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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324회] 제2차 세계대전 최악의 전쟁, 독소전쟁의 전개 과정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1. 8. 18.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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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중 가장 치열했던 전장이었던 동부전선에서 나치 독일과 공산주의 소련의 대결했던 독소전쟁을 재조명하고 있는 역사저널 그날 324회에서는 독소전쟁의 배경과 초반 전투 상황에 이어 전개 과정을 다시 살폈다. 그 과정에서 나치 독일의 잔혹함과 엄청난 희생이 있었던 레닌그라드 포위전과 관련한 비극에 접근할 수 있었다. 

1941년 6월 22일 기조의 상호 불가침 협정을 어기고 소련 서부지역 전반에 기습공격을 감행한 나치 독일은 개전 초반 큰 우세를 보였다. 소련은 나치 독일의 침공에 대비가 부족했고 그들의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대규모 전차부대를 앞세운 독일의 고속 기동적, 전격전에 소련의 서부 방어선을 붕괴됐고 나치 독일은 소련의 영토 깊숙이 빠르게 진격했다. 3개 집단군으로 구성된 나치 독일군은 소련 서부의 요충지인 레닌그라드와 수도였던 모스크바, 남부 곡창지대와 유전지대인 키예프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갔다. 독일은 단기간에 동부전선의 상황을 정리하고 소련의 항복을 받아내려 했다. 독일의 이런 전략은 성공적이었고 소련이 버티기 어려워 보였다.

독일 전격전의 주축은 전차는 1916년 영국에서 개발되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활용됐다. 초기 전차는 지금의 전차와 달리 보병을 보조하는 수단이었고 성능도 뛰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계량과 발전을 거듭하면서 육군 전력에서 그 비중이 컸다. 제1차 세계대전은 보병 중심의 참호전으로 전개됐지만, 전차의 가능성을 확인한 전쟁이었다. 이에 각국은 전차 개발에 주목했다.

독일도 마찬가지였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었던 독일은 전후 체결된 베르사유조약에 근거해 막대한 전쟁배상금과 함께 군사력 강화에 큰 제한을 받았다. 독일의 전차 개발 역시 연합국에 의해 금지됐다. 독일의 군사대국이 되는 걸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독일은 포기하지 않았고 다른 농기계 개발 등으로 위장하며 전차를 게발 했고 성능을 끌어올렸다. 1935년 나치 독일은 베르사유조약 파기를 선언하고 군사력을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독일의 전차는 그들 육군 전술의 핵심이 됐고 제2차 대전 초기 그들이 전쟁의 주도권을 잡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에 맞서는 소련도 그들보다 뛰어난 성능의 전차가 있었다. 하지만 소련의 전차에는 독일 전차에 있는 무선 통신 장비가 완비되지 않았다. 보다 효과적인 전차부대 전술을 위해서는 상호 명령이 즉시 전달되는 통신이 중요했지만, 소련의 전차부대는 이것이 없었다. 이는 우수한 전차를 보유하고도 전차전에서 소련이 밀린  이유였다.

소련은 뒤늦게 전열을 정비하고 나치 독일군에 맞섰지만, 나치 독일의 전격적은 빠르게 소련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소련군이 눈만 깜빡하면 나치 독일의 전차부대가 그들의 후방에 도달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소련군의 주력은 개전 초기 크게 와해됐고 곳곳에서 고립되고 말았다. 여기에 나치 독일군은 여성과 어린이 등 민간인들을 인간방패로 삼아 소련군의 저항을 어렵게 하는 비열한 전략까지 이용했다. 히틀러의 타민족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그대로 반영된 전술이었다. 민간인들을 앞세운 나치 독일군에 소련군은 쉽게 대응할 수 없었다. 전선의 상황은 점점 소련에 불리해졌다.

하지만 소련은 그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스탈린을 중심으로 소련은 전열을 정비했다. 초토화 전술로 독일이 진격 과정에서 현지 물자 조달을 막았다. 소련 영토 깊숙이 진격한 나치 독일군은 보급과 증원에 큰 어려움이 발생했다. 특히, 중요한 운송 수단이었던 철도의 철길 궤도가 크게 달랐다. 소련의 철길은 독일보다 훨씬 넓었다. 독일은 철도 길을 그들에 맞게 바꿔야 했다. 이에 물자 보급은 전격전이라는 그들의 전쟁 전략과는 어울리지 않게 마차가 이용되기도 했다. 보급이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10월 초 우기와 봄철 해빙기가 되면 소련 영토 곳곳에 형성되는 진흙길 라스푸티차도 독일군의 진격에 어려움으로 다가왔다. 라스푸티차는 진흙 장군이라 불릴 만큼 소련군에 고마운 존재였다. 

이렇게 전쟁은 손쉬운 승리를 예상했던 나치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의 예상과 달리 장기전이 됐다. 소련은 끈질기게 저항하며 굴복하지 않았다. 소련은 서부지역의 공업시설을 우랄산맥 동편으로 이동하며 생산시설을 유지했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소련은 수천 개의 이르는 군수공장 설비와 산업 인력들을 단기간에 이동시키며 장기전에 대비했다. 추후, 이 공업시설에서 생산되는 엄청난 양의 전쟁 물자는 반격의 큰 발판이 됐다. 

소련이 반격의 채비를 갖추고 있었지만, 엄청난 비극이 함께 하고 있었다. 소련 공산혁명의 성지라 할 수 있는 레닌그라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나치 독일은 포위작전을 펼쳤다. 여전히 그곳에 소련의 대군이 집결한 상황에서 시가전을 전개할 경우 큰 피해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히틀러의 변심으로 모스크바로 향하던 나치 독일 중부 집단군의 일부가 남부 집단군을 지원하려 남하했다.

