 혼동의 정치가 계속됐다. 시민들의 주도하는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이 퍼지는 것을 경계한 여타 유럽의 왕정 국가들은 프랑스 혁명 정부를 강하게 경계했고 힘으로 억압하려 했다. 전쟁이 불가피했다. 여기에 내부에서 여전히 그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왕정 복귀를 노리는 왕당파, 반혁명 세력들의 반란도 만만치 않았다. 

이를 위해서는 강한 군대가  필수적이었지만, 귀족들이 대부분인 프랑스 군대의 장교들은 혁명 정부를 등졌고 군대 조직도 엉성했다. 안팎의 무력 대결을 이겨내기 힘든 상황에서 젊은 장교 나폴레옹이 등장했다. 그는 프랑스 본토와 떨어진 코르시카섬의 하급 귀족 출신이었다. 코르시카 섬은 이탈리아의 영토였지만, 프랑스로 귀속됐다. 귀족의 지위가 있었다고 하지만, 나폴레옹의 가문은 주류 지도층이 아니었다. 이런 배경은 구체제를 몰락시킨 프랑스 대혁명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이유가 될 수 있다.

16세의 나이에 소위로 임관한 나폴레옹은 격변의 시대 흐름 속에 혁명정부 군대에서 장교로 복무하며 공훈을 쌓았고 24살의 나이에 장군 자리에 올랐다. 군 지도부와 장교들이 대거 이탈하면서 생긴 공백이 그에게는 기회가 됐다. 포병장교였던 그는 실전에서 포병을 적극 활용하는 전술과 함께 진보적인 전략과 전술로 프랑스군을 강군으로 만들었다. 군사 전략가로서 나폴레옹은 지금도 크게 인정받고 있다. 장군 나폴레옹은 왕당파의 반란과 대외 전쟁에서 활약하며 대중적인 인기까지 더해졌다. 대. 내외적으로 흔들리던 프랑스의 공화정은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나폴레옹은 전쟁 영웅으로 군인이 아닌 정치인으로의 입지도 넓혀나갔다. 나폴레옹의 명성은 이탈리아 원정의 승리로 절정에 달했다. 

이런 나폴레옹의 대중적 인기는 내부 정치 세력에게도 위협으로 다가왔다. 당시 프랑스의 정권은 정적으로 떠오른 그에게 이집트 원정을 명령했다. 그와 대중들의 거리를 멀게 하려는 의도였다. 바다의 재해권을 적국인 영국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도 대규모 선단을 구성해야 하는 이집트 원정은 큰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나폴레옹은 그 위험을 이겨내고 이집트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그가 이끌고 간 해군이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에 궤멸되면서 나폴레옹은 고립될 위기에 놓였다. 그의 성공 스토리가 끝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정부의 지시도 없이 몰래 프랑스로 귀국했다. 사실상의 항명이었다. 

나폴레옹은 이에 그치지 않고 1799년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통령 정부를 출범시켰다. 그의 대중적 인기와 혼란한 정치 상황을 나폴레옹은 놓치지 않았다. 통령 정부 체제가 들어섰고 나폴레옹은 1통령으로 권력 전반을 장악했다. 그의 나이 30세 때였다. 시골의 섬 코르시카 출신의 장교가 프랑스 권력의 1인자로 올라선 순간이었다. 최초 임기제였던 통령의 자리는 이후 종신제로 바뀌었고 그는 영구 집권의 길을 열었다. 

나폴레옹은 강해진 권한을 바탕으로 내부 개혁과 외부의 위협에 대처하며 프랑스를 강국으로 올려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다. 1인자에 권력이 집중된 독재체제였지만, 내부의 혼란을 수습하고 외국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프랑스 국민들은 나폴레옹에 큰 지지를 보냈다. 성과도 있었다.

 

나폴레옹의 대관식



나폴레옹은 조세 제도를 개혁해 국가 재정을 확충하는 한편 상공업의 진흥에도 성과를 냈다. 교육제도가 정비되고 법과 제도를 정비했다. 1804년 반포된 나폴레옹 법전인 프랑스 민법전은 기존의 봉건체제하의 법과 관습법을 총망라하고 근대적인 시대정신을 반영한 결과물이었다. 프랑스 민법전은 만민의 법앞에서의 평등, 종교의 자유, 경제활동의 자유 등 근대적인 요소를 두루 담고 있어 오늘날 근대법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이 외에도 교통망과 국가 시스템 전반을 개혁하고 발전시켰다. 이에 프랑스 수도 파리는 현대적인 도시로 변모했다.

