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역사저널 그날 326회] 독.소전쟁의 종결, 소련의 베를린 함락, 히틀러의 몰락까지

문화/미디어

by 지후니74 지후니74 2021. 9. 9. 10:09

본문

728x90
반응형

4회에 걸쳐 제2차 세계대전 중 가장 참혹하고 비극적인 전투였던 독소 전쟁을 재조명하고 있는 역사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 326회에서는 전쟁의 결말과 히틀러와 나치 독일의 몰락의 역사에 대해 살폈다. 나치 독일은 1945년 5월 연합군에 두 번의 항복을 했다. 5월 8일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서방에 5월 9일은 소련에 다시 한번 항복을 해야 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나눠져 대립하는 양극 체제의 서막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소련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나치 독일의 독재가 히틀러가 공산주의 소련의 독재가 스탈린의 입지를 단단히 해주는 결과가 됐다. 그만큼 독소 전쟁의 결과가 불러온 결과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현대사의 흐름을 바꾸는 일이었다.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명령된 나치 독일의 기습 침공으로 시작한 전쟁은 개전 초기 우월한 군 전력을 앞세운 독일의 우세였다. 독소 불가침 협정을 믿고 있었던 소련은 독일의 침공을 제때 예측하지 못했고 그들의 기습에 동부전선의 주력군이 궤멸되며 크게 밀렸다. 3개의 집단군으로 구성된 독일군은 매우 빠른 속도로 소련 영토를 잠식해 들어갔다. 나치 독일의 독재가 히틀러의 계획대로 수개월 내 소련이 항복하는 흐름이었다. 그런 결과라면 제2차 세계대전의 판도는 크게 달라질 수 있었다.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연합군의 반격에도 상당한 어려움이 발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련은 그대로 무너지지 않았다. 소련은 그들의 군수 공장을 단기간에 걸쳐 우랄산맥 동쪽으로 이동하는 한편 국토에 대한 초토화작전으로 독일군의 현지 보급을 막았다. 또한, 일제의 침략에 대비해 극동 지역에 배치된 부대를 빠르게 동부전선에 투입해 군사력을 회복했다. 소련군과 국민들의 침략자에 강력한 저항 역시 독일군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소련은 이전의 중화학 공업 육성정책으로 만든 대규모 공단에서 군수물자를 생산해냈고 미국 등 서방의 원조를 더해 전력을 다시 강화했다. 독일의 기대와 달리 소련의 강력한 저항하면서 독.소 전쟁은 장기전으로 접어들었다. 

 

독소전쟁 유적지 사진 - 픽사베이

 


이후 독일은 레닌그라드 포위전을 유지하면서 흑해 유전지대와 우크라이나 지역의 곡창지대가 있는 남부 전선에 전력을 집중했다.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과 석유 자원은 독일이 장기전으로 이어가는 데 필수적인 요소였다. 소련은 이에 대비했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소전쟁은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 전투에서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독일 남부 집단군이 궤멸되면서 독일군의 소련에 대한 공세는 크게 약화됐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승리를 발판으로 소련군은 수세적 입장에서 공세적 입장으로 전환했다. 

1943년 8월 히틀러의 독일은 아직 건재한 나머지 군 전력을 끌어모아 마지막 공세를 단행했다. 독일군은 그들의 강점이 있는 전차부대를 앞세워 소련군을 공격했지만, 소련군은 이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미 독일군 이상의 전력을 구축한 소련이었다. 대규모 기갑 부대의 대결이 펼쳐진 이 쿠르쿠스 전투에서 독일은 크게 패했고 주력 부대가 큰 손실을 입었다. 이후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방어전으로 전개해야 했다. 반대로 기세가 오른 소련군은 대규모 부대를 앞세워 독일은 동부전선을 무너뜨렸다. 

소련의 반격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전투는 1944년 6월 22일 개시된 바그라티온 작전이었다. 독일이 독.소전쟁을 시작하면서 펼친 전격전의 암호 바르바로사 작전에 대응하기 위해 명령된 작전이었다. 6월 22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한 날이었다. 바그라티온 작전은 소련에게는 본격적인 공세 전환이었고 역사적을 상징성이 큰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마침 서방의 연합군은 1944년 6월 6일 프랑스 북부 해안인 노르망디에 대규모 부대를 상륙해 독일을 압박하고 있었다. 육지에서 제2전선이 형성됐다. 나치 독일이 동.서에서 한 번에 밀려드는 연합군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서부 전선은 독일의 강력히 저항하며 수개월간 정체됐다. 하지만 동부전선은 달랐다. 무려 250만 명의 대규모 병력을 전개시킨 소련군의 위세는 엄청났다. 소련군은 독일의 동부전선을 돌파해 독일의 점령지를 하나하나 잠식했다. 소련군은 1945년 4월 들어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으로 진격했다. 서쪽에서도 서방의 연합군이 독일 영토를 점령해가고 있었다. 

