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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에 있어 석유는 산업의 비약적인 발전과 번영을 상징하는 에너지원이다. 이제 석유는 산업은 물론이고 생활 전반에 있어 없어서는 안되는 물과 공기와 같은 존재다. 석유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다. 이렇게 중요한 에너지원인 석유지만, 석유가 본격적으로 상용화된 건 100여 년 남짓이다. 그 사이 우리 인류는 엄청난 발전을 거듭했다. 석유의 파급력이 엄청났음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중요성이 커진 만큼 석유의 대표적 산지인 중동지역을 둘러싼 각국의 역학관계도 복잡하다. 그에 상응하는 분쟁과 전쟁이 지속됐다. 여기에 중동의 정치, 경제, 종교적 특수성 더해지며 중동은 지금도 전쟁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런 중동의 이해관계에 미국을 포함한 강대국들이 함께하며 상황은 더 복잡하기만 하다. 동. 서 냉전의 유산이 여전히 존재하는 한반도를 포함해 중동은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지역이다. 이런 중동지역의 정세와 관련해 역사 예능프로그램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계속되는 중동지역의 긴장과 전쟁이 이어지는 상황을 전문가의 강의와 함께 살폈다. 

중동지역은 넓은 사막이 대부분인 척박한 지형으로 다수의 유목민들이 자리하는 지역이었다. 산업의 발달이 더디기만 했다. 이슬람교라는 공통의 종교가 있지만, 독립적인 국가가 아닌 각 지역별 부족들 중심의 토후국들이 자리했다. 과거 이슬람 지역을 장악하던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지만, 1, 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오스만 제국이 몰락하고 각 지역에 국가가 들어섰다.

이런 중동이 주목받기 시작한 건 다량의 석유가 발견되면서부터다. 과거 석유는 고대 문헌에도 등장할 정도로 오래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원유 상태의 석유를 정제할 기술이 없었다. 불을 밝히거나 하는 등의 극히 제한된 부분에서 사용됐다. 그 가치를 중동지역에서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석유가 기존의 석탄에 비해 효율성이 매우 뛰어난 에너지원임을 밝혀지고 원유에서 다양한 석유를 추출할 수 있는 정제기술이 발전하면서 그 사용 용도가 크게 늘었다. 과거 등유만을 추출할 수 있었지만, 휘발유나, 경유 등으로 분화가 가능해지면서 생활 전반에 사용됐다. 특히, 자동차나 비행기 등 경량화된 운송수단이 발전하면서 그 원료로 석유는 크게 각광받았다. 여기에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석유는 전쟁을 원활하게 치르는 데 있어 중요한 자원이 됐다. 나치 독일이 무리한 소련 침공을 강행한 이유 중 하나는 당시 소련 남부 카스피해 연안의 유전지대를 장악하려는 데 있었다. 다량의 전차와 전투기 등을 운영하는 데 있어 석유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히틀러의 소련 침공으로 시작된 독소전쟁은 소련의 승리로 끝났고 이는 나치 독일의 몰락을 가져오는 결정적 원인이 됐다.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 석유의 중요성은 나날이 증가했다. 산업의 급속한 발전은 그 수요를 더 크게 했다. 세계대전을 거치며 최강국이나 부국이 된 미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국인 자국 내에서 유전에서도 막대한 석유를 생산했지만, 그 수요를 모두 충족하기 어려웠다. 자국 내 석유 자원에 대한 보호를 위해 개발을 다소 늦추기도 했다. 이에 미국인 안정적인 석유 수급처 확보가 절실했고 중동지역을 주목했다. 그전에 카스피해 연안 지금의 아제르바이잔의 바쿠 지역에서 막대한 양의 석유 생산이 이루어졌지만, 그 지역은 소련, 러시아의 영역이었다.

