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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322회] 삼국지 촉한의 마지막 등불, 뛰어난 지략가이자 행정가 제갈량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1. 8. 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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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중요한 고전 삼국지연의 후반부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은 제갈공명 제갈량이다. 그는 유비가 익주, 지금의 쓰찬 지역을 장악하며 촉한을 건국하는 데 있어 책사로서 큰 역할을 했고 유비 사후 국정의 전반을 책임지는 승상으로 국가 운영의 전반을 책임졌다. 승장 제갈공명은 뛰어난 지략가였고 국가 운영에 있어서도 큰 역량을 발휘했다. 그에 대해 정사 삼국지와 소설 삼국지연의는 대부분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그만큼 촉한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고 그의 존재로 위촉오 삼국 중 가장 약한 국력에도 촉한은 나라를 보존하고 경쟁할 수 있었다.  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제갈량을 보다 입체적으로 살펴봤다. 

제갈량은 삼국이 세력 대결을 펼치던 격전장인 형주 지역의 인물이었다. 형주 지역은 사통팔달의 요충지로 삼국 모두에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에 화북 지역을 장악한 조조는 형주 지역을 장악하고 그 여세를 몰아 손권과 유비의 세력까지 완전히 장악하려 했지만, 손권, 유비 연합군과 대결한 적벽 대전에서 패하며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형주는 유비의 세력에 있었지만, 조조와 비밀 동맹을 체결한 손권이 형주 지역을 다시 차지했고 그 과정에서 이 형주 지역을 담당하던 관우가 전사하는 일이 있었다.

이는 조조와의 한중 대결에서 승리하고 익주 지역을 장악한 유비에서 큰 충격이었다. 유비는 조조 사후 그의 아들 조비가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를 겁박해 선위를 받고 위나라는 건국하자 221년 촉한을 건국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나라의 기틀을 세운 유비는 관우에 대한 복수를 위해 오나라 정벌을 위한 대군을 일으켰다. 북쪽 위나라의 위협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반대 의견이 많았지만, 유비는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유비의 오나라 원정을 대실패였다. 이릉대전이라 불리는 오나라와의 전면전에서 촉한의 군대는 궤멸됐고 유비는 형주와 경계를 이루는 백제성으로 후퇴했다. 그 과정에서 그의 또 다른 동생 장비도 부하들에 살해당했다. 패전과 형제들의 사망이라는 충격에 유비는 큰 병을 얻었고 223년 백제성에서 세상을 떠났다. 

 



2년여의 짧은 제위 기간 후 유비는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제위를 이어받은 아들 유선의 제왕으로서의 역량이 크게 부족함을 걱정했다. 실제 역사서와 소설에서 유선은 무능한 왕으로 남아있다. 유비는 승상 제갈량에게 제위에 올라 나라를 이끌어가길 유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갈량은 유비와 그의 아들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았다. 배신이 이어지는 삼국지의 이야기 속에서 제갈량은 죽은 순간까지 충성과 의리를 버리지 않았다. 유비 사후 제갈량은 충분히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지만, 권력을 탐하지 않고 승상으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했다. 

이를 두고 제갈량의 중요한 지역적 학문적 배경이었던 형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형주학파의 특성과 연결하기도 한다. 형주학파는 유학을 근본으로 하면서 원리 원칙과 엄격한 법 집행을 중요시했다. 제갈량 역시 그 영향을 받았다 할 수 있다. 제갈량은 한 왕실의 부흥이라는 중요한 목표가 있었다. 후한 황실의 후예인 유비는 그런 제갈량의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유비는 제갈량을 얻기 위해 세 번이나 그를 직접 찾아가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지금도 필요한 인물을 얻기 위한 노력을 뜻하는 삼고초려라는 말의 유래도 여기에서 나온다. 제갈량과 유비는 같은 정치적 목적과 사상, 지향점을 가진 끈끈한 관계였다. 제갈량이 유비와 그의 황실에 무한 충성을 보인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하지만 유비 사후 촉한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 몰려있었다. 나라의 역량을 모두 결집한 이릉대전의 패전으로 촉한은 큰 손실을 입었다. 황제의 죽음으로 중요한 구심점도 사라졌다. 신생국으로 국가 시스템도 불안정했고 지역의 호족들과의 관계로 완벽히 자리를 잡지 못했다. 형주 지역 상실로 서쪽에 치우친 지리적 한계를 극복할 외부 확장의 길도 막혔다. 이대로라면 촉한은 그대로 고사할 수 있었다. 