또한, 나폴레옹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관계가 소원해진 가톨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등 내치의 성과와 함께 나폴레옹은 대외 전쟁에서도 연전연승을 거듭했다. 특히 알프스산맥을 넘는 기상천외한 전술을 펼친 마렝고 전투는 그를 영웅으로 만든 대표적 승전이었다. 험준한 알프스산맥을 대군이 넘어서는 일은 
고대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공격한 이후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참모도 이를 만류했다. 나폴레옹은 내 사전에 불가능이 없다는 말로 군을 독려하며 강행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나폴레옹은 대 프랑스 연합군에 큰 타격을 입혔고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했다.

이후 프랑스는 매 전쟁에서 승리하며 그 세력을 넓혀나갔다. 프랑스의 강력한 군대를 이겨낼 나라는 유럽에 없었다. 영국만이 강력한 해군력으로 버텨낼 뿐이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 이후 혼란한 나라를 안정시키는 한편 전 유럽에 힘을 떨치는 나라로 만들었다. 대중적인 인기가 높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절정의 치세는 그 이면에 검은 그림자를 함께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는 종신 통령이 되고 반대파에 대한 강력한 탄압으로 독재자의 길을 걸었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고 언론을 장악하며 대중들의 눈과 귀를 멀게 했다. 이는 자유, 평등, 박애의 프랑스 혁명의 정신과 배치되는 일이었다.

대외 정책에서도 나폴레옹은 인종차별적이고 백인 우월주의의 면모를 보였다. 대표적으로 카리브해의 섬 아이티 침공이 중요한 예라 할 수 있다. 아이티는 환금성이 큰 작물을 원주민들과 흑인 노예들의 값싼 노동력으로 재배하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미국에 인접한 아이티는 미국의 독립 전쟁과 프랑스 대혁명을 영향을 받으면서 흑인 노예들의 봉기가 일어났고 1794년 노예제를 폐지했다. 이 여세를 몰아 아이티는 인구의 절대 다수인 흑인들의 뜻에 따라 1801년 독립은 선언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식민지 재탈환과 노예제 부활을 위해 수만의 군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아이티인들의 강력한 저항과 영국의 해상 방해로 아이티에서 물러나야 했다. 모든 사람의 인권 존중이라는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고려하면 나폴레옹의 조치는 전형적인 내로남불이었다. 나폴레옹은 유색인종에 대한 혐오를 나타내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의 정신은 백인들에게만 적용되는 일이었다.

나폴레옹은 명분 없는 싸움에서 패하며 명성에 금이 갔다. 여기에 나폴레옹은 계속된 전쟁으로 군비 부담이 커지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미국의 자국 영토인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매각하는 결정을 했다. 당시 류이지애나는 미국 중부지방 전역에 걸쳐있는 방대한 영토였다. 프랑스는 그 땅을 낮은 가격에 미국에 매각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그 영향력이 상실됐다. 루이지애나를 차지한 미국인 그 영토가 급격히 늘었고 서부 개척 시대를 열 수 있었다. 

이런 대외정책 실패에도 프랑스에서 그의 지지세는 여전히 강력했다. 나폴레옹은 이를 발판 삼아 그 높은 권위를 차지하려 했고 이는 그 스스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일로 발전했다. 1804년 나폴레옹은 성대한 대관식과 함께 프랑스 최초의 제정 시대를 열었다. 이 대관식에서 나폴레옹은 그의 왕관을 스스로 머리에 쓰는 퍼포먼스로 그의 권위를 한껏 드높였다. 절대 왕정을 폐하고 국민들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일어났던 프랑스 혁명은 10여 년 만에 절대 권력자의 등장으로 그 의미가 크게 퇴색되고 말았다. 프랑스 국민들은 혼란스로운 정국을 안정시키고 대외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어낸 나폴레옹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다. 국민투표에서 국민들은 압도적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는 그의 추락을 가속화했다. 그는 더 이상 프랑스 대혁명의 수호자가 아니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유럽 전역으로 퍼진 혁명의 정신은 큰 지지를 얻었다. 나폴레옹의 중요한 상징이었고 혁명을 지지하는 식자층들에도 나폴레옹은 추앙의 대상이었다. 이런 나폴레옹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실망감이 커졌다. 대표적으로 나폴레옹을 찬양하는 의미의 교향곡을 작곡했던 당대 최고의 작곡가 베토벤은 그 교향곡의 악보를 찢으며 실망감을 드러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 시대 전투 장면 재현