미국은 중동지역에서 안정적인 석유 공급망을 확보하려 했다. 초기 중동지역의 석유 개발은 미국과 영국이 주도했다. 20세 초 발견되어 본격 개발에 들어간 중동 지역의 석유는 미국과 영국의 대형 정유사들이 주도했다. 중동 국가들은 자본과 기술이 없었고 막대한 자금력과 기술력을 앞세운 미국, 영국의 정유사들에게 사업권을 양도하며 이익을 공유하는 방식을 택했다. 개발 초기는 영국이 주도권을 잡았지만,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초강대국으로 성장한 미국이 영국의 자리를 대신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그가 뇌출혈로 사망하기 얼마 전 중동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 국왕과 비밀 협상을 통해 미국의 사우디아라비아는 확실한 친미국가로 만드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에 더해 미국인 이란과도 우호적인 유대관계를 만들며 중동의 양대 강국에 모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중동의 석유 패권을 미국이 장악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은 이슬람 최대 종파인 수니파와 시아파의 종주국으로 전 근대적인 왕정 국가였고 여성에 대한 억압 등 인권문제에 있어 후진적인 면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가장 앞선 자유민주주의 시스템을 갖춘 미국이었지만, 그들은 국익 앞에 소중한 가치를 애써 외면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이런 이면에도 미국은 중동의 정세를 주도하는 국가가 됐다.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석유 수급의 안전성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 혜택은 석유를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나라들도 공유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도 그에 포함됐다. 

아이러니가 겹친 중동 정세의 안정은 이스라엘의 등장으로 그 흐름이 완전히 달라졌다. 1948년 UN의 승인을 바탕으로 팔레스타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에 유대인들이 중심이 된 이스라엘의 건국이 이루어졌다. 당시 그 지역은 영국이 통치를 하던 지역이었다. 영국은 세계대전 협력을 얻기 위해 팔레스타인과 유대인 모두에 독립국가 건설 지원을 약속했다. 이런 영국의 이중 플레이는 결과적으로 중동의 해묵은 갈등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팔레스타인인들은 그들의 영역을 내줘야 했고 이슬람 국가들의 집합체인 중동에 그들과 전혀 다른 유대교 국가가 들어서는 건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이는 이후 4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으로 이어졌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은 중동 국가들의 거듭된 공세를 막아내며 이스라엘의 입지를 단단히 했다. 이는 중동지역에서 반미 정서를 크게 하는 원인이 됐다. 중동 전쟁 과정에서 산유국들은 그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뭉쳤고 석유수출국 기구 OPEC가 생겨났다. 이는 미국이 주도하는 중동 석유의 통제권이 바뀌게 됨을 의미했다. OPEC은 중동전쟁이 진행되는 사이 미국과 영국 정유사들의 주도하던 개발권을 국가에 귀속하는 한편 생산량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원유 가격은 급격히 상승했다. 전 세계적으로 석유가격이 급등하는 원유 파동이 일어났다. 

1973년 원유가는 4배가 인상됐고 1979년 2차 석유파동 때도 급격한 인상이 있었다. 이는 산업 전반에 큰 타격을 줬다. 물가는 급격히 올랐고 많은 기업들이 파산에 직면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반대로 중동의 산유국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는 중동 건설 붐으로 이어지며 우리 경제가 위기에서 탈출하는 또 다른 돌파구가 되기도 했다. 중동 산유국들은 그 부를 바탕으로 경제발전과 빠른 국가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 이제 중동의 산유국들은 대표적인 부국이 됐고 그 흐름은 여전하다. 

 

 


이런 중동 정세의 변화에 미국은 그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미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의 밀약을 통해 모든 원유의 거래에 있어 달러 결제만을 인정토록 하면서 달러의 영향력을 더 극대화했다. 이후 달러는 전 세계 경제의 기축통화로 그 위치를 확고히 했고 중동지역에서의 영향력도 유지할 수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로서는 미국이라는 강국의 뒷받침을 통해 중동의 맹주 자리를 튼튼히 할 수 있었다. 

이란은 달랐다. 이란은 대표적인 친미 국가였지만, 1979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고 집권 세력이 교체되면서 반미 국가로 변모했다. 그때까지 이란을 통치하던 팔레비 국왕은 친 서방 정책을 펼쳤고 이란은 여성들이 히잡을 쓰지 않고 거리를 자유롭게 할보하는 등 매우 개방적인 사회의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팔레비 정권은 반대파에 대해 비밀경찰 등을 동원해 강력히 강력히 탄압했고 비 민주적인 독재권력의 모습을 보였다. 이는 국민적인 저항을 불러왔고 이슬람 혁명으로 팔레비 정권을 붕괴됐다. 이란에서는 미국 대사관 점거 사건으로 다수의 미국인들이 인질로 붙잡히는 등 반미 정서가 한층 더 강해졌다. 미국으로서는 중동에서 중요한 교두보 하나가 사라진 셈이었다. 