국정 운영의 실권을 가지고 있는 제갈량으로서는 위기 탈출의 해법이 필요했다. 제갈량은 우선 내치를 단단히 했다. 국가운영의 시스템을 정비했다. 법과 제도 정비를 했고 익주 지역의 토착세력들은 중앙에 기용했다. 이를 통해 나라의 역량을 하나로 모았다. 그들보다 국력이 우위에 있는 위나라와 오나라와 대결을 위해 내부 결속이 중요했다. 이에 더해 제갈량은 재정 확충에도 힘썼다. 이를 위한 중요한 수단은 잠업의 진흥과 이를 통해 생산한 비단이었다. 촉의 비단은 중국에서 그 품질을 인정받았다. 적국인 위나라에서도 촉의 비단은 큰 인기를 끌었다. 촉의 특산물인 비단은 나라의 재정을 확충하는 한편 향후 전쟁을 대비할 수 있도록 했다. 

내치를 강화한 제갈량은 형주 지역의 패권을 놓고 경쟁했던 오나라와의 동맹을 다시 강화했다. 오나라는 촉한의 중요한 장수 관우와 장비의 죽음과 연관이 있는 원수의 나라였지만, 더 강력한 적인 위나라와의 대결을 위해 두 나라는 힘을 합쳐야 했다. 오나라 역시 위나라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촉한이 필요했다. 제갈량의 과거의 원한보다는 국익이 우선이었다. 이를 통해 촉한은 외부의 위협 하나라는 제거했다. 

오나라와의 관계를 회복한 제갈량은 촉한의 남쪽 지역인 남만 지역 정벌에 나섰다. 베트남과 가까은 남만 지역은 지금의 중국 운난성으로 추정된다. 당시에 이 지역은 중국의 세력이 강하게 미치지 못하는 미지의 지역이었다. 제갈량은 남만 원정을 통해 지역 토착세력을 장악하고 영토를 확장했다. 이 지역은 향후 위와의 전쟁에 있어 중요한 물적, 인적 보급선 역할을 했다. 더 나아가서는 중국의 영역을 넓히는 의미도 있었다. 

 

픽사 베이 이미지



이렇게 5년여의 사전 작업을 거친 제갈량은 오랜 숙원이었던 북벌을 단행했다. 이는 화북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위나라와의 전쟁을 의미했다. 국력 면에서 촉한은 위나라에 열세였지만, 제갈량을 중심으로 군사력을 강화한 촉한은 나라의 역량을 모아 위나라 공략에 나섰다. 어떻게 보면 무모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제갈량은 한나라 황실의 부활이라는 명분을 이루기를 원했다. 이는 그가 촉한의 황실에 충성을 다하는 중요한 이유였다. 제갈량의 북벌은 228년 1차 북벌을 시작으로 234년 5차 북벌까지 계속된 실패를 이겨내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그가 1차 북벌을 시작하기 앞세 촉한의 황제 유선에게 남긴 출사표의 글에는 그의 한나라 황실 부활에 대한 의지와 전쟁에 임하는 자세, 촉한에 대한 충성심이 가득 담겨있다. 이는 제갈량의 인품과 사람됨을 나타내는 기록이기도 했다. 