황제 나폴레옹은 전제 군주의 모습이었다. 그는 왕위 계승이라는 목표를 위해 무리한 이혼과 정략결혼을 하는가 하면 유렵 각국의 국왕에 자신들의 형제들을 임명해 지배권 강화를 시도했다. 이는 해당 국가 국민들의 의사에 반하는 일로 강한 반감을 불러왔다. 나폴레옹은 힘으로 불만을 잠재우며 유렵 전역에 세를 과시했다. 유럽의 지배자가 된 나폴레옹이지만, 그 원천은 강력한 힘이었다. 자발적인 지지를 이끌어낸 권위가 아니었다. 감당할 수 없는 부메랑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유럽의 대부분을 영향력 아래 둔 나폴레옹이었지만, 단 한나라 영국은 달랐다. 나폴레옹은 영국 정벌을 수차례 시도했지만, 해전에서 밀리며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과거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친 영국 해군은 여전히 강력했다. 영국은 미국을 잃었지만, 세계 도처에 식민지가 있었고 산업혁명의 선도 국가로 상공업이 발달한 선진 국가였다. 유렵의 경제에서 영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다. 

이런 영국을 지배하지 못한다면 나폴레옹의 유럽 장악은 한계를 보일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대륙 봉쇄령으로 영국을 고립시키려 했다. 하지만 영국에서 생산하는 물자들에 의존하는 유럽 각국의 물가 상승이나 국민들의 생활 불편 가중되는 역효과가 나타났다. 유럽 국가들은 하나 둘 대륙봉쇄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중 대표적 국가는 러시아였다. 나폴레옹은 이런 러시아의 응징을 위해 대규모 원정 공격을 단행했다. 

1812년 나폴레옹은 수십만의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로 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 러시아 원정이 그의 급격한 몰락을 가져올 것이라는 상상을 그는 하지 못했다. 러시아 원정은 그 거리가 매우 길었다. 러시아는 전쟁을 회피했고 프랑스군은 러시아 영토 깊숙이 진격했다. 프랑스는 그들 군대의 기세에 러시아가 쉽게 굴복할 거라 예상했지만, 러시아의 저항은 끈질겼다. 그 사이 원정은 길어졌고 프랑스군은 보급에 큰 어려움이 생겼다. 다른 곳보다 빨리 찾아온 겨울과 강추위는 프랑스군에 더 큰 위협이었다. 러시아는 프랑스가 점령지를 스스로 초토화하는 작전으로 프랑스군을 더 힘들게 했다. 프랑스가 점령한 모스크바에서도 대규모 방화로 자체적인 보급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결국, 프랑스군은 겨울 철수는 단행했지만, 긴 원정에 지친 프랑스 군의 퇴각은 쉽지 않았다. 대비하지 못한 겨울은 그들에게 매우 혹독했고 동사자가 속출했다. 사기가 급격히 떨어진 프랑스군을 행한 러시아군의 반격도 매서웠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궤멸적 피해를 입었다. 프랑스의 정예 60만 대군 중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다. 나폴레옹의 중요한 권력 기반이 사라진 셈이었다. 이에 더해 나폴레옹이 자신의 형을 왕으로 임명하는 등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있던 스페인도 강력한 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하면서 나폴레옹의 위상은 더 추락했다. 