1945년 4월 16일 소련군은 베를린에 대한 대공세를 시작했다. 이제 독일의 패망은 기정사실이 되고 있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히틀러는 심리적으로 크게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군 수뇌부와도 심한 갈등 양상을 보였다. 히틀러의 군 수뇌부에 대한 불신은 그의 측근과 친위부대에 대한 의존성을 더 높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히틀러와 나치의 몰락은 점점 현실이 되고 있었다. 

베를린 점령을 막아내기 위해 나치 독일은 정규군 외에 민간들도 다수 전투에 참여하도록 했다. 그중에는 10대 초반의 소년들도 다수 포함됐다. 10살을 조금 넘긴 어린이들도 있었다. 그 소년병들의 상당수는 전쟁 중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독일이 고안한 대전차 무기를 담당하며 전쟁의 최일선에 배치됐다. 그 무기는 적의 전차를 공격하기 위해 근접전을 펼쳐야 했다. 소년들은 그 위험 속에서 의미 없이 사라져갔다. 그럼에도 나치는 소년병들과 시민들의 참전을 독려했다. 히틀러는 4월 20일 전쟁에서 공을 세운 소년병들에 대한 훈장 수여식에 직접 참여해 그들의 격려하기도 했다. 이는 그의 마지막 공식 행사였다.

 

독소전쟁 유적지 - 픽사베이



히틀러는 이후 베를린 모처의 지하 벙커에 은신해 시간을 보냈다. 지하 12미터 아래 만들어진 비밀 벙커에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4미터의 외벽과 2미터의 지붕이 외관을 구성해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 안에는 집무실과 회의실 외에 전쟁 지휘에 필요한 시설이 있었고 생활을 위한 시설도 더해졌다. 그 안에서 히틀러는 불안 속에 시간을 보냈다. 한편으로는 초코케이크를 자주 즐기기도 했다. 자국의 군인과 국민들이 전쟁에 희생되는 와중에 그는 마지막까지 품위 있는 생활을 했다. 이미 전세가 크게 기운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 연합군에 항복하고 죗값을 받는 게 순리였지만, 히틀러는 그러지 않았다. 

나치 독일은 지속적인 선전전과 함께 전장에서 이탈하는 군인과 시민들에 무자비하게 살상하며 통제했다. 과거 소련의 독재가 스탈린이 독일의 공세에 포위된 레닌그라드, 스탈린그라드의 민간인들이 이탈을 막기 위해 행했던 방법도 다를 게 없었다. 

한편으로 나치 독일은 전쟁 중에도 일반 시민들에게 필요한 생활물자는 충분히 공급하며 민심의 동요를 막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베를린의 시민들은 소련군의 본격적인 베를린 진입이 시작되는 시점까지 생활에 큰 불편을 겪지 않았다. 기본적인 필수품 외에 여성들의 화장품 등의 기호품도 공급받았다. 독일 국민들이 즐겨 마셨지만, 전쟁 중 수입이 불가능해진 콜라를 대신해 대체품으로 환타를 만들어 공급한 게 대표적이었다. 전쟁을 위해 총력적인 펼친 서방 연합군과 소련과 달리 나치 독일은 소비재 생산을 지속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런 민심 수습책이 그들의 파멸을 막을 수는 없었다. 

소련군은 베를린 시내로 빠르게 진입했고 중요 시설을 장악했다. 시가전이 펼쳐졌지만, 독일군의 저항은 오래가지 못했다. 1945년 4월 30일 독일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국회의사당이 소련군에 함락되면서 전쟁은 사실상 종료됐다.

그 시각 히틀러는 그의 동거녀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리고 함께 음독 후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들 사이의 자녀들도 마찬가지 운명이었다. 5월 1일에는 나치의 2인자로 히틀러의 최측근이자 나치의 선전부장이었던 괴멜스도 6명의 자녀와 부인과 함께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권력 공백이 발생했고 독일은 더 이 상의 항전이 무의미했다. 이후 독일은 5월 8일과 5월 9일 두 번의 항복을 했다. 나치의 몰락과 독. 소 전쟁의 결말이었다. 소련은 독일이 그들에 항복한 5월 9일을 전승 기념일로 정했고 지금의 러시아도 그 전통을 이어가며 기념하고 있다. 

