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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당진시는 충남 서해안의 가장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서해안의 대표적인 수출입 항구 평택항이 바다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고 거대한 아산 방조제가 있는 아산시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서해안을 따라 만들어진 서해안 고속도로를 상징하는 서해대교가 지나고 있다. 당진은 삼국시대부터 당나라와의 무역항이 있었고 대외 교류의 중요한 창구이기도 했다.

최근에는 대형 제철소와 관련 업체들이 다수 자리하고 있는 철강 산업단지가 지역을 대표하고 있다. 또한, 당진은 서해바다와 함께 내륙에는 넓은 평야지대가 있어 농수산업이 공존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도시 기행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132회에서는 당진시의  역사 유적지와 과거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장소들과 함께 오랜 세월 당진시를 지켜가는 이웃들과 만났다.

여정을 시작한 곳은  조선시대 축성된 것으로 전해지는 성곽인 면천읍성이었다. 넓은 개펄이 펼쳐진 바다와 바로 옆 초록빛 가득한 평야를 양옆에 두고 걷다 면천읍성을 만났다. 면천읍성은 해안에 침투하는 왜적들은 막기 위해 조성됐고 그 성곽 안에 마을이 조성됐다. 조선 후기까지 지역의 행정 중심지였다. 이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일부 유실된 부분도 있지만,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견뎌낸 성곽 일부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성벽 안에 마을을 찾았다. 마을 곳곳에 그려진 벽화가 방문자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마을 각 집집마다 그 집을 소개하는 예쁜 그림과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과거 이름만 새겨져 있던 문패와 달리 그 집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모습들이었고 그 아이디어가 돋보였다. 그중 한 집을 찾아 노년의 부부를 만났다. 45년 전 사진관을 하던 청년과 마을 처녀가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은 이 부부는 이 집을 지키며 노년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남들에게는 그들의 집이 오래되고 낡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들 부부는 그들의 집을 가꾸며 행복한 일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런 마을 주민들의 행복 바이러스가 이 마을을 생기있게 만드는 것으로 보였다. 

 



마을 길을 걷다 파란 우체통이 인상적인 한 카페에 들렀다. 이 카페는 과거 마을의 우체국을 개조했다고 했다. 100년도 넘는 역사를 가진 마을의 우체국은 그 쓰임이 다했지만, 카페의 주인은 이 건물의 원형을 유지하면서 레트로 감성 가득한 공간으로 만들었다. 서울에서 결혼과 함께 남편을 따라 이곳에 이사한 카페의 주인은 이곳에서 의욕적으로 일하면서 삶의 활력을 되찾았다. 주인의 노력이 더해지며 이 카페는 마을의 명소가 됐다. 과거를 새롭게 창조한 특별한 공간이었다. 

옛것을 새롭게 창조한 곳이 또 있었다. 시냇물이 흐르는 농촌의 풍경을 감상하며 걷던 중 한 폐교 건물이 보였다. 농어촌의 인구수 급감으로 다수의 폐교가 발생하는 현실은 이곳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폐교는 특별했다. 폐교의 원형은 그대로였지만, 멋진 미술관으로 꾸며져 있었다. 다양한 감각의 예술작품들과 전시물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인적인 없는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예상했던 폐교는 문화, 예술의 공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루아침에 미술관이 만들어진 건 아니었다. 어느 부부의 노력이 있었다. 약 30년 전 폐교되어 방치된 이 공간을 부부는 그들의 아이디어를 접목해 새롭게 생명력을 불어넣고 지역의 명소로 탈바꿈시켰다. 이 폐교 미술관은 장년층 이상에게는 추억의 장소로 청년층들에게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사진 핫 플레이스가 됐다. 이곳은 도시재생의 한 예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있었다. 최근 지역의 폐교를 다양하게 활용하는 시도가 각 지자체별로 있는데 중요한 참고가 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다시 나선 길 우리나라 초기 천주교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솔뫼성지를 찾았다. 소나무가 우거진 동산이라는 뜻의 솔뫼와 함께 지어진  솔뫼성지는 우리 천주교의 발상지로 그 의미가 큰 곳이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의 발자취를 이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1821년 태어난 김대건은 어릴 때부터 조선에서 서학이라 불리던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고 해외를 오가며 천주교를 공부했다.

중국 상하이에서 사제품을 받는 그는 최초의 신부가 됐다. 이후 그는 국내에서 전도활동을 하다 체포됐고 1846년 순교하며 짧은 생을 마무리했다. 당시 조선은 천주교가 금기시됐고 그 신자들을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천주교의 자유, 평등사상은 집권층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하지만 부정부패가 부조리가 만연한 조선 후기 민중들에게 천주교는 삶의 위안이고 구원자와 같았다.

하지만 천주교 신자가 된다는 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 천주교를 이끄는 김대건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는 젊은 나이에 생을 다했지만, 이후 천주교는 여러 어려움에도 그 교세를 넓혀 대중 속에 자리했고 개화기 조선의 변화를 상징했다. 특히, 당진을 포함한 서해안 일대는 일찍부터 대외 교역이 활발했던 탓에 외국의 문물이 가장 먼저 유입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천주교 역시 그 지역을 중심으로 크게 세를 확장했다. 