미국과 이란의 갈등이 커지는 상황에서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급부상했다. 후세인 정권의 이라크는 소수의 수니파가 다수의 시아파를 지배하는 체제였다. 후세인은 이 한계를 철권통치로 극복하려 했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반대파를 숙청하고 비밀경찰 등을 동원해 국민들을 철저히 억압하며 종신 집권을 길을 가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이라크 북부지방을 터전으로 살아아고 있는 소수민족 쿠르드족에 대해서도 탄압을 가했다. 그들은 독립에 열망이 강했다. 후세인은 그들을 군사적으로 억압했고 심지어 화학무기를 사용해 민간인들에 학살을 자행하기도 했다. 전 세계적으로 큰 비난을 받는 일이었지만, 후세인은 화학무기를 자국민들에게 사용하는 잔혹함을 보였다. 

후세인은 중동의 맹주가 되고자 하는 야심가였다. 자국 내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한편 대외 확장을 함께 시도했다. 이라크는 이란과의 접경 지역의 유전과 항구를 장악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했다. 이란과 이라크 접경지대는 과거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그 영역이 불분명한 부분이 있었고 불안정한 상호 조약으로 경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후세인은 1980년 9월 과거 그들의 영토를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선전포고 없이 이란을 기습 침공했다. 마침 이란은 이슬람 혁명 이후 국내적으로 혼란기에 있었다. 후세인은 그 기회를 노렸다. 이스라엘과 중동 국가 간 중동전쟁이 평화협정으로 종식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중동은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애초 예상은 이라크의 우세였다. 이라크는 축적된 군사력이 강했고 서방과 여타 아랍국들의 지지와 지원을 받았다. 특히, 미국인 반미 국가로 돌아선 이란 정권의 붕괴를 위해 이라크에 막대한 군사적 지원을 했다.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인 후세인이었지만, 미국은 철저히 국익을 따랐다. 미국은 그들이 악으로 규정한 대상을 또 다른 악으로 응징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미국의 이라크 지원과 함께 서방 국가들 역시 이라크에 대한 무기를 판매하는 등 이익을 얻었다. 미국은 이란의 몰락을 위해 이라크의 화학무기 사용 등도 용인했다.

하지만 한편에서 미국은 이란에 몰래 무기를 판매하는 양면성을 보이기도 했다. 미국은 중동지역에 절대 강자가 등장하는 것 또한 경계했다. 여기에 이란과 다른 종파인 대부분의 수니파 이슬람 국가의 지원도 있었다. 후세인은 이런 배경을 등에 업고 권력 기반을 더 든든히 할 수 있었다. 이는 훗날 걸프 전쟁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유리한 상황에 있었던 이라크였지만, 이란은 물러서지 않았고 오히려 강하게 반격했다. 전쟁은 1988년까지 장기전으로 이어졌고 양측 모두 수많은 사상자와 물적 피해가 발생했다. 산유국들과 전쟁이라는 점에서 석유 수급의 불안정성이 커졌다. 페르시아 만을 통한 석유 수송도 큰 위협을 받았다. 이에 전쟁에 대한 회의론이 전 세계적으로 강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란 이라크 전쟁은 유엔의 중재로 1988년 영토의 원상 회복을 조건으로 종전됐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무의미한 전쟁이었다. 

후세인의 의도는 하나로 실현되지 않았고 막대한 전비로 인한 국가부채만 남았다. 전후 이라크는 국가부채에 허덕였다. 이라크는 원유가 인상 등으로 이를 메우려 했지만, 여타 산유국들이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국가 경제의 위기는 결국 후세인 정권의 위기였다. 후세인은 이 위기를 또 다른 전쟁으로 극복하려 했다. 후세인 이라크와 인접한 소국 쿠웨이트를 압박했다.