히틀러는 국가와 국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역사적 오점을 남겼지만, 그의 죗값을 받기 보다 죽음으로 상황을 회피하는 비겁함을 보였다. 그는 그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나치즘의 부활을 꿈꾸며 스스로를 신격화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히틀러가 초래한 전쟁은 세계 전체에 큰 상처를 남겼다. 역사상 최악의 전쟁이었던 독.소 전쟁은 양측을 통틀어 3,000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고 국토의 상당수의 황폐화됐다. 최악의 독재자였던 히틀러와 스탈린은 인명과 재산 피해보다는 전쟁의 승리에 집중했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희생을 외면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이런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히틀러였지만, 그가 권력을 잡았던 건 쿠데타가 아닌 민주주의 선거에 의해서였다. 히틀러가 집권한 1930년대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막대한 배상금을 부담하며 재정적으로 어려웠고 세게 대공황의 여파까지 밀려오면서 극심한 경제 불황에 최악의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극단주의 적 사상을 가진 정파들이 득세했고 히틀러의 나치당이 그 중심에 있었다. 

히틀러의 사상은 극단적인 인종주의와 특정 집단에 대한 증오와 폭력적인 방법이 그 저변에 있었지만, 그의 강렬한 메시지는 힘든 상황에 놓은 독일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특히, 히틀러 특유의 연설 능력은 그의 존재감을 더 돋보이게 했고 국민적 지지를 이끌어냈다. 어느새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에게 희망으로 다가왔고 독일 국민들의 지지는 그를 최고 권력자로 만들어줬다.

히틀러는 대규모 토목공사로 경기를 부양하고 군사적인 재무장으로 독일을 다시 군사대국으로 만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깊은 침체기에 있었던 독일 국민들은 그에게 환호하며 큰 지지를 보냈다. 이에 편승에 히틀러는 침략전쟁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또한, 인종주의에 근거한 유대인과 집시, 아리아인에 비해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여타 민족들에 대한 탄압과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 이런 나치의 극단적인 행태에도 그들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여전했다. 이전보다 크게 나아진 생활과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나라의 모습 속에 독일 국민들은 그 누군가의 고통에 눈을 감았다. 그 와중에 그들이 모두 파멸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했다. 

 

베를린 - 픽사베이



이런 흐름에는 나치의 선전술도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앞서 언급한 히틀러의 최측근이었던 괴멜스는 그 중심에 있었다. 그는 현대 광고, 마케팅 기법에도 통용될 만큼 그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프라임 타임 뉴스 시작전 보이는 시보 장면은 괴멜스가 창시한 기법이다. 이는 뉴스에 대한 대중들의 집중력을 한층 더 높이는 효과가 있었다.

괴멜스는 영화나, 라디오 등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독일 국민들에게 나치 정권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히틀러를 우상화했다. 잘못된 정보라 해도 그것이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진실이 되는 일을 괴멜스는 알고 있었다. 이를 통해 진실은 가려지고 권력의 이면은 아름답게 포장됐다. 지금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가짜 뉴스의 원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뛰어난 웅변가이자 선동가였던 히틀러와 그의 브레인이 된 괴멜스의 만남은 그들의 파멸과 함께 현대사의 큰 불행을 초래된 잘못된 만남이었다. 

실제 히틀러는 독일 민족의 우월함에 기반한 인종주의자였지만, 자국민들에 대해서도 차별성을 보이는 위선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는 전쟁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국민들의 희생을 당연시했다. 전쟁 막바지 무의미한 희생을 막기 위한 일부 측근들의 항복 권유에도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항전하지 않는 이들을 열등한 국민으로 격하했다. 그에게 국민들은 그의 신념과 사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에 불과했다. 기본적인 인권의식도 없었다. 이런 잘못된 신념과 사상에 매료된 군인들과 국민들은 전쟁 중에 희생됐다. 