히틀러는 향후 길어질 수 있는 전쟁에 대비해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와 풍부한 자원이 있는 키예프 지역 장악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했다. 이런 중요도에 따라 소련의 주력군도 이 지역에 배치되어 있었다. 히틀러는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 함락보다는 소련의 주력군을 섬멸하고 소련 남부의 자원을 확보하려 했다. 이에 대해 지금도 히틀러의 결정에 대해 긍정과 부정의 평가가 공존하고 있지만, 나름 이유 있는 결정이었다. 

이런 히틀러의 결정은 북부 집단군이 주도하는 레닌그라드 전투에 영향을 줬다. 나치 독일군은 레닌그라드 포위를 통해 물자와 인력의 이동을 막으면 레닌그라드가 굴복할 것으로 판단했다. 실제 레닌그라드는 남쪽으로는 나치 독일에 북쪽으로서는 그들과 함께 한 핀란드 군에 포위되 상황이었다. 당연히 물자 조달은 어려웠고 그곳의 군인들과 민간인들은 극도의 기아 상태에서 버터야 했다. 극한의 상황이었지만, 레닌그라드의 군인과 시민들을 항복하지 않았다. 먹을 것이 없어 인육을 먹는 상황에 몰렸지만, 레닌그라드는 버티고 또 버텼다. 이에 독일군의 포위 작전에서 시작된 전투는 900일 넘게 이어졌다. 

레닌그라드는 러시아 왕정을 무너뜨린 공산 혁명의 성지로 그들의 지도나 레닌이 사망한 1924년부터 기존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레닌그라드로 도시 이름을 변경할 정도도 큰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또한, 이곳은 러시아에 극히 부족한 바닷길이 시작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독일이 이곳을 점령한다면 러시아의 바다 진출은 흑해와 극동지역 외에 없었다. 이는 소련에 큰 위협이었고 나치 독일 역시 독소전쟁 승리를 위해 포기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레닌그라드는 무너지지 않았다. 이것을 지킨 구인과 시민들의 헌신은 독일군의 발목을 잡았다. 향후 레닌그라드에서의 나치 독일의 패퇴는 전쟁의 양상을 크게 뒤바꾸는 상징적인 일이 됐다. 물론, 그에 따른 희생은 피할 수 없었다. 당시 그곳에 있었던 소녀 타냐가 기록한 일기는 그때의 참상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타냐는 그의 일가친척들이 연이어 사망하는 상황에도 삶을 이어갔고 극적으로 레닌그라드에서 탈출했지만, 극도의 영영 실조로 인해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녀의 일기와 삶은 전쟁의 참혹함을 상징하고 있다. 이에 레닌그라드 전투에 대해 기본적인 인간의 삶도 인정하지 않는 나치 독일과 함께 이런 참혹한 상황의 국민들에게 결사 항전만을 강요한 소련 지도층의 비인간적 조치에 대한 비판도 존재하고 있다. 

이런 상황 변화와 함께 소련은 스파이 활동을 통해 결정적 정보를 입수해 전세를 역전시킬 또 다른 계기를 마련해다. 독일계 소련 스파이였던 조르게는 당시 독일과 함께 주축국의 일원이었던 일본에 잠입해 있었다. 그는 나치를 추종하는 인물로 자신을 위장하고 일본에서 주축국들의 정황을 수시로 소련에 알렸다. 특히, 그는 일본의 전쟁 목표가 소련을 비롯한 북쪽이 아닌 중국과 동남아 및 태평양 지역에 있음을 확인했다. 실제 일본은 중국 침략과 함께 미국 진주만 폭격을 시작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며 독일과 다른 전선을 형성했다. 이는 소련에는 큰 정보였다. 소련은 일본의 소련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고 상당한 군사력을 극동지역에 배치했다. 

하지만 일본의 소련 침공 가능성이 사라지자 극동지역의 30개 사단을 동부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다. 소련은 이를 통해 열세였던 군사력을 일거에 역전시킬 수 있었다. 극동 지역의 30개 사단은 정예부대로 전투력이 뛰어났고 전쟁 초기 피해도 없었다. 소련 영토 깊숙이 들어왔고 보급과 증원군 투입에 어려움이 있었던 나치 독일에는 큰 위협이었다. 

이와 함께 장기전으로 동부전선 상황이 변하면서 독일군은 엄청난 추위와도 싸워야 했다. 소련군 역시 추위가 두려웠지만, 그들은 이미 추위에 대한 대처 방법을 알고 있었다. 단적으로 군복이나 보급품에 있어 소련군은 겨울 추위에 대한 대비가 있었지만, 독일군은 이에 취약했다. 소련의 강추위는 전쟁을 소강상태로 만들었고 소련이 다시 힘을 되찾을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에 더해 모스크바에 나치 독일군이 진출한 상황에도 수도를 떠나지 않고 군중집회에 참석해 국민들과 군인들을 격려한 스탈린과 정부 수뇌부들의 행동은 소련 국민들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이미 독일군의 자국민과 소련 포로들에 대한 학살과 잔혹한 행위 또한 소련 국민들은 강한 항전 의지를 더 크게 했다. 

결국, 독소전쟁은 나치 독일과 히틀러의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흐름이 변하고 있었다. 점점 힘의 균형은 나치 독일에서 소련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남은 건 나치 독일의 몰락이었다. 소련을 과소평가한 스탈린의 잘못된 판단과 전술적인 실패, 군과 국민들의 일치단결한 소련의 저항에 직면한 나치 독일의 동부전선은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었다. 중요한 건 그곳에서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가 뒤따랐다는 점이었다. 누가 승자가 되었던 전쟁이 큰 비극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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