올해는 김대건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다. 김대건은 이미 로마 교황청에서 성인으로 시성 되어 그의 순교를 기리고 있다. 과거 교황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이 솔뫼성지를 포함해 천주교 순교지 등을 방문하기도 했다. 2021년 유네스코에서는 김대건을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하기도 했다. 김대건은 짧은 생을 살았지만, 종교인 이상의 역사적으로도 큰 족적을 남긴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솔뫼성지는 그 점에서 매우 의미가 큰 곳이었다. 그 솔뫼성지를 지나는 버그내 순례길은 스페인 산티아고에 있는 순례자의 길을 연상하게 하는 성지 순례길로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역사의 현장을 지나 한 농촌 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다. 할머니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한 한과 공장을 찾았다. 이 한과 공장은 이 마을에서 많이 수확하는 청매실을 활용하기 위한 방편으로 시작했다고 했다. 예로부터 전해지는 한과 기술에 청매실의 맛이 더해진 이 마을을 한과는 마을의 새로운 수익원이 되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공동 출자하고 함께 일하며 이 공장을 지켜가고 있었다. 할머니들은 한과를 만드는 일이 힘들고 고되기도 하지만, 일터가 있다는 게 즐겁고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하다고 했다. 이 한과공장은 달콤한 맛이 한과와 함께 행복을 만드는 장소이기도 했다. 

농촌을 벗아나 당진의 원도심 마을 길을 걸었다. 한 초등학교 앞에 자리한 문방구가 보였다. 50년 가까이 자리하고 있는 문방구에는 그 문방구와 함께 세월을 보낸 할머니가 있었다. 과거 학교 앞에는 많은 문방구가 있었지만, 이제 2곳만 남았다. 세월의 흐름 속에 많은 문방구들이 사라지기도 했다. 학용품이나 학교 준비물 등을 온라인이나 대형 매장에서 구입할 수 있는 시대에 문방구는 점점 잊히는 장소가 됐다.

 

솔뫼성지 - jihuni74



하지만 할머니는 추억 가득한 이 문방구를 떠날 수 없었다. 낡고 허름해진 문방구 건물이지만, 그곳에서 학생들에게 필요한 학용품과 함께 추억의 과자 등이 있었다. 지금도 종종 초등학교 학생들이 그곳을 찾고 있었다. 어린 학생들과의 만남은 할머니에게는 삶은 큰 활력소가 되고 있었다. 이들 외에 이 문방구는 학교 졸업생들에게 학창 시절의 추억을 되살리는 소중한 공간이기도 했다. 가끔씩 어른이 된 졸업생들이 이곳을 방문한다고 했다. 이 문방구는 졸업생들의 추억을 간직한 곳으로 어린 학생들이 그곳에서 또 다른 추억을 쌓아가고 있었다. 

원도심을 골목을 다시 걸었다. 골목 한편에 오래된 주택이 있었다. 그 주택은 빛바랜 간판이 있는 식당이었다. 수십 년 세월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킨 식당 주변은 과거 논밭이었지만, 그 자리에 도시가 생기면서 주변에 큰 변화가 있었다. 식당 건물은 그 변화를 고스란히 지켜보며 세월을 보냈다. 그 세월 속에는 식당을 지키는 할머니가 함께 하고 있었다. 과거 어려운 가정 형편에 생계를 위해 집에서 시작한 식당은 수십 년간 그의 삶과 함께 했다. 과거에는 예식장 피로연이 열리기도 했고 많은 이들로 채워지기도 했지만, 지금은 과거의 북적임 대시 한적함이 그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과거보다 일은 줄었지만, 할머니의 삶은 변함이 없었다. 이른 아침 자전거를 타고 인근 시장에서 식재료를 구입해 반찬을 만드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식당은 구수한 된장찌개에 10여 가지 반찬을 결들인 백반을 내놓았는데 집 밥의 느낌과 함께 한상을 가득 채운 반찬이 보는 것만으로도 풍성함으로 다가왔다. 여기에 수십 년 세월 한결같은 마음으로 식당을 운영하는 할머니의 손맛이 더해진 식당의 백반은 따뜻함 그 자체였다. 

원도심을 벗어나 바닷가 포구로 향했다. 마침 조업을 마치고 돌아온 작은 어선이 있었다. 그 배의 선장은 인근 바다에서 여러 생선을 잡아왔다. 그를 따라 인근 어판장을 찾았다. 그는 그의 아내와 함께 그곳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바로 옆에 사돈이 운영하는 가게가 있었다. 가깝고도 먼 사이라 하는 사돈 지간이지만, 이들은 바로 지척에서 함께 장사를 하고 교류하고 있었다. 이들은 여느 사돈과 같이 어색함이 아닌 가족 그 이상으로 서로를 위하고 마음을 나누고 있었다. 어려움이 있으면 함께 하고 기쁨을 나누는 가족이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소중함을 마음 가득 담아 갈 수 있었다. 

당진시는 농촌과 어촌, 공업지대가 혼재한 도시로 근. 현대사의 중요한 장면들도 간직한 특별함이 있는 도시였다. 과거의 흔적들을 버리고 부수기 보다 새롭게 창조하는 지혜도 볼 수 있었고 사람들의 정이 무엇인지도 알게 해주었다. 그렇게 채워진 당진에서의 여정은 마음 한편을 행복으로 채워주었다. 


사진 : 프로그램,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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