하지만 애초 국력의 차이가 컸고 위나라는 강했다. 일부 성과도 있었지만, 큰 틀의 변화를 가져오기는 무리가 있었다. 제갈량의 의지로만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내긴 어려웠다. 결과가 정해진 싸움일 수 있는 북벌을 제갈량을 멈추지 않았다. 제갈량은 그 전쟁을 진두지휘했다. 전쟁 과정에서도 제갈량은 원칙주의자의 면모를 보였다 1차 북벌 전쟁 당시 그가 아끼던 장수 마속이 강을 따라 군영을 설치하라는 명을 어기고 산에 군영을 설치했다. 위나라 군은 마속의 군대를 포위해 공략했고 마속은 큰 패배를 당했다. 산중에 설치한 군영은 보급에 어려움이 있었고 식수 확보에 애를 먹었다. 위나라 군은 그 문제점은 간파했다. 마속의 대패는 1차 북벌의 실패를 불러왔다 

제갈량은 패장 마속의 처분에 고심했다. 마속은 그가 아끼는 장수이자 미래 촉한의 군대를 이끌어가야 하는 장수이기도 했다. 제갈량은 고심 끝에 눈물을 흘리며 패전의 책임을 물어 그를 참수했다. 읍참마속이라는 고사의 중요한 배경이었다. 제갈량은 그 누구에게도 특혜를 주지 않았고 공평한 신상필벌을 했다. 읍참마속의 고사는 그런 제갈량의 모습을 상징했다. 제갈량은 이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에게도 패전의 책임을 물어 직급을 낮추는 징계를 하기도 했다. 이런 제갈량의 행동은 나라의 관리들과 국민들이 그를 신뢰하고 따르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었다. 

계속되는 전쟁의 와중에도 제갈량은 국정에 소홀함이 없었다. 그는 국가 운영과 관련한 대부분의 일에 관여하는 지독한 워크홀릭이었다. 당연히 과로가 뒤따랐고 그의 몸은 쇠약해졌다. 결국, 제갈량은 5차 북벌을 단행하는 시점에 중요 전장인 오장원에서 그 생을 마무리했다. 계속된 과로에 따른 스트레스,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지병의 악화가 그 원인이었다. 어쩌면 그의 의지대로 북벌이 이루어지지 않는 답답한 현실이 그에게 큰 상실감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다. 

촉한의 지속적인 공세에 위나라는 초기 맞대응했지만, 이후 수성전으로 전략을 변경했고 전쟁은 기약 없는 장기전으로 진행됐다. 공격하는 입장인 촉한으로서는 결코 원하는 흐름이 아니었다. 보급의 문제가 촉한의 전쟁 수행의 큰 걸림돌이었다. 제갈량은 안정적인 군수물자 보급을 위해 목우유마라는 동물 모양의 수레를 고안하기도 했다. 오나라를 설득해 연합 공격을 단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연합작전을 위해 출병한 오나라 군에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그 작전은 실현되지 못했다. 

또한, 위나라에는 제갈량과 비견되는 책사 사마의가 있었다. 그는 촉한과의 전쟁에서 위나라 군대를 이끌며 촉한의 공세를 번번이 막아냈다. 사마의 역시 뛰어난 지략가였고 위나라의 중요 전략이 수성전을 이끌었다. 제갈량은 그를 전쟁터로 이끌어 내기 위해 굴욕적인 서찰과 선물을 보내는 등의 방법으로 자극하는 등 심리전을 전개하기도 했지만, 사마의는 제갈량의 수를 읽고 대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갈량의 사신을 통해 제갈량의 건강에 이상이 있음을 파악하기도 했다. 두 지략가의 대결은 제갈량의 죽음으로 사마의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제갈량은 자신의 죽음 이후 상황을 대비해 사마의의 공세에 대비한 전략을 미리 수립하고 유언을 남겼다. 실제 제갈량이 사망하고 촉한의 군대로 철수를 단행하자 사마의는 이를 추격했다. 촉한군은 미리 제갈량의 형상을 한 인형과 수레를 만들어 사마의를 속였다. 이에 놀란 사마의는 급히 후퇴했다. 죽은 공명이 산 사마의를 이겼다는 고사는 이 일화에서 유래됐다.