쿠웨이트는 과거 이라크 영토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1899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어 이라크와 분리됐고 1961년 독립했다. 영토는 크지 않지만, 전 세계 10%에 해당하는 막대한 원유가 매장되어 있고 그 생산량도 큰 중동의 부국이다. 쿠웨이트와 이라크의 경계 지역에 유전을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 이란, 이라크 전쟁 당시 이라크는 유전의 개발과 생산이 원활하지 않았지만, 쿠웨이트는 막대한 원유를 채굴해 수출했다. 한때 자신의 영토였던 나라가 큰 부를 쌓는 모습이 후세인에게는 좋게 보였을 리 없다.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상대로 과거 이란 이라크 전쟁시 지원했던 차관 상환 면제와 경계지역 원유 채굴에 대한 보상 등을 요구했다.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일이었다. 

후세인은 1990년 8월 쿠웨이트 국경을 넘어 기습 침공을 했다. 이란 이라크전을 치르면서 군사대국으로 거듭된 이라크 군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쿠웨이트를 점령하고 이라크의 19번째 주로 편입했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큰 이슈였다. 이미 이란 이라크전 이후 관계가 이라크와의 관계가 크게 악화된 미국으로서는 더 큰 충격이었다. 이대로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장악하고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한다면 미국에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또한, 석유의 원활한 공급에도 차질이 발생하는 문제였다. 이에 미국은 이라크 응징을 위해 다국적군을 조직했다. 미국과 서방국가 외에 중동 국가들도 이에 참여했다. 우리나라 역시 함께 했다. 완전히 다른 전쟁의 양상을 보여준 걸프전의 시작이었다. 

 

 


미국이 중심이 된 다국적인 각종 첨단 무기를 사용해 이라크를 공격했다. 공군과 미사일을 사용한 공습으로 이라크 군대와 각종 산업시설을 초토화했다. 당시 걸프전은 이라크 현지에서 기자가 위성 송출 시스템을 이용해 실시간 상황을 현장 중계하며 실시간으로 전쟁을 전 세계인들이 시청하기도 했다. 마치 게임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전쟁이었다. 이라크는 다국적군의 첨단 무기에 대응하지 못했다. 스커드 미사일 등으로 반격했지만, 패트리엇 미사일로 즉시 미사일이 요격됐다. 이 장면 역시 텔레비전으로 볼 수 있었다.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첨단 스텔스와 정밀 타격이 가능한 토마호크 미사일 등에 이라크군은 무력화됐다. 후세인은 공습과 미사일 공격을 교란하기 위해 유전에 불을 내는 등의 방법으로 대응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후세인은 전쟁 양상을 바꿀 마지막 카드로 이스라엘에 대한 미사일 공격을 감행했다. 만약, 이스라엘이 이에 대응한다면 후세인은 전쟁을 이슬람 대 반 이슬람의 구도로 바꾸려 했다. 이는 다국적군에 포함된 이슬람 국가들의 동요를 불러오고 다국적군의 와해로 이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전략적 인내를 택했고 후세인의 의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다국적군은 공습과 미사일 공격에 이어 1991년 1월 육지전을 통해 쿠웨이트를 수복하고 이라크 영역을 점령해나갔다. 1991년 2월 이라크는 조건 없는 항복을 선언했고 전쟁을 종료됐다. 1차 걸프전쟁의 끝이었다. 후세인의 이라크는 쿠웨이트에서 철수하면서 유전시설을 파괴하는 등의 악행을 자행했다. 

미국은 후세인의 축출을 기대했지만, 전쟁 과정 중 계속되는 아군과 민간인에 대한 오폭 사건과 철수하는 이라크 군에 대한 무차별 공격 등으로 여론이 악화되면서 전쟁을 종료해야 했다. 후세인에게는 기사회생의 길이 열렸고 후세인의 권력은 이라크 내에서 여전히 건재했다. 중동 정세의 불안감을 여전했다. 후세인은 미국에 대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고 경제 제제를 견뎌냈다. 원유 결제 시 달러가 아닌 유로화 결제를 시도하면서 미국의 영향력 약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후세인은 여전히 미국에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후세인의 존재와 함께 미국을 겨냥한 테러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며 미국을 위협했다.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9.11 테러는 미국을 큰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알카에다로 불리는 테러 단체가 주도한 이 테러는 이전까지 없었던 테러였다. 2대의 민간 항공기를 납치한 테러범들은 항공기를 미국 경제의 중심 뉴욕의 상징인 엠파이어스테이트 쌍둥이 빌딩으로 몰고 가 충돌시켰다. 쌍둥이 빌딩은 순간 화염에 휩싸였고 붕괴됐다. 미국 본토가 테러에 의해 공격당한 사건이었다. 미국인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고 9.11 테러를 주도한 알카에다의 비호세력인 탈레반이 장악하고 있는 아프간을 공격했다. 이 전쟁의 불똥은 이라크에도 영향을 줬다. 

미국은 이라크가 여전히 대량 살상무기를 다수 보유하고 있고 1차 걸프전쟁 후 UN의 결의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격을 감행했다. 이는 과거 1차 걸프전과 달리 서방 국가들로부터도 지지를 얻지 못했다. 실제 목적은 후세인의 제거였다. 이라크 내로 진군과 미국과 영국의 연합군은 쉽게 이라크를 점령했고 후세인 정권은 붕괴됐다. 이후 후세인은 미군에 체포되어 재판 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그의 아들들 역시 미군의 공격으로 사망했다. 이렇게 이라크의 독재 정권을 붕괴했지만, 미국이 침공의 근거로 삼은 대량 살상무기는 이라크에 없었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은 심한 도덕적 비난을 받았다.

 

 


이후 미국인 이라크에 친미정권을 세우고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이라크는 이에 반대하는 단체들이 강력한 저항을 했고 내전 상태로 빠져들었다. 2011년 미군이 이라크에서 철수한 이후 발생한 권력 공백은 반대 세력들의 준동으로 이어졌다. 이 중에서 과격 이슬람 조직인 IS는 한때 이라크의 상당 지역을 장악하며 그 위세를 떨치기도 했다. 이라크는 한때 적국이었던 이란의 지원까지 받으며 힘겹게 그들을 격퇴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라크의 내전 상황은 이어지고 있고 불안한 정국이 지속 중이다. 이란과 같은 시아파 정권이 들어선 이라크의 상황은 이란의 중동에서의 영향력 확대로 이어질 수도 있다. 미국의 의도가 다른 중동 정세가 나타날 수도 있다. 

또한, 과거 세계 경찰로서 대외 분쟁에 적극 개입했던 미국이 최근 자국 우선주의로 선회하면서 그 역할을 내려놓는 양상이라는 점도 중동 정세를 더 복잡하게 하고 있다. 과격 이슬람 단체의 세력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중동의 맹주 자리를 노리는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대립도 여전하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긴장과 중동 국가들과의 관계도 여전히 불안하다. 미국과 이란의 긴장관계도 아직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의도대로 중동의 정세가 흘러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여전히 미국의 영향력이 크지만, 절대적이라 할 수 없다. 중동의 정세는 더 불안정해졌고 언제든 폭발할 수 있다. 최근 코로나 상황이 계속 이어지는 게 역설적으로 급격한 변화를 막고 있는 형국이다.

최근 심각한 지구 온난화에 대한 경각심이 커지고 대체 에너지가 크게 부각되면서 석유에 대한 수요가 줄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석유는 대표적인 에너지원이고 산업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중동이 전쟁에 휩싸이고 석유 수급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큰 전 세계 경제에 큰 악재가 될 수 있다. 최근 각국이 석유 비축물량을 늘리는 등 이에 대비하고 있지만, 대응 기간은 제한적이다.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세계 각지에서 석유 탐사를 하고 원유 수입선을 다변화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상황의 근본 원인이 탐욕이다. 특히, 석유에 대한 강대국들의 탐욕이 지금의 중동을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 단추를 잘못 낀 중동의 정세는 복잡한 실타래처럼 엮여 있다. 쉽게 풀리기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이는 중동의 문제를 단순한 선과 악의 문제로 판단하기 어렵게 한다. 석유는 해당 국가에 엄청난 부를 가져다주었지만, 오일 머니의 위력은 여전히 강력하다. 대신 그에 비례해 분쟁과 갈등을 함께 가져다주었다. 이 석유가 중동에서 다수 생산되는 한 중동을 향한 불안한 시선을 거두기는 어려워 보인다. 


사진, 글 : jihuni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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