이에 나폴레옹에 억눌려 있었던 유럽 각국은 대 프랑스 동맹을 다시 결성했고 프랑스를 압박했다. 주력 군대를 잃은 나폴레옹은 이를 막아낼 수 없었다. 연합군은 파리로 진격했고 나폴레옹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나폴레옹은 지중해의 섬 엘바섬에 유배됐다. 프랑스는 패전국으로 전락했고 혁명으로 쫓겨났던 부르봉 왕조가 다시 복귀했다. 프랑스 영향으로 왕정이 폐지됐던 유럽 나라들도 왕정 복구가 이루어졌다. 왕정의 복구는 그 체제의 부활이었고 혁명을 통해 광범위하게 일반 국민들 속에 자리한 자유와 인권, 평등 등 민주주의 사상을 억압하는 일이었다. 당연히 국민적 저항이 뒤따랐다. 

이런 상항은 나폴레옹에게 재기의 기회가 됐다. 나폴레옹은 유배지인 엘바섬을 탈출해 파리로 복귀했다. 그의 복귀는 국민들의 열광적인 지지 속에 가능했다. 나폴레옹은 기존의 전제 군주적인 통치 방식에서 벗어나 자유주의적인 헌법에 합의하는 등 반대파와의 협력을 통해 내치의 변화를 시도했다. 아울러 대외 관계에 있어서도 유럽 각국과의 강화협정을 추진했다.

 

나폴레옹의 무덤



하지만 나폴레옹의 시대에 큰 어려움을 겪었던 그들이 이에 응할 리 만무했다. 전쟁은 불가피했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대 프랑스 연합군과 대결했지만, 얼마 안가 패하고 말았다. 1815년 6월 영국과 프로이센 연합군과의 대결이었던 워털루 전투의 패전은 나폴레옹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사건이었다. 나폴레옹은 복위 하 100일도 채 버티지 못하고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영국령의 대서양 섬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유배됐다. 폐위된 군주 나폴레옹은 그곳에서 인격적인 수모를 감수하며 살아야 했고 행동반경이 극히 제한된 연금 상태에 있었다. 나폴레옹은 방대한 분량의 자서전을 만들고 영어와 체스 등으로 소일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1821년 나폴레옹은  유배지에서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했다. 그는 지병이 있었지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추후 그의 모발에서 다량의 비소가 발견되면서 독살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프랑스와 유럽 전역을 호령하던 영웅의 쓸쓸한 최후였다. 그의 유해는 1840년이 돼서야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사이 프랑스는 구체제로 돌아가려는 기존 기득권 세력들과 혁명의 정신을 이어가려는 국민들 사이의 치열한 싸움이 이어졌고 또 다른 큰 희생이 있었다. 그 속에서 프랑스의 민주주의는 계속 발전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대혁명과 민주 공화정으로 발전 사이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혁명의 정신을 크게 훼손하는 전제 군주정을 실시하는 등 역사의 발전을 되돌리는 일을 했지만, 프랑스가 근대 국가로 발전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한건 분명하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국민들의 지지로 얻은 권력을 사적으로 남용하고 무리한 침략 전쟁으로 유럽을 전쟁의 위험 속에 빠뜨렸다. 자신의 친척들을 유럽 각국의 왕으로 임명하며 시대착오적인 제국을 건설하려 했다. 일종의 언론 조작을 통해 사실을 왜곡하고 자신을 신격화하는 모습도 있었다. 또한,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영웅이기도 했지만, 그의 실패로 프랑스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또한, 인종차별적인 가치관은 현대와 와서 비판이 대상이 되고 있다. 실제 최근 프랑스는 그의 추모식에서 대통령이 과거 아이티 침공에 대해 사과하고 잘못을 인정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독재 권력은 아무리 선한 목적을 가진다 민주주의가 보편적인 가치가 된 상황에서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대중들을 억압하고 각종 무리한 방법으로 사실을 왜곡 조작하는 등의 방법을 동원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심지어 내부의 불만을 돌리고 위해 무리한 침략 전쟁을 하기도 했다. 그에 따른 피해는 고스란히 일반 국민들에게 전가됐다. 우리 역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나폴레옹 역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그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비 민주적인 통치 방식을 사용했고 침략 전쟁을 감행했다. 그에 대한 평가가 갈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대격변의 시대가 만든 인물이었다. 그의 영웅적인 모습은 찬사를 보낼만하지만, 사람들은 그 모습만을 그동아 봐왔다. 이제는 좀 더 그의 삶을 입체적으로 살피고 그 안에서 역사의 또 다른 교훈을 얻어야 한다.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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