전후 독일은 패전국으로 시련의 시간을 보냈다. 그들 영토의 1/3을 차지하던 동프로이센 지역의 지배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 지역은 지금의 러시아, 폴란드로 귀속됐다. 이와 함께 동부 유럽에서의 영향력도 사라졌다. 넓었던 독일어권 지역이 크게 축소됐다. 나라 역시 동.서독으로 분할됐고 수도 베를린 역시 동서로 분할되며 통일 독일이 될 때까지 그 상태를 유지했다. 전 유럽을 지배하려 했던 히틀러의 잘못된 야심은 오히려 독일의 영토를 축소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이런 아픔이 있었지만, 독일은 전범국으로서 그 시련을 감수하고 지속적인 과거사와 전쟁 범죄에 대한 사과와 보상을 지속했다. 특히, 나치즘의 부활을 막기 위해 법적으로도 강력한 통제를 했다. 단적으로 나치의 경례 방식을 모방하기만 해도 징역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 또한, 과거사에 대한 철저한 교육을 통해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선조들의 과오를 알리고 있다. 독일은 과거사에 대한 태도와 보상 노력을 통해 신뢰를 얻었고 동.서독의 통일 후 고 유럽의 선도 국가로 자리했다. 

이미 알려진 과거사마저 부인하거나 심지어 왜곡하는 일본과는 크게 대조되는 독일이다. 
독일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의 원흉인 전범국 일본은 그들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는 한일간 역사 인식에 따른 갈등 관계를 지속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일본은 과거사에 대한 명확한 청산 없이 그들이 원폭에 의한 피해자임을 강조하는 적반하장의 모습을 지속하고 있다. 최근에는 군사 대국으로 발전하려는 시도를 노골적으로 하고 있다. 일본이 진정 선진국이 되려 한다면 과거사 문제에 대한 전향적인 인식과 그에 상응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독.소 전쟁은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전쟁의 결과로 동.서 냉전체제가 만들어졌고 그 영향은 지금 우리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민족 간의 전쟁을 하게 되는 원인이 됐다.

또 한 편으로는 독일의 파시즘과 일본의 군국주의가 발생한 배경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두 극단적인 사상은 자신들에 대한 우월성과 힘의 논리를 기반으로 한다 할 수 있다. 이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서구 사회가 아메리카,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지배 논리와 통하는 면이 있다. 서구의 나라들은 그들의 우월한 군사력과 기술력을 앞세워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곳곳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서구 나라들은 식민지의 인적, 물적 자원을 수탈했고 그들의 부를 채웠다. 산업혁명 이후 물자 생산이 크게 늘어난 이후 생산품의 소비처가 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백인 우월주의 인종차별은 일상화됐다. 그들보다 열등한 남미와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노예로 상품화되어 거래되는 일은 백인들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독일과 일본의 침략전쟁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 독일과 일본은 식민지 경쟁의 후발주자였다. 당연히 해외에서 식민지 지분을 확보할 수 없었다. 그들의 침략의 명분 중 하나는 인종주의다. 히틀러에게 타 민족보다 우월한 독일 민족이 유렵을 지배하는 건 당연했다. 분명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당시 독일에서 히틀러의 극단주의는 큰 지지를 받았다. 히틀러는 자신의 능력만으로 권력의 최정점에 이른 인물이 아니다. 시대적 흐름 속에서 생겨난 인물이라 할 수도 있다. 

일본은 국군주의로 나라를 무장한 후, 신격화된 그들의 일왕을 중심으로 아시아를 서구의 침략에서 구원하자는 대동아공영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워 침략전쟁을 감행했지만, 그 저변에는 아시아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앞선 산업화와 군사력을 갖춘 일본의 우월함이 있었다. 그 결과 일제 강점기 속 우리 민족은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고 원치 않은 침략 전쟁에 인적, 물적 손실을 감당해야 했다. 일제 강점기의 상처는 아직도 남아있다.  

문제는 과거 독일과 일본처럼 민주주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이런 극단주의가 언제든 되살아 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이면을 살피지 못한다면 극단주의는 달콤함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인권 무시와 편견, 혐오, 잘못된 역사 인식, 인간의 이기심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 세력들이 다시 힘을 얻는다면 그 결과는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그 극단주의를 지지하는 이들도 그 틀에서 희생될 수 있다. 실제 나치와 일제는 자국민들에게도 그 희생을 강요했다. 그러면서 승리의 영광은 소수의 권력자들이 독차지했다. 나치 독일에 맞서 승리한 소련의 승전의 역사는 독재가 스탈린의 업적이 됐다. 소련의 승전은 국민들의 희생과 헌신이 그 바탕에 있었고 승전의 역사는 국민들이 주인공이 되어야 마땅했다.

독.소 전쟁은 건강한 민주주의가 유지되고 발전시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있다.  극단주의는 우리의 무관심을 먹고 자라는 괴물일지도 모른다.이를 위해 깨어있는 시민들이 정치,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그 힘을 발휘해야 한다. 과거사의 잘못된 부분을 기록하고 알리는 노력도 건강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주요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 


글 : jihuni74

 

728x90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