마지막까지 위나라에 대한 공세를 멈추지 않았던 제갈량의 죽음은 촉한에 큰 손실이었다. 촉한을 건국했던 1세대 인물인 유비, 관우, 장비에 제갈량까지 세상을 떠나나면서 국정의 중요한 컨트롤 타워가 사라졌다. 나라를 하나로 결속시킬 인물들의 부재는 큰 악재였다.  황제 유선은 무능했고 주변의 측근들의 지략은 제갈량에 미치지 못했다. 제갈량이 후계자로 여긴 강유라는 출중한 인물이 있었지만, 그의 힘만으로 촉한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는 무리였다. 제갈량 사후 촉한의 세는 축소됐고 삼국의 가지고 있는 영역을 지키기도 버거웠다. 

그 사이 제갈량의 대결에서 승리한 위나라의 지략가 사마의는 나날이 그 세력이 커졌고 249년 정변을 통해 위나라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의 아들 사마소는 263년 촉한을 공격에 촉한을 멸망시켰다. 265년에는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이 위나라를 무너뜨리고 서진이라는 나라를 새롭게 세웠다. 이후 서진은 280년 오나라마저 멸망시키며 분열된 중국을 나라로 통일했다. 삼국시대의 문을 열었던 유비, 조조, 손권 모두 삼국통일의 꿈을 이루지 못했고 그의 자손들도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마지막 승자는 사마씨였다. 장대한 삼국지의 스토리 결말은 이렇게 허무했다.

 

픽사 베이 이미지 



그렇게 중국을 통일한 서진은 얼마 안 가 황제의 실정과 이민족의 침략으로 멸망의 길을 걸었다. 이후 중국은 5호 16국, 위 진 남북조의 수백 년에 걸친 긴 분열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중국의 통일은 이후 수나라와 당나라에 이르러 가능했다. 이 시기에도 나라 간 흥망성쇠가 일어나고 치열한 대결이 이어졌지만, 삼국지만큼의 서사를 만들지는 못했다. 기간은 오히려 더 짧았지만, 삼국지의 배경이 된 시기는 소설 삼국지연의 상상이 더해지며 중국인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시기로 자리를 잡았다. 삼국지는 중국을 넘어 여러 나라에서도 사랑받는 고전이 됐다. 실제 역사와 소설은 그 내용에 큰 차이가 있지만, 여러 영웅들이 등장하고 사라지는 대서사는 매우 세밀하고 인생의 희로애락이 가득 담겨있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삼국지에 더 열광할 수도 있다. 

그 삼국지에서 제갈량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신념과 원칙을 굽히지 않았단 충의와 의지의 인물이었다. 그는 촉한에서 충분히 일인자가 될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의 선을 넘지 않고 촉한에 충성했다. 비록 이루지 못할 일이었을지 모르지만, 한나라 황실의 부활이라는 꿈을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또한, 제갈량은 승상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가 승상에 오를 때와 세상을 떠날 때 그의 재산은 변동이 없었다. 이는 그에 대한 세상의 평가를 더 드높이는 일이었다.

제갈량은 역사적으로 실패한 지략가였다. 무리한 북벌 추진이 촉한의 멸망을 불러왔다는 의견도 많다. 하지만 촉한의 지리적 불리함으로 나라의 발전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수성은 가능하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중국, 정치 경제의 중심지인 화북지역을 장악한 위나라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큰 국력 차는 더 월등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 자리에 머문다면 종국에는 나라가 위나라에 복속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제갈량은 한나라의 부흥이라는 명분과 함께 나라의 미래를 열어가는 차원에서도 북벌을 추진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 결과는 그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 않았다. 결국 제갈량은 그 꿈을 이루지 못했고 촉한도 멸망했지만, 그의 명성은 사후 더 높아졌고 지금도 중국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지략가이자 행정가, 국정의 운영자로 남아있다. 그의 변함없는 노력과 의지가 만든 일일지도 모른다. 그의 공과를 떠나 제갈량은 삼국지의 이야기를 빛내는 인물이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제갈량의 이야기는 여러 가지 교훈을 전해